어제 우리교회 ‘하나님 나라’ class에서 잠깐 나눈 이야기.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슴아픈 일들에대해… 기독교가 (이상한 기독교 말고, 제대로된 기독교가) 해답이 될 수 있는 네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인권(human right)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유대-기독교적 가치가 아니라면 그 이론적 근원을 찾기 어렵다.
다른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그 세계관이 가지는 논리적 결과로 도출될 수 없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이것은 다른 종교인들이 비윤리적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윤리의 근원적 논리적 바탕이 기독교적 전통에서 solid하게 발견된다는 의미
둘째, 기독교의 하나님은 고통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 신 혹은 신적 존재가 인간을 위해 고통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고통 속에 하나님께서 어디계시느냐고 물으면, 기독교적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속에 계신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아보이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다른 세계관이 제공해주지 못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셋째,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은 내가 특별한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이룬 내 성취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함의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런 상황 속에서 겸손할 수 있다. 내가 뭔가 해답을 가지고있다고 나대지 않고, 이 아픔을 일차적으로 느끼는 흑인 형제 자매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들의 뒤에 따라 서는 것을 할 수 있다.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최악의 솔루션은 훈장질이다.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아픔안에 함께 머물며 내가 뭔가 급하게 해답을 주어야한다는 헌된 중압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한다.
넷째,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다. 내 아버지의 나라다. 세상의 아픔은 내 아버지 나라의 아픔이다. 이 땅이 내 아버지 나라인한, 그리고 그 땅에서 아픔이 있는 한, 기독교인들은 그 속에서 그 깨어짐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수 밖에 없다.
내 작은 영역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 agenda가 성취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야말로 그치지 않는 동인(motivation)을 가지고 계속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