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하다가 외로우면

기도를 깊이 하다보면 외로움에 사무칠때가 있다.

자주 그런건 아니지만, 가끔 한번씩은…
기도를 할때 내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할때가 있다.
그런 기도를 할때의 99.9999%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도를 할때이다.

제게 이런 문제가 있어요, 이것좀 해결해 주세요…
누구에게 어려움이 있어요, 그것좀 도와주세요…
뭐 당연히 그런 기도들을 할수 있고, 나도 물론 하지만… 그런 기도를 할때는 좀처럼 영혼의 눈물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기도를 하다보면 심지어는 내가 육체적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라도 내 영혼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대개는 그 하나님에 대한 갈망, 하나님을 사모함, 그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돌아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함 등등이 섞여서 기도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하고나면… 참 많이 외로워진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의 내용을 나누었을때 그것을 공감하는 사람이 대단히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내 온 영혼이 눈물을 쏟는 경험을 하고 나왔는데, 그런 경험이나 그것으로 부터 파생된 생각들을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그냥 눈만 껌뻑껌뻑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경험을 몇번 하고나면, 아… 그래… 이건 나누기 어려운거구나…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다.

아,
이건 무슨 내가 영적으로 우월하다거나 그런건 당연히 아닐거다.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은사와 경험들을 허락하시니까.
다만 내게는 손으로 만지는 것과 같이 tangible한 것인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뭐 외로운건 당연한거지.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나를 포함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자체에 깊이 좀 빠져들길 간절히 바란다.
이 바람과 기도는 벌써 내게 25년쯤 된 것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도 잘 들어주시지 않는다.

이 블로그에서 내가 가끔 언급하는 (그리고 가끔은 그 형이 이 블로그에 들어오기도하고 ㅎㅎ) 어떤 형은,
나랑 스타일도 많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많이 다르고, 생각이나 삶의 방식도 많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참 많이 다르다.
그런데 그 형과는 이런 기도의 내용을 이야기했을때, 아… 그래… 하고 통하는게 있다.
그 형과 함께 옆에 나란히 앉아서 기도를 해본게 20년정도는 된것 같은데… 어쩌다 몇년에 한번 만나도… 그래도 여전히 그 형과는 그런 기도의 대화가 통한다.

이런 외로움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걸 안다.
그분은 내게 그렇게 친절한분이 아니시다. ^^

그 기도의 외로움이 이젠 그냥 익숙해졌다.

어제 밤,
기도를 하다가 그 형 생각이 났다.
기도를 하다가 많이, 많이 외로웠다.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

회사에서 당연히 함께 일하는 사람들중에는 남자들도 있고, 여자들도 있다.
특히 지금 내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project들에는 여자들이 많다.
보통 미팅을 하면 절반 정도가 여자이고, 어떤땐 여자가 더 많을 때도 있다.

음…
국민학교 이후로 나는 이런 환경은 사실 처음이다. -.-;
뭐 여자들이 더 많다고 해서 특별히 더 불편하다거나 더 좋다거나 하는 것은 없는데,
그중에는 특별히 자신이 ‘여성’임을 많이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말투라던가, 옷을 입는 것이라던가, 손짓같은 작은 것들에서,
정말 ‘여자, 여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만 그러느냐.
사실 그렇진 않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중에는 괜히 ‘마초’스타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앉을때도 쩍벌남하고, 말투도 괜히 터프하게 하고, 화끈하게 의리있게… 완전 그런 스타일이랄까.
싸나이~ 뭐 그렇게 외치면서 다닌다고나 할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회사에서 좀 더 편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유난히 마초인척 하는 남자라던가, 여자라는거 마구 ‘티내는’ 여자들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 이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별로 신경이 쓰여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제도 저녁 7시가 다 되도록 미팅을 하나 했는데, 거기 참석했던 한국 회사의 방문객이 미팅 끝나고 나서 내게
‘그런데 오늘 그 여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라고 물어보는데… 여자분? 누구? 하고 잠깐 멍~ 해졌다.
분명히 그 사람이 여자인건 맞는데 나는 그 Roxana라는 사람과 일을 했지 Roxana라는 여자와 일을 하지 않았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막 못생겼다거나 그런것도 아니다. 다만 ‘여자 여자’ 하면서 지내지 않을 뿐.

왜 그럴까?
왜 나는 강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덜 편하게 느낄까?

몇가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아마도 professional field에서 어떤 사람의 gender가 job functionality에 영향을 주도록 행동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게 아닌가 싶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그 일을 하는 ‘동료’이자 ‘사람’으로 알고 싶은 것이지,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내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자,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렇게까지 어제 저녁에 생각을 해 보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혹시 내가 기득권의 gender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status quo가 불편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과연,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 계속 불이익을 당하는 세상이라던가,
좀 더 나아가서…
‘동성애자’ 혹은 ‘트랜스 젠더’ 등과 같은 소수자여서… 그런 자신의 gender identity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불이익이 되는 세상 속에서,
내가 약자로 살고 있다면…
그래도 나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

marginality라는 이슈를 머리에 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한번 더 해보게 되었다.

공부하고 싶은게 넘쳐나는데

음…
대개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국어 공부할때 수학 공부 하고 싶어 하고, 음악 시간에 체력장 하고 싶어한다지.
중간고사 시험 기간에 예습하고 싶어하고, 기말고사 시험기간에는 문학작품 독서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고.

사실 난 늘 하고싶은 공부가 참 많다.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을 정말 좀 더 제대로 공부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뭐 늘 그렇다.
여러가지 공부하고 싶은게 많이 넘쳐다던중에, 요즘은 ‘종교학’같은 분야가 정말 많이 궁금하고 땡긴다.
불교도 좀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기도 하고, 이슬람이나 힌두교도 대학교양과목 수준의 지식이라도 좀 얻고 싶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 공부가 많이 땡기는 이유는…
정말 genuine하게 공부를 하고 싶은 것이라기 보다는,
회사일에 쫓겨서 공부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해본다.

아마 회사일이 한가해지면,
이렇게 불타오르는 학구열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

하나의 씨앗교회 추천 도서 (9월)

이달의 추천도서 목록

–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우찌무라 간조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니콜라스 월터스코프
– 성전신학, 그레고리 비일
– 세속화와 복음, 손희영
– 묵상의 여정, 박대영

책 소개를 하긴 하지만,
사실 책을 사는 사람이 많지도 않고, 호응이 많은 것 같지도 않아서…
두달에 한번 하는걸 석달에 한번으로 줄일까 하는 고민을 살짝 하고 있는 중이다. ^^

교육과 양육 – follow up

우리 목사님께서도 교육과 양육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눈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셨고,
더가까이님께서 교육과 양육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질문을 하시는 바람에…
깊은 생각없이 후다닥 쓴 생각에 바닥이 났다.

그래서 나름대로 좀 더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해 보았는데…
여전히 얕은 바닥이다. -.-;

그래도 약간 생각을 해보자면,

가령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그 아이를 건강한 성인으로 키우는 일을 할때…
어릴때는 거의 교육의 부분이 없다. 말을 해도 못 알아 먹으므로.
그때는 그야말로 잠 못자면서 밤에 젖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그렇게 ‘양육’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좀 더 크면서,
소위 ‘버릇’을 가르치면서 비로소 양육 안에 교육의 요소가 들어가게 된다.
어른을 만나면 공손하게 인사해라.
길에 휴지를 버리지 말아라.
신호등을 잘 지켜서 길을 건너라.
밥을 먹기전에는 식사를 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해라… 등등.

그리고 좀 크면,
학교를 보내고 학교에서 숙제를 가지고 오면 그것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되고…
점차 돌보아주는 것보다는 아이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는 일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아이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자라게 되는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은 중요한 양육의 요소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들이 integrate되어서 지혜로 자리잡을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역시 부모가 해야하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건강한 식사를 하도록 도시락을 싸주는 일이라던가, 학교 왔다 갔다 ride를 해주는 일이라던가.

심지어는 대학을 가고, 더 나이가 들어도…
이때가 되면 자녀가 전공한 분야에 대해선 부모보다 자녀가 더 잘 알게될 수 있으므로 부모가 제공해줄 수 있는 교육은 더 줄어들게 된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남자친구에게 차여서 울고 있는 딸의 어깨를 감싸주면서 따뜻하게 격려해 주는 것이라든지,
취직이 잘 되지 않아서 좌절하는 아들에게 진심어린 충고와 함께 용기를 주는 것이라든지,
그 속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여전히 부모의 양육이다.

양육은 양육자(부모)가 initiative를 가지고 피양육자(자녀)를 이끌어 주는 요소가 더 크고,
교육은 피교육자의 필요에 따라서 공급해주는 요소가 더 크다고 하겠다.

요즘 교회에서는,
영양이 결핍되어…영양실조에 걸려 아사직전에 있는 아이에게, 건강한 식단에 대한 교육을 시켜주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많이 발견한다.
당장 그 배고픈 아이를 보면서 많이 가슴아파하며… 그 아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죽을 먹여야 하는 건데 말이다.
그 아이가 심지어는 안먹겠다고 해도,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거 먹어야 너 산다… 그렇게 눈물을 흘려가며 죽을 떠먹이는게 양육의 모습이라는 거다.

내가 정형화되어있는 ‘(제자)훈련’ 같은 것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아 물론 다른 이유도 한참 더 많이 있다. ㅋㅋ)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양육자의 마음을 갖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내 안에서 그 양육자의 마음을 찾는 것이
더 희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4:15-16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년 기념

어제 얼핏 날짜를 세어보니,
작년 오늘이 내가 이전 회사에서 lay-off 당하고 마지막으로 출근했던 날이었다.

지금 직장에와서 아직 10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벌써 한 2-3년은 일한 기분이다. -.-;

정신없이 살다가…
어제 날짜를 확인해보고는 문득 숙연해졌다.

불과 일년전 오늘은,
다음 직장이 언제 잡힐지도 모르는 채로 마지막 퇴근을 했었구나…

그리고는,
작년에 lay-off 통보를 처음 받고 새 직장 출근을 하기까지 3개월동안 적었던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땐 나름대로 힘이들기도 했고,
하루에도 몇번씩 감정기복이 심해서 그걸 다스리는데 애도 많이 썼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래서 다시 직장을 잡게 인도해주신 것이 참 물론 감사하지만,
그 모든 과정 중에 한순간도 나를 놓치않고 나를 붙들어주셨던 하나님이 정말 감사하다.

매년 오늘을 기념하고 기억하지도 못할테고,
내년쯤 되면 이런 기억도 많이 흐릿해 지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다시한번 마음에 조용히 더 담아보려한다.

교육과 양육

어제 목사님과 몇몇분과 email communication을 했는데,
거기서 내가 쓴 내용의 일부이다.

목사님은 교육과 양육을 너무 이분화해서 나눈거 아니냐고 하셨는데…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그래도 한번 내 생각을 나눈다는 차원에서 내용을 살짝 editing해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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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교육(education)으로 길러지기 보다는 양육(nurturing)으로 길러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많이 하고자 하는 제자훈련은, 양육을 교육으로 replace하려고 했고, 그것이 심각한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생명이 살아나는 일을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양육이고,
교육은 양육을 풍성하게 만들지만 양육없는 교육은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demand나 need base로 이루어 질 수 있지만,
양육은 양육하는 사람의 intention과 사랑이 대단히 중요하고요.

사람을 키운다고 생각을 할때,
교육 program을 만들자고 접근을 할수도 있는데요…
저는 양육의 스피릿을 어떻게든 함께 좀 세워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제가 좀 old fashion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사실 교육보다는 양육에 백만배쯤 더 관심이 많습니다. ^^
제가 교육을 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결국은 양육할 사람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할때에도,
양육의 차원에서… 양육의 스피릿으로… 혹은 교육을 양육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의견을 드려봅니다.

고린도전서 4:15-16의 스피릿이 좀 잘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교회에서 양육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시고 생각될때… 너무 쉽게 ‘프로그램’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출장을 하면서 낭비하기?

일요일 저녁, 호텔방에 들어오니 밤 10시 가까이 되었다.
잔뜩 피곤하긴 한데, 저녁도 못 먹었고… 그 시간에 뭔가 먹을만한데를 찾아 나서기도 그렇고…
그냥 호텔방에서 in-room dining을 시켜먹었다.

뭐 대단한건 아니었고, 그냥 햄버거랑 콜라였는데 당연히 호텔 방에서 시켜먹는 그런 종류는 터무니 없이 비쌌다.
tip포함해서 계산을 하니 30불이 넘었다.
세상에… 30불짜리 햄버거라니…

그 밤에 호텔방에서 혼자서 그 햄버거를 먹으며 쌓여있는 이메일들을 처리하고 있다가 문득….
아니, 내가 이거 ‘내돈’ 아니라고 너무 막 쓰는거 아니야? 뭐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실 내가 내 돈내고 여행을 할때라면,
호텔 방에서 30불짜리 햄버거를 시켜먹는 일이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해보니,
business trip을 하면서는 어디가 좀 더 싼가 뭐 그런거 따지지 않고 어디든 후딱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평소라면 가지 않을 비싼 식사도 내가 많이 한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출장을 가면, 좀 ‘억울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개고생’하는 것에 대한 compensation으로 먹을거라도 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출장을 좀 길게 갔다오면 꼭 체중이 불고. -.-;

정말 출장을 다니면서는,
밤에 혼자서 그냥 묵는 호텔에서 파는 호텔 부페를 먹을 때가 많고,
아침도 그 호텔에서 먹을 때가 많은데…
이게 저녁은 보통 50~60불 수준이고, 아침은 20~30불 수준이다.
당연히 내 돈내고 먹으라면 당연히 그렇게 안할테지.

이거 아낀다고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사실 아무도 눈치도 못채겠지만…
혹시 시간이나 체력의 여유가 조금 있다면 그 spending 줄이는 노력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또 출장…

오늘은 또 출장이다.
어제밤 늦게 호텔에 도착했다.
하루짜리 출장이긴 한데… 오늘 해야하는 presentation material을 열심히 준비하느라 토요일을 바쁘게 지냈다. -.-;

게다가 오늘 하는 미팅은,
뭔가 실제로 ‘일’을 하는 미팅이라기 보다는 대단히 뷰로크래틱한 미팅이어서,
내가 완전 싫어하는…
바쁜 와중에 이렇게 하루를 버리게되면 나머지 한 주가 더 빡빡해 지는데…

사실 요즘 여러가지 생각이 하도 많아져서,
아마 차분히 앉아서 글을 좀 쓰면 아마도 몇달분 글은 한꺼번에 나올듯한 분위기인데…
음… 그걸 써 낼 시간이 없다.

그렇지만,
뭐 이렇게 벌어서 우리 밥도 먹고, 딸래미 학교도 보내고… 한다 싶어…
그냥 또 열심히 하겠다고 굳게 결심 중이다. ^^

많이 많이 미안했다.

간사 모임에서…

첫째날 저녁에 조금 일찍 집에 들어갔고,
둘째날 저녁 즈음에 다시 가서 보니… 그 전날밤에 간사들이 소위 ‘옛날 간사’들을 ‘우상화’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이 좀 있었다.

둘째날 저녁 늦게까지 여러 토론을 마치고 흩어지려는 간사들을 잠시 붙들어 두고…
대충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여기 쓴것처럼 조리있기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주 즉흥적으로 갑자기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저는 휘튼에 학생만 1800명씩 모이는 집회를 간사 15여명 가지고 돌려보았던 시대를 경험했었습니다.
참 대단해 보이나요?
아닙니다.
그때는 정말 사정이 좋을 때였습니다.
아직은 그래도 한국 교회에서 건강한 흐름이 유입되고 있었고, 학생 리더십도 어느정도 있었고,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의 pool도 꽤 넉넉했고, 재정 사정도 지금과 같이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상황이 좋았던 것이었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대단해서 뭐가 잘 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의 시대는, 우리가 돌아갈 황금시대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은,
훨씬 더 어려운 시대에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참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고 대견하고 기특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 하시는 간사님들의 모습에 정말 눈물이 핑 돕니다.

그렇지만,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이 많이 고갈되었을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바로 그런 시대에 계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코스타를 섬기면서 가장 영광스럽게 느꼈던 것은, 우리가 섬기는 학생들의 아픔을 간사들이 삶으로 살아내도록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것을 경험할때 였습니다. 직장 문제로 힘들어하는 학생들의 상황을, 간사들이 그래도 경험하거나… 재정 문제로 힘든 상황을 간사들이 경험하게 되거나.
아… 하나님께서 그래도 부족한 우리를…. 이 학생들을 섬기는 사람으로 봐주시는 거구나…

좋은 강사 한 사람 찾는 것도 어렵고, 돈도 없고, 사람도 부족하고… 정말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시지요?
그렇지만, 그런 열악한 상황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학생들이 처해있는 상황 아닙니까?
다니는 교회는 분열되고, 강단에선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설교라는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고, 함께 섬길 사람이 없어 말로 다 할 수 없이 외롭고, 세상의 벽 앞에 두렵기만 하고…

학생들의 그 어려움을 우리 섬김의 장에서 여러분이 경험하신다는 것이…
아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는 사람으로 여겨주신다는 위로입니다.

벌써 거의 20년전부터 코스타를 섬겨왔으니…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힘든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저 같은 사람이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환경을 물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섬겼던 시대를 golden age로 우상화 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십시오.
많이 감사하고, 많이 죄송합니다.

우리 간사 후배들에게….
정말 많이, 많이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