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잘 연락하지 않는 오래된 친구

예전에는 아주 가깝고 친했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을 해도 그 친구로부터 대답이 없다.
조금 어둡고 힘든 시간을 지나가며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 친구가 연락이 없다.
그래서 나도 그 친구에게 더 이상 그렇게 자주 연락하지 않는다.
그 친구와의 좋은 추억도 있고, 그 친구와 절연을 했다거나 그런건 아닌데….
그냥 그 친구와 관계가 서먹서먹한거다.

그 친구는 하나님이다.

사실 요즘 내게 하나님이 그렇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은 것도 아닌데,
그 하나님과 좀 서먹서먹하다.

그래서 잘 연락하지 않는 오래된 친구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느껴진것이 내게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매우 자주, 특히 감정의 기복이 지금보다 더 심했던 20-30대에는,
하나님과 소원한 사이를 유지한채 시간을 보냈던 적도 자주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빈도가 많이 줄긴 했지만,
지금 나는 하나님과 좀 그렇다.

예전에 그렇게 하나님과 서먹서먹해졌을때,
그렇게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새 그분이 내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다시 깨닫곤 했는데…
그냥 요즘은 하나님과 좀… 그렇다.

교회…

그래도 꽤 ‘이상적인’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되던 교회에 다닌적이 있었다.
작은 교회였고, 나름 여러가지로 균형잡혀 있었고, 그 당시로서 건강한 신학적 신앙적 전통위에 있었다.
교회 구성원 사이의 유대가 튼튼했고, 적극적으로 reach out했다.
그러나 그 교회는 몇년이 지나면서 처음의 그 모습을 점점 잃어갔고, 결국 그 후에 다른 모습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그후 그 당시 꽤 건강하다고 알려진 대형교회도 다녀 보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참여해 보았고,
미국의 학생중심 교회, 이민 교회도 경험해 보았고,
영어를 쓰는 백인중심교회, 그리고 지금은 영어를 쓰는 다양한 민족이 함께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정말 ‘그나마 이 정도라면 다녀볼만 하겠다’고 생각되는 교회들이 정말 없다. ㅠ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믿은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가 아닌걸까?
아니면 현대 교회들이 다 그렇게 많이 망가진걸까?
원래 교회란 다 이렇게까지 형편없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책에서 읽은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데….
정말 교회들이 영광스러웠는데…

시편 119:92

주님의 법을 내 기쁨으로 삼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If Your Law had not been my delight, Then I would have perished in my misery.

이 말씀에서 딱 막혔다.

주님의 법이라는 것은 결국 율법인건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기쁨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기쁨이라고?
그것이 삶의 방법이고, 그것이 삶의 방향이 되는 것… 그것이 기쁨이라고?

소위 내가 ‘영적 컨디션’이 좋을 때는, 정말 그렇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영적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그것이 기쁨도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잘 살지도 못하는 것 같다.

내가 perish in my misery가 되지 않으려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align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

역사의 예수님과 신앙의 예수님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내 믿음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 역시 내겐 점점 중요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내 생각은,
역사의 예수가 중요하지만,
신앙의 예수 없는 역사의 예수는 오히려 온전한 예수가 아니라는 것.

지금의 내게는,
그리고 어쩌면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예수 이상으로 신앙의 예수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 아닐까.

직업과 소명

어제의 글에 이어서…
직업을 소명과 연결짓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직업에서 지나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에 헌신하는 것도,
매우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어그러진 욕망의 표현일 경우도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최근까지,
전 인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성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
직업은 그저 부모로부터 물려 받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먹고 살기위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먹고살기위한 수단, 혹은 고된 노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참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 목적이나 삶의 의미를 자신이 하는 노동에서 혹은 직업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1st world problem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일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없다.
그리고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자족이 없다.

소위 AI 혁명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시대에…
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조금 더 다른 관점에서의 일/직업에 대한 관점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절

미국에서는 지키지 않지만 오늘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지키는 노동절이다.

내가 처음 노동이라는것을 접했을 때는 한국에서 석사과정에 들어갔을 때였다.
하루에 12시간 이상 실험실에 있어야 했고, 그런 환경에 처음 접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성실하거나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그때 당시엔 내가 열심히 한다고 착각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렇게 쭉 붙어서 일을 한다는 것이 내게 익숙하지도 않았고,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그때쯤 나는 복음에 조금 더 눈을 떠서 배워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일을 하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신앙과 일의 의미,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그후 나는 직장생활과 대학원 생활을 거치면서 계속 일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요즘 내 생각은,
기독교세계관적 접근이… 지나치게 일을 glorify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실 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면이 없지 않고,
가령, 예수님 당시의 아마 99.9% 노동자들은 그 일이 고통이었을 것 같은데….
그 일에서 신앙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은 그냥 21세기 서구사회에서나 적용 가능한 일종의 사치가 아니겠나 하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 사는 시간이 괘 되어서,
내게 일은 그냥 어느정도 익숙한 삶의 practice가 되어버리긴했지만,
그리고… 나는 감사하게도 일에서 재미를 찾고 의미를 찾는 직업에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사치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노동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평화를…

그냥 놀라운 사람의 능력

사람마다 특기와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신기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사람 목에서 저런 소리가 날까 싶게 노래를 하는 가수나,
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
42.195km를 2시간 조금 넘는 시간에 들어오는 마라톤 선수,
오케스트라 전체 모든 악기가 다 들어있는 악보를 읽어가며 지휘를 하는 지휘자,
공중에서 여러바퀴를 돌고나서 마치 자석이 철판에 붙은 것 같이 척 하고 내려서 착지하는 체조선수 등등은 그냥 사람이 열심히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건 아마도 내가 그런 쪽에 재능이 없으므로 내가 노력해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내가 하는 일은,
그저 사람들이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훈련하고, 조금 더 경험을 쌓고, 조금 더 머리를 쓰면 내 생각엔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대단히 놀랍지도 않고, 그저 그냥… 저건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다.

나는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매우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내 분야에서 내 일을 그냥 열심히 성실하게 잘 해내는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내 일상은 그렇게 놀랍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다.

20대라면, 내가 그렇게 특출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렇게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이 참 위로가 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그렇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

웬만하면 한국어 책을 종이책을 사지 않고 있긴 한데,
지난달에 나름 결심을 하고 자그마치 1200페이지가 넘는 엄청 두꺼운 한국어 책을 하나 샀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

전성민 교수님이 자료를 모으고 그 내용들에 해설을 달아놓은 자료집+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이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모아서 편집하고 그것들에 꼼꼼하게 comment를 한 전성민 교수님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적어도 한국 기독교 세팅에서 기독교 세계관 논의의 주도권을 전성민 교수님과 VIEW가 가지고 오게 되었다고 평가할만하지 않을까 싶다.
전성민 교수님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극우 기독교쪽에서 자꾸 쓰고 있어서 그 단어를 좀 다시 빼앗아 오고 싶다고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그렇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책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또 다른 감동은…
그 모여있는 자료들을 쓴 사람들, 그 사람들이 헌신했던 운동들, 그 사람들이 그 당시에 했던 고민들 등등이 그 책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대충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 논의들이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때는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였다. 게다가 그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주도했던 사람들과 그룹중 일부와는 이렇게 저렇게 내가 연결되어 있기도 했기 때문에 이 책에 있는 자료들이 그냥 자료로만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많은 자료들은 내가 대학생때 이후 직접 읽거나 접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때 했던 고민들과 생각들은 내 20,30,40대의 고민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런 글들을 읽으며,
때론 이런 글들을 쓴 사람들로부터 배우기도 하고, 그분들과 대화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이런 글들의 담고 있는 생각과 고민의 운동들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면서,
나는 내 20대 이후를 보내게 되었던 것 같다.

신선한 아가서

최근 말씀 묵상 본문이 아가서였다.
아가서는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꽤 messy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의미도 잘 이해가 안되기도 한 본문이었다.

그러던중,
민춘살롱에서 흥미로운 관점을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아가서는 삼각관계를 그린 이야기라는 것.

술람미 여인과 시골 목동의 사랑이 그려져 있고, 거기에 솔로몬이 권력으로 그 여인을 차지하려고 하는 그림이라는 것.

그러니까 술람미 여인이 꿈속에서 그리는 남자는 시골 목동이고,
솔로몬은 그런 술람미 여인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차지해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읽으면 사소한 부분에서 삐걱거리게 느껴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가서가 훨씬 더 일관성있고 입체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전성민 교수님의 지도교수이신 Ian Provan은 이 내용으로 NIV application commentary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복음을 이해함

1.
피타고라스 정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배웠던 수준의 수학에서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배우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공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타고라스 정리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간단하게 둘로 나누어 질 수 있는 것 같다.

2.
그런데, 미분-적분에 오면 좀 달라진다.
간단하게 sin x를 미분하는 공식을 알고 그것을 미분할 줄 아는 ‘얕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 있었고,
미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 의미까지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냥 공식을 외워서 미분-적분을 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그것으로 시험문제를 조금 풀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미적분은 그 이해의 수준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3.
복음은…
이게 또 다른 차원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몇년, 몇십년을 보고 지내더라도…
말할때는 대충 ‘정답’을 말하곤 하는데, 막상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그 사람이 복음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복음의 어떤 면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차원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해보이기도 한다.

참 안타깝고도 답답한 것은,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피타고라스정리를 이해하는 것 처럼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은 자신이 이해한 복음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나름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교회에서 여러 형태의 리더로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했는데,
몇년, 몇십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한계에 딱 막혀 있어서 복음을 더 이상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4.
어쩌면…
나도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