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함과 하나님의 인도

가끔,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가슴 철렁하도록 미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20대 후반에,
도대체 무슨 신앙과 삶과 세상에 insight가 있다고…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인냥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을 기억한다.

shallow한 passion과 더 shallow한 지식으로,
쉽게 모든 것을 재단하려고 했던 것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만일,
그때 내 생각이 정말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 속에서 현실로 이루어졌다면…
어휴… 정말 가슴 철렁한 일이다.

매 순간의 고민과 생각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 미숙함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이자 인도하심이 아닐까 싶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10년, 20년 후에는,
지금 내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회상해볼 수 있기를 정말 바란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

캘빈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고,
알미니안들을 포함한 비캘빈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다.

최근 내가 생각해서 정리해 본 것.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캘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쉽게 ‘마초’ 하나님으로 왜곡하게 만드는데 반해,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연약함, 죄된 본성 등을 잘 설명하는 것 같다.

반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사랑 등을 더 잘 설명하는 데 반해,
인간에 대해 너무 많은 credit을 주어 오히려 왜곡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나 혼자 정리해본 개똥 신학. ㅋㅋ
 

결심과 예배

‘내가 그리스도인 답게 살겠다’고 결심하도록 이끄는  경험이나 예식, 말씀이나 찬송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그야말로 예배하도록 이끄는 경험이나 예식,  말씀이나 찬송 등이 있다.

전자는 인간적 결심을 이끌지만, (결심)
후자는 인간적 결심을 오히려 포기하게 한다. (예배)

결심은 소망을 던져줌으로써 결심하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만,
예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망이 드러나기 전에, 오히려 더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결심은 단기적으로 꽤 큰 효과가 있어 보일 수 있지만
예배만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효과가 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예배의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그저 그분 앞에서 바짝 엎드려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없었던 그런 하나님이었다.
그분 앞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그저 그분이 진심으로 좋아서 그분을 따르는 그런 경험이었다.
내가 그분을 위해서 결심하게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정말 그분을 사랑하게되는 그런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결심의 하나님을 다른사람들에게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내가 주변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에서, 예배의 하나님이 아닌 결심의 하나님만을 이야기한다.

그 하나님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경배하고, 
그분 앞에서 바짝 엎드려 내 죄를 토설하며 울고,
베풀어주신 구원에 감사해서 찬양하는…
그런 genuine한 예배의 경험이 그립다. 

(아땅님 감사합니다~ ^^ 바꾸어 올렸습니다.) 

Do I Believe in Tebow?

Denver Broncos의 quarterback인 Tim Tebow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이 많다.
NFL (미국 미식축구 리그)에 친숙하지 않는 분들을 위해 Tebow 열풍을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다.

Denver Broncos에 Tim Tebow라는 쿼더백이 있다. (쿼터백인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
그런데 Tebow는, 순전히 기록상으로는 그렇게 훌륭한 선수가 아니다. Quarterback Rating 이라는 것으로 점수를 매기는데, Tom Brady와 같은 최상의 쿼터백들에 비하면 그 급이 많이 떨어진다.
그런데, Tebow는, 팀이 궁지에 몰렸을때, 어떻게 이상하게 꼭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곤 한다. 이게 한두번이 아니고 여러번 계속 반복되니… Tebow의 마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Tebow가 아주 대놓고 신앙고백을 하는 크리스찬이라는 사실이다.
자기 얼굴에다 성경구절을 크게 써놓고 경기를 하질 않나, NFL 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인터뷰 할때도 예수님 때문에 이겼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게 꽤 거슬리는 것 같다. 한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만화를 본적도 있다.
 
 
지난주말에, Tim Tebow가 이끄는 Denver Broncos가, 훨씬 더 잘하는 팀이라고 생각되었던 Pittsburgh Steelers 를 연장전에서 극적으로 이기는 이변을 연출했다.
당연히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다.

Tim Tebow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공개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다른이들에게 공격적인 형태로 하기도 하지만, Tebow는 그런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NFL 경기에서의 승리를 신앙과 연결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내 마음을 꽤 많이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다음 경기에서는 이런 장면을 보고 싶다.

Tim Tebow가 이끄는 Denver Broncos가, 아주 박빙의 경기를 펼치며 잘 싸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깝게 패했으면 좋겠다.
그리고나서… Tebow가,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고 싶다.
인터뷰의 기회가 왔을때, 자신은 비록 경기는 졌지만 열심히 뛰었다고, 최선을 다했지만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해 팬들에게 미안하다고. 비록 이기진 못했지만 건강하고 재미있는 경기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내 신앙은 경기의 승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다.

승리주의라는 독약에 도취되어 있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승리주의를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한번쯤 보고 싶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정말 Tim Tebow의 fan이 될 것 같다.

아, 다음 경기에 Broncos가 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다음 경기 상대가… 내가 응원하는 팀인 Patriots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ㅎㅎ

상위개념, 하위개념

아래 글은,
최근… ‘친북좌파척결’의 극우 정치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여기고 있는, 내가 아끼는 한 친구와 나눈 이메일 대화중 일부를 옮긴 것이다.
신앙이 정치성에 종속되지 말아야 할 것에대한 내 논증인데… 아마 내 이런 논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을 듯. ^^ 
(반론, comment 환영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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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신념은, 그 당시 처한 상황 속에서 무엇이 최상의 솔루션을 제공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분석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지.

가령, 너도 네 이메일에서 썼지만, 어떤 사람은 북한의 위협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경제정의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잖아. 또, 북한의 주민들을 어떻게 하면 그 폭압과 부조리에서 해방시켜낼 수 있을까 하는 접근에 대해서도, 북한을 점진적 개방으로 이끌어야한다는 입장으로부터 북한을 강하게 몰아서 붕괴에 이르게해야한다는 입장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하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보면 100% 충분한 과학적 data를 바탕으로 결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모든 information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A 라는 결정을 하면 A’ 이라는 결과가 나온다고 100%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지. 물론 어떤 입장을 견지할 때에는, 그 입장이 충분히 내적 통일성 (integrity)를 갖는지, 가능한 많은 data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등등을 evaluate 해봐야 하겠지.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그리고 현실과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적 신념을 이야기할때에는, 자신과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에 대해 관용을 갖고, 서로 대화를 통해서 풀어나가는 작업이 중요할 수 있지. 물론 그것이 어려울 때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화를 거부하는 그룹을 극우 혹은 극좌라고 이야기하는 거지.
그런데 신앙은, 그것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야.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던 보수적이건 간에, 같은 신앙을 가질 수 있지. 신앙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기 이잖아. (이 argument에 동의하지 않는 신앙인도 물론 있을 수 있지. 그렇지만 너같이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이야기하는 이 notion에 동의하리라 생각해.)
그런데, 정치적 신념을 신앙과 연결시키게되면, 하위의 개념과 상위의 개념을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상위 개념의 범위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되지.
가령 예를 들면, 일반적인 인과론(논리 체계)과 논리 라는 상위의 개념이 있고, 그 인과론과 이성을 바탕으로 인간이 세상을 기술하는 방법으로 뉴튼 역학을 발견해 내었지? 뉴튼 역학은, 매우 powerful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과론과 이성이라는 a priori concept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잖아. 만일 여기서 뉴튼 역학을 거부하는 것은 인과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상위 개념과 하위 개념을 바로 동일시 하는 거지) 라고 이야기하면, 그 순간 인과론의 범위가 뉴튼 역학이라는 하위 개념으로 좁아져 버리게 되지. 그래서, 가령, 뉴튼역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지만 인과론이라는 더 큰 개념 안에서 설명이 되는 상대성 이론 같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거고. 
신앙과 정치적 신념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아.
극우(좌)파의 사상 = 기독교 신앙 이라는 등식을 성립해버리면, 극우(좌)파의 사상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극우(좌)파의 사상의 수준으로 기독교 신앙이 강등되게 되어 버리지.
역사적으로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정치적 신념과 신앙을 동일시 했을때마다, 교회는 힘을 잃어버렸고, 복음의 영광이 가리워졌어.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때 그랬고, 중세교회가 그랬고, 국교화되었던 개신교회들이 그랬고, 히틀러를 지지했던 독일교회나… 그리고 나는 지금의 한국 교회에서도 그런 것을 보면서 많이 우려하고 있어. 그리고… 네 이메일을 읽으면서도 그런 불편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고.

 

No Golden Age

옛날이 좋았지~  
이 표현은, 자신의 개인적 과거를 돌아보는, 나이많은 사람이 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 표현을 듣는 것 중에서 가장 bother가 되는 것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미국을 세운 건국의 정신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듣는다.

그렇지만, 그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미국에게 있어,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할 Golden Age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건국 이념이 정말 기독교적인 것이었느냐 하는 것도 생각해보아야할 이슈이거니와,
정말 만보를 양보해서, 미국의 건국이념이 (그 당시의) 기독교적인 사상에 매우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다시 돌아가야할 Golden age를 제공해주느냐 하는 것은 더더욱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나는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이지만,
기독교의 이름으로 마녀를 사냥하고, 노예 제도를 정당화 하고, 여성의 인권을 억누르는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것들은 기독교의 가치가 아니라, 그 당시 기독교가 시대정신과 간음하여 낳은 사생아들이기 때문이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시대나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는….
그 시대의 진보주의자들이 무엇을 주장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이 무엇을 주장하느냐 하는 것인 것 같다.

진보주의자들은 어차피 그 처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해 더 진취적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므로 ‘검증되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모험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어떤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이 지켜내려는 가치가, 정말 꼭 지켜내야할 가치들 (인권, 자유, 사랑, 공동체의식, 약자에대한 배려, 하나님 사랑 등등)이 아니라,
잘못된 Golden Age에 대한 신기루라면…
그 시대는 크게 병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그 정치적 보수주의자들과 결합한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돌아가야할 Golden Age가 없다는 것과,
따라서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는, 많은 경우 아직 우리가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참 간절하다.

한국의 이명박 정권과 배에 기름낀 강남 기독교를 바라보며,
미국의 Rick Perry, Tea Party 등과 남부 Bible Belt의 보수주의자들을 바라보며..

적어도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들과 같이 되지 않는 것을 포함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틴 로이드-존스

지난번 시애틀 간사 수양회였던가,
몇 사람이 함께 모였을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 신앙의 기본적인 색깔은 뭐니뭐니해도 ‘청교도 신앙’ 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

10여년전, 나는 마틴 로이드-존스의 사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여태까지도 나는 마틴 로이드-존스가 내 신앙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들중 하나로 꼽는다.

어제 주일 오후,
교회에 다녀와서 잠깐 쉬던중에, 마틴 로이드-존스의 설교 녹음 file을 파는 site를 발견했다.
http://www.mlj-usa.com
그분의 책을 읽기는 했지만, 그 설교를 들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금새 몇개 설교를 다운로드 받아 들어보았다.

처음 들었던 설교는,
그야말로… 무척이나 지루하게 들렸다.
정말 옛날 말투로, 발음도 이상하게 들리는 그런 설교였다.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스타일이 그야말로 너무 ‘구식’이었다.

그런데, 두번째 설교부터는….
그 설교 끝에 나도 모르게… ‘아멘’이라고 response를 하게 되었다.

세번째 설교를 듣는 중에는,
중간에 탄성도 지르고…
공감도 하고,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하였다.
과연 20세기 최고의 설교가라고 불리울만 하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20세기 초반의 설교이므로,
contents나 style이 분명히 out of date인 부분이 있었다. 그야말로 ‘옛날 설교’ 였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경험할 수 있었다.

현대에,
그런 설교가를 좀 만나볼 수는 없을까.

나는 청교도적 신앙을 가진게 분명하다. ^^

더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

신앙의 여러가지 개념들은,
이해된다기 보다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신앙이 논리의 과정으로 설명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논리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과 (가볍게)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랑, 은혜, 사명, 인도하심, 성숙 등등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Glory)라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perceive하지 않고는,
위의 내용들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
막상 그리스도인들과 ‘영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란 참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 영광에 대한 내 이해가 천박한 수준이기 때문이겠지만,
영광을 이해하지 않고도 신앙이 가능하다고 믿는 현대 기독교의 수준,
하나님과 대면함이 없이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믿는 현대 기독교인의 생각 등이 역시 그 이유가 되는 듯 하다.
 

That’ll be nice!

내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열심히 광고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어제는 민우가 내게 이것과 관련해 질문을 해서 약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민우 : 왜 사람들이 이번 토요일에 세상이 끝난다고 그래?

아빠 : 글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때 오신다고 믿고 있다나봐.

민우 : 그 사람들은 무슨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나보지?

아빠 : 음… 그 사람들도 자기들이 크리스찬이라고 얘기하긴 해.

민우 : 이상하다. 

아빠 : 민우는, 그 사람들이 왜 이상하다고 생각해?

민우 : 예수님은 예상하지 못하게 (unexpectedly) 오신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다고 그러잖아.

아빠 : (흐뭇해 하며) 그래, 민우가 맞다!
그런데, 민우야, 만일 그 사람들이 정말 맞으면 어떻게 하지? 이번 토요일에 예수님이 진짜 오시면?

민우 : (아주 밝게 웃으며) That’ll be nice! 그럼 예수님 만날 수 있잖아!

—-

나는 이 시점에서,  민우에게 있는 ‘어린아이’의 믿음이, 내 믿음보다 더 깨끗함을 보았다.
나는 그 사람들의 신학적 관점이 어쩌고… 종말론이 어쩌고… 그런 얘기를 이끌어 내면서 민우에게 뭔가 신앙교육을 시키고 싶어 대화를 이끌어 냈는데,
민우는 “예수님 보고싶다” 라는 한마디로 내 모든 복잡한 논리와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유사 기독교 단체의 횡보

어떻게 된 것인지,
최근에는 대통령을 위한 기도 연대 라는 정체불명의 유사기독교 (pseudo-Christian) 단체가 내게 계속 이메일을 보내오고 있다.

내용을 보면,
극우의 정치 단체이지 결코 기독교적인 정신을 찾아 보기 어려웠다.

내용들을 보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대통령이 있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다”
“오만 방자한 이회창은 정계를 사퇴하라”
“스쿠크법은 한국을 점령하려는 이슬람의 음모이다”
등등의 이야기이다.

내용이 대부분 너무나도 쓰레기 같은 수준이어서,
읽어 내려갈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약간 시간을 내어서 읽어보니 정말 기가 막힌 수준의 말들이 많았다.
그들의 주장중에 많은 것에.. wikipedia에서 쓰는 것 처럼 [citation needed] 라고 꼬리표를 달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생겼었다.

그래서,
그 이메일을 보내고 있는 곳에 다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1천 2백만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오만 방자한 이회창씨를 심판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 이름에서 빼달라.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영광을 기뻐하는 사람으로서, 당신들의 주장이 복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의 영광은, 권력을 가지고, 이익집단/압력단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고 섬기고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수께서 만일 이 시대에 살고 계시다면, 너희들 힘을 합쳐서 이익집단으로 행동해라 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들과 같은 유사기독교(pseudo-Christianity) 단체들과 내가 동일시되고 싶지 않다.
제발 내 이메일 주소로 이런 이메일을 더 이상 보내지 말아달라.

물론,
수차례 그렇게 이메일을 보내서,
이렇게 spam 메일을 보내지 말라고 부탁을 했음에도,
여전히 그분들은 내 이메일 주소로 계속 이메일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