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과 어머니

우리 아버지쪽 가계는 매우 전통적이다.
소위 ‘낙대’를 한적이 없다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낙대를 한적이 없다는 말은, 선조로부터 서자가 한번도 끼지 않았다는 뜻인데, 그런 가계가 사실 그리 흔하지 않다고 한다.)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인 계열의 제사상 차리기와 서인 계열의 제사상 차리기의 차이를 논하는 것을 듣기도 했고…
내 어릴적 자장가는 소학이었다는 전설(?)을 전해 듣는다.

그런 집안에 우리 어머니께서 시집오셨다. 혈혈단신 그리스도인으로.

소위 4대봉사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함)를 하는 집안에서…
그리스도인 며느리로서 제사때마다 명절때마다 제사상 차례상을 차리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물론 육체적으로도 힘드셨겠지만, 정신적으로 당하셨을 어려움은 내가 다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께서 봉사손(제사를 지내야하는 맏아들, 그 맏아들인 나도 사실은 봉사손이다.-.-;)이시므로 어머니의 부담은 더 심하셨다. 그렇게 40년 넘게 결혼생활을 해오시면서, 집안 어른들로부터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모멸과 수모를 당하시기도 하셨고…

아직도 우리 집에는 명절이면 수십명의 가족(extended family)가 다녀간다.
특히 우리 아버지께서 꽤 넓은 범위의 extended family 중 최고 어른이시기 때문에…

내 어머니도 이제 “칠순 노인” 이신데…
그 많은 손님을 치루어 내시며, 그리고 그 차례상, 제사상을 아직도 차리시면서…
그렇게 고생을 하신다. 아들 둘이 모두 해외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 모든 부담이 다 어머니의 몫이다.

한번 명절이 지나고 나면, 손발이 모두 퉁퉁 부어 며칠씩 고생을 하시고,
그야말로 거의 일주일 정도는 몸져 누우시는 일을 매년 반복하신다.

그렇게 하시면서 어머니의 일관된 말씀은 이것이다.
“이 제사를 내 대(代)에서 끝내겠다. 너희 대까지 넘기지 않겠다”

명절때면 그렇게 “영적싸움”을 하고 계시는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저 그 어머니의 희생을 멀리서 누리고만 있는 내 모습이 매년 한없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이제 그 어머니의 그 희생과 눈물과 기도로, 삼남매는 모두 그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아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내가 만일….
perseverance 라는 단어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일….
감히 내가 믿는 신앙의 그 어떤 열매를 내 삶에서 맺었다면…
내 어머니께서 후에 천국에서 받으실 칭찬의 몫이 적어도 그중 절반은 된다고 할 것이다.

내가 만일….
내 다음 세대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신앙의 생명을 갖게 되었다면…
이번 설에도 하나님 사랑과 자녀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그 부담을 온 몸으로 짊어지고 계신 어머니의 모범 때문일 것이다.

올해 설에도…
힘드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40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철없는 큰아들은…
마음이 무너진다.

흐름…

1. 번영신학, 기복신앙, 바알신앙
2. 경건주의, 근본주의, 회심주의
3. 개혁주의 / 캘빈주의, 근본주의, 회심주의
4. 청교도신학, 경건주의, 개혁주의, 회심주의
5. 무교회주의, 청교도신학, 경건주의, 회심주의
6. 무교회주의, 크리스천 아나키즘, 평화주의
7. 평화주의, 새관점(New Perspective)
8. 청교도신학, 경건주의, 회심주의, 평화주의, 새관점, 신정통주의, 개혁주의

무슨 흐름일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 예수를 막 믿게되었던 시절

나는 모태출석 교인이다.
어머니께서 나를 태중에 가지고 계실때부터 교회 출석을 했다.

내가 그 신앙을 내 개인의 것으로 받아들인것은 대학교 3학년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그 신앙을 깊이 곱씹어볼만큼 내가 넉넉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던 시절,
신앙이 없으면서 신앙이 있는 척 했던 시절,
진리에 대하여 목말라 했던 시절,
그리고…
그 진리를 막 발견한 직후 내 생각과 감정과 마음이 급속히 바뀌어 가던 신앙의 초기 단계…

이것들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희미해진다.

그래서,
내가 그 당시에는 매우 어렵게 받아들였던 개념이나 깨달음들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싶다.

기회가 되면,
내가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에 했던 고민들,
또 내가 막 예수를 믿은 직후에 했던 고민들만을 다시 깊이 곱씹어보는 시간을 좀 갖을 수 있으면 한다.

이 블로그에도 간단하게 그것들을 좀 올리고.

불성실한 사람을 말씀 사역자로?

학교나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매우 게으르거나 성실하지 못하거나 부정직한 사람인데,
교회나 성경공부 모임 등에서는 많이 나서는 사람들을 가끔 접한다.

나도 물론 얼마나 내가 직장과 가정에서 성실한 사람인가 하는 반성을 스스로 지금도 많이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할때, 나는 정말 성경공부가 좋았다.
그래서 학교 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서 성경공부에 몰입한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빠지고 나니, 학교 생활을 다시 성실하게 하는 리듬을 되찾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그 이후 계속 허덕허덕 하다가…
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야 비로소 겨우 회복을 할 수 있었다.

학교 생활이나 직장생활, 혹은 가정 생활에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그 사람을 망치는 독인 것 같다.
한번 그렇게 빠지면 회복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내 모습을 자주 점검해 보곤 하는데,
늘 그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균형이 깨어진 사람들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신자유주의가 끝나가는 걸까?

이제…
드디어 지난 20여년간 엄청난 힘을 발휘해 왔던, 그 신자유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지난 10여년간,
내 신앙적 고민의 80%는,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신자유주의가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걸까?

네 부류의 사람들

어떤 이들은,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자신만을 돋보이게 한다. 이는 그 사람의 의도와 관계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그런 마음 없이 산다.

위의 두가지 분류를 종합하면 다음의 네가지 조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변의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
(2)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주변의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지 못하는 사람
(3)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다는 마음은 없는데 주변의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
(4)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나는 마음도 없고, 주변의 사람들을 돋보이게하지도 않는 사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4)번의 유형에 해당할 것이다.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깎아 내려서라도 자신이 높아지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죄된 본성의 자연스러운 증상일 것이다.

(3)번의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도 이론적으로 가능할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2)번 유형의 사람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는 있으나, 막상 그 올바른 마음가짐을 제대로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미숙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높이고자 하지만, 어떻게 하면 주변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높일 수 있는 것일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

(1)번 유형의 사람은, 매우 드물지만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오래 마음에 감동이 남는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2번과 4번의 중간쯤 되지 않을까.

특히,
내가 가끔 주변 사람을 높여주려고 마음을 먹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도,
때로 나의 미숙함과 지혜롭지 못함으로 결국 다른 이들을 깎아내리게되는 잘못을 범하는 일들을 최근 많이 겪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성숙해져…
내 겸손도, 다른 이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배려와 존중도…
짜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는 날이 내게도 올까.

사람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기

내가 존경하는 어떤 형의 이야기.

이 형이 1년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을 떠나 다른 지방에서 지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형은 신문에 나거나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학문의 세계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알수 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진 정도의 사람이다.

이 형이 임시로 있어야하는 그 지방에 있는 어떤 대형교회에 1년동안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도, 이 형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 형이 1년동안 다닌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아주 치우친 번영신학의 message를 반복해서 이야기하였다.

처음 몇번은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쳤는데,
나중에는 매우 힘들게 그 message들을 들었다고 한다.

이 형은 그 교회의 젊은 부목사님들과 대화하면서,
우선, 그 젊은 부목사님들이 그 번영신학의 message에 동의하는지 조심스럽게 여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 번영신학의 message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 부목사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만일, 당신이 그 목사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당신의 job security를 포기하고서라도 그 목사님에게 고언을 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그 목사님이 수용하고 수용하지 않고는 둘째 치고라도, 그 고언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당신은 후에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형은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에게 진정으로 사랑어린 충고를 결국은 하였다. 그 목사님을 얼마나 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그 목사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신앙의 도움을 학생때 받았는지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목사님의 현재 message가 치우쳐져 있다고. 목사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나 목사님의 message를 매우 안타깝게 들어왔다고.

이 형과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마는 듯 하다.
그냥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나는 그냥 거기서 멈추어 더 이상 어떤 노력을 하려 하지 않는 듯 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이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고언하고 충고하는 그 형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부끄러웠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

Are you doing them with Me?

What I do vs. How I do…

적어도…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하는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이것을 왜 하고 있는지 하는 논리와 이유들은 꽤 든든하게 있는 것 같다.

회사 일을 하는 것,
코스타를 섬기는 것,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것 등등…

그런데,
두주 전 부터는…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It’s great to see you’re working so hard for me…
but are you doning all that with me?

하나님의 그 질문에… 내 대답이 자신이 없다.

긍정적 모델과 부정적 모델

다른이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자세는 건강한 신앙인으로서 꼭 필요한 것이렸다.

그런데,
그 다른이의 모습이..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라고 하면서 따르게 되는 “긍정적 모델”이 되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이의 모습이…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라면서 피하게 되는 “부정적 모델”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부정적 모델”은 대개 찾기도 쉽고, 주변에 매우 많고, 내게 오는 효과도 강력하다.
그러나 부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많고, 자칫 잘못하면 나는 성숙하지 못한채 비판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긍정적 모델”은 대개 찾기도 어렵고,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긍정적 모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데까지도 때로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그 긍정적 모델을 보면서 강한 motivation을 갖는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긍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우는 것에 비해 훨씬 스케일이 크고, 발전적이고, 부작용이 적다.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소위 신앙의 성숙이 깊어질수록 당연히 긍정적 모델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부정적 모델을 찾기가 쉬울 것 같은데..
때로 어떤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 끊임없이 긍정적 모델들을 통해 자신의 성숙에 채찍질을 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물론 그 궁극적 긍정적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겠지.

나도 역시…
내가 스스로 신앙이 성숙하다고 자만할때면 주변에 늘 부정적 모델에 휩싸여 살게 되고,
내가 스스로 겸손하여 주님 앞에서 나를 낮추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긍정적 모델들이 성경 속에, 책 속에, 내 주변에 나타난다.

전체에 헌신할 것인가, 부분에 헌신할 것인가

내 신앙과 인격과 생각이 아직 미숙하던 20대,
(그렇다고 내가 지금 무척 성숙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수많은 것에 헌신했었다.

내가 헌신했던 “분야”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해외 선교, 가정사역, 학생사역, 목회, 빈민, 사회 개혁, 교회 개혁, 학문과 신앙의 통합, 캠퍼스 사역, 학문활동, 소그룹 성경공부, 무교회 운동, 성령운동, 기도운동, 부흥, 창조론, 기독교적 문화, 찬양사역, 반자유주의 (fundamentalism), 공동체…

물론 이것들에 내가 모두 깊이 involve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 후 내 생각이 바뀐 것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나처럼 가벼운 사람들은, 쉽게 헌신하고 그것들에 몰입하여 정신없는 시간들을 꼭 보내곤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헌신했다고 생각했던 그 헌신 자체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도 할 뿐더러, 그 헌신의 내용도 얼마나 편협하고 유치한 것이었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러한 시간들을 보내고,
어쩌면 그런 시간들을 지낼 당시의 나보다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
역시 그러한 모습으로 헌신하는 후배들을 만난다.

내 인생을 바로 이것에 걸었다고 흥분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런데 그런 모습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은, 자신이 한 헌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만큼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그림 속에서 다른 헌신과 영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가령,
복음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것이 자신의 부르심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의 섬김들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약자를 위한 배려가 없을때 그것을 모두 ‘믿음의 부족’이라고 정죄하고 마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에 헌신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그 자체에 헌신을 한다면,
자신이 편협하게 하고 있는 헌신에 관하여 끊임없이 점검하고,
자신의 잣대로 다른 이의 헌신을 재단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매우 더디지만,
그래도 조금씩 내 신앙이 자라가면서,
내가 편협하게 헌신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했던 부끄러운 모습들을 버리고,
부분이 아닌 전체에 헌신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아직도 갈길은 택도 없이 멀~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