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 anything else = Not Grace
지난주 설교시간에 들은 말이다.
요즘 복잡하게 하고 있는 생각 가운데 몇가지.
– ‘자유’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자유는, ‘죄악으로 어그러진 자아’로부터의 자유이다.
(혹은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할 수 있을 수도)
– 자유를 가져다주는 일차적 핵심 개념은, 사랑, 승리, 심판 등등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은혜’ 이다.
– psdudo-freedom이 세상에는, 그리고 기독교 써클 내에도 무척이나 많은데, 진정한 자유가 되지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에 ‘은혜’라는 개념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 은혜는, intuitive 하지 못한 개념이다. 논리적이거나 상식적이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직관적이고 일방적이다. 은혜를 논리화하려는 순간, 은혜는 그 본질을 잃어버린다.
헤헤, 살짝 태클성 질문..
– 자유를 가져다주는 일차적 핵심 개념은, 사랑, 승리, 심판 등등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은혜’ 이다.
개념이해상의 편의를 위해서긴 하지만, 사랑과 구분지어지는 은혜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음… ‘(복음이 주는) 자유는 사랑에 기인했다기 보다는 은혜에 기인했다’ 라는 말씀이시죠? 요거 두개가 떨어져 설명이 될 수 있나요? 있다면 (사랑의 개념이 아닌) ‘은혜’만의 무엇이 자유를 가능케 하나요?
저도 질문이 명확지 않아서…ㅋㅋ 죄송합니다. (앗 제가 은혜를 논리화 해달라고 질문을 드리는 것인가요?^^)
태글성이 아닌데요. ^^ 좋은 comment 감사합니다.
좀 긴 얘기이긴 한데요,
저는 자유를 속박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그러진 자아’가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요즘 좀 해보고 있습니다. (제 어그러진 자아와 제 부자유함이 좀 찐하게 연결되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음… 이런경우 예를 들면, 좀 본질이 흐려지고 범위가 좁혀지게되긴 하지만, 예를 하나 들어보죠.
어떤 사람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한다고 합시다.
그럴경우, 그 사람을 옭죄고 있는 일차적인 문제는, 원하는 학교에 가고 싶어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 사람이 그 ‘욕망’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뭐 부모의 기대, 자신의 성취욕, 사회의 시선을 의식함, security의 추구 등등… (때로는 이것이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하지요).. 기본적으로는 깨어진 자아, 혹은 어그러진 자아가 어떤 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경험을, 적어도 저는 참 많이 했는데요,
제가 원하는게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하나님께서 선하셔서 인도해주신다는걸 머리로는 아는데 도저히 그게 가슴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것이요…
그러면 그 속에서 저는 매우 부자유한데요…
제가 집착하고 있는 것에 묶여 있어서 말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
이것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저는…
– 내가 깨어짐을 인정하고,
– 그 깨어짐으로 인해 내게 소망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 그래서 내 밖에서 오는 (extra nos) 은혜에 주목함으로써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짐-절망-은혜의 자각 으로 이루어지는 cycle이 제대로 마음 속에서 일어나면,
그 사람은 점차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때,
절망적 상황 (깨어짐)-은혜에 대한 강조 없이…
가령 ‘사랑’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니까 잘인도해주실거야는 식으로만 몰고 가면,
오히려 그 집착을 강화시키는 잘못을 범할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지… 이런 논리가 되는 거죠.
이게 예를 들어 풀자니 좀 범위가 제한되는 것 같이 되러버렸는데요.
하여간 뭐 대충 이런 류의 생각입니다.
아 물론… 말씀하신대로 뭐….
은혜-사랑-믿음-소망… 뭐 이런 개념들이 모두다 매우 치밀하게 얽혀있어서,
따로 완전히 떼어놓는게 어렵긴 하다는데 저도 깊이 공감/동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