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정리하고 싶은 주제들

다음의 주제들은, 내가 좀 더 시간을 내어서 정리하고 써보고 싶은 것들이다.

그런데 영.. 생각을 가다듬어 글로 써내려갈 여유가 안나는군… -.-;
– 자의식과 죄와의 관계
자의식 자체가 인간의 죄성으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최소한 자의식의 일부는 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자의식 자체는 원래 괜찮은 것인데, 죄성으로 얼룩지게 된 것일까?
자신을 표현한다든지, 자아를 실현하는 것등은 과연 기독교적으로 얼마나 지지받을 수 있는 개념일까?
– 하나님의 선하심, 침묵, 기다리심, 인간의 깨어짐
어떤 인간의 고통을 보면서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고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선하시고, 그분이 여전히 다스리고 계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Open theism과 같은 관점으로 이것을 풀어내는 일에는 어떤 위험과 유익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전지전능 하시지만, 인간의 깨어짐이 모든 것을 mess-up하고 있다는 관점은 위험한 것일까?
– 내 start-up company 실패기
오랫동안, 꽤 열정적으로 했던 start-up company가 실패로 돌아갔다.
사실은, 나는 아직도 그것을 이야기하는데 마음이 쓰리고 힘이 든다.
그렇지만, 여러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내가 그 과정 속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이 실패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무엇이 실패의 원인이었는지… 등등을 정리해보고 싶다.
– 진보적 복음주의자들과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가지는 모순들
대부분의 경우, 보수주의자들은 context보다 text를 강조하고,
진보주의자들은 text보다 context를 강조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요즘 한국과 미국의 진보적,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보면 그것이 뒤집힌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text를 강조하다가 오히려 지나친 강조 때문에 text를 잃어버린 보수주의자들,
context를 강조하다가 오히려 지나친 강조 때문에 context를 잃어버린 진보주의자들.
– Christian Mysticism
요즘 Christian Mysticism이라고나 할까… 그런 쪽에 관심이 많다.
‘교리’로서 자신을 define 하는 복음주의는, 그 경계를 긋는 방법론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바운더리 밖의 문제를 제대로 address 못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복음주의가 답답할때가 많다.
그 복음주의의 대안으로서 소개되는 ‘젊은 복음주의자’들… 혹은 복음주의와 그 밖의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걷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 역시 많은 경우 복음주의가 바운더리를 만드는 방법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가 있다. 그래서 이들 역시 (old) 복음주의를 비판하지만, 그  (old)복음주의가 빠지는 함정에 쉽게 빠져버리고 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좀 위험한 접근 같이 생각될수도 있지만, 소위 ‘mystic’들이 가졌던 관심에 조금 주목을 해보면, 그 대안을 일부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좀 많이 해보고 있다.
예전에 ‘초월적 세계관’이라는 내용으로 일부 그것을 좀 풀어보기도 했는데…
이 외에도 3-4개 정도 더 주제들이 있는데…
아… 정말 시간이 없다… 쩝.
주님께서 내게 에너지를 주셔서 이 와중에 이것들을 글로 좀 정리할 수 있게 해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의지적으로 이를 악물고 한번 해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좀 여유가 어떻게든 생기거나…
그래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Thinking of you…

지난 직장에 있을때, 함께 일했던 내 직장 상사가,

최근 보스턴에 있는 어떤 회사의 부사장으로 갔다.

이 사람과 나는 함께 일하면서 정말 마음이 참 잘 맞았고, 서로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고 아껴주는 관계가 되었다.

서로 거침없이 ‘friend’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사람은, 내 MIT 십년쯤 선배가 된다. (내가 학부를 들어가던 해에, 이 사람은 박사를 졸업했으니… 그것보다 더 되는 건가.. ) 

이 사람은 기계과를 나왔고 나는 재료과를 나오긴 했지만.

보스턴에 간 첫날,

아침 일찍 내게 text와 함께 위의 사진을 함께 보내왔다.

‘Thinking of you!” 라는 말과 함께.

내가 던킨 도넛 커피를 좋아했다고 많이 이야기했던 걸 이 사람이 기억하고 내게 text를 보낸 것이다.

음…

Carl이 참 보고 싶다.

참 좋은 친구였는데…

이사

지난 주말, 이사를 했다.

결혼을 하고 학생부부로 살면서 참 많이 이사를 했었는데,

어제 가만히 생각해보니,

8번째 이사였다. -.-;

우리가 한 가정을 꾸미고나서,

처음 살았던 집은, 130년쯤 된 집이었는데, 창문이 낡아 잘 열리거나 닫히지 않았고, 거실 바닥이 살짝 기운 곳이었다. 게다가 집 주인이 바로 옆에 살았었는데, 우리가 작은 소리만 내더라도 뭐라고 하는 아주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다.

이사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을때, 우리는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걸 알았었다.

당시 영어도 뭐 그리 잘하지 못했고, 주변머리도 별로 없는 나는, 집 나올 날짜는 정해놓고 막상 이사 나갈 집을 잘 찾지 못했었다.

학교에서 좀 떨어진 Malden이라는 곳에 아파트를 하나 찾았는데, 그 앞에서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이 아파트에는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기억도 난다. 정말 그 아파트가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

8번 이사하는 중 한번은, 

도와주는 사람 한 사람도 없이, 우리 둘이 모든 짐을 다 옮겨 이사한 적도 있었다.

우울한 이사들도 있었고, 기대에 찼던 이사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 우리는 늘 ‘가난한’ 이사를 했었다.

이번 이사는,

정식으로 mover도 불러서 하는 이사였고,

나름대로 꽤 여유있게 하는 이사였다. 

8번 이사 끝에 결국 콘도 하나를 ‘구입해서’ 가는 이사이기도 했다.

에너지 넘치고, 시간 많던 학생때와는 달리,

이제 힘도 많이 달리고, 시간도 많이 부족해서 예전과 같이 이사가 그리 쉽지는 않다.

정말 온 삭신이… -.-;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 잘 지켜주셨다.

엄마 뱃속에서 처음 이사를 했던 민우는, 이제 자기 방을 자기가 정리한다고 손도 못대게 한다. ^^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심을 더 깊이 느끼며 누리며 감사하며 살면 좋겠다.

두주 쉬는 동안

자그마치 두주동안이나 블로그 글을 쓰지 않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두주 후면 많은 복잡한 생각들이 더 많이 정리되어 잘 정돈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 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더 많아지고, 고민은 더 깊어지고…

게다가 이사까지 하는 바람에 정리된 글 쓰기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글쓰기 시동을 걸어야 할 것 같아 새 집에 인터넷이 개통되자마자 이렇게 한자락 올려 봅니다. 

글 투를 바꾸어서 글을 써 볼까 생각중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한번 올려봅니다. 

이사 때문에 온 삭신이 쑤십니다. 🙂

이번 한주, 블로그 더 쉽니다.

지난주,

KOSTA 집회가 잘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14년만에 결석을 하면서, 내내 마음은 테일러와 휘튼에 가 있었습니다.

한편 함께 가 있지 못한 것이 대단히 고통스러웠지만,

이렇게 인도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조금더 생각을 가다듬고, 기도를 하기위해,

이번 한주 블로그를 더 쉽니다.

이렇게 오래 블로그를 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허접한 글들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한주, 혹은 두주 동안 블로그를 쉽니다.

다음 한주,

KOSTA 집회를 두고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블로그를 쉽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까지도 쉬게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하지 못하지만,

2000마일 떨어진 곳에서,

마음을 쏟아, 눈물을 쏟아, 무릎꿇어 기도하고자 합니다.

특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지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한주동안 여러분의 땀과 눈물에 젖은 조끼가 정말 많이 생각날겁니다.

14년만에 처음으로…

96년에 처음,

나는 KOSTA 집회에 참석했었다.

하루종일 하도 울고, 울고, 또 울었다.

기뻐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안타까워서 울고, 답답해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소망에 감격해서 울었다.

그후 99년, 지도교수가 여름에 short-course를 하면서 나를 ‘조교’로 쓰고 싶다고 해서,

나는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후 작년까지,

매년 나는 7월 첫째주를 시카고 혹은 인디애나에서 보냈다.

금년에…

14년만에 처음으로,

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 마음의 상태로는, 어쩌면…

주님의 은혜를 깊이 더 경험하고 싶은 목마름이 간절한데…

그게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 한주,

시카고와 테일러에서는 또 한번의 잔치가 열린다.

내일 부터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빨간조끼들이 많이 고생하기 위해 집회 장소에 모여들것이다.

다음 한주,

나는 이곳에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많이 울게 될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모인 소중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꼭 만나주시길 기도한다.

이걸 보면서, 또 울었다.

이걸 보면서,

또 다시 울었다.

아… 아직도 어디선가는 복음이 이렇게 forcefully advancing하고 있는 거구나.

그렇지만 여전히 떨치지 못하는 고민은 이것이다.

19-20세기의 context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relavant하고 powerful 했지만,

21세기의 context에서 복음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온 코스타 집회를 위해 마음을 쏟아 기도한다.

이걸 보면서, 많이 울었다…

이걸 보면서…혼자 많이 울었다.

한때는 한국에서 복음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드러난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대가 간걸까.

가난, 독재, 분단 등등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이 소망을 주는 시대가 있었는데…

21세기 자본주의체제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이들에게,

복음은 무슨 소망을 주고 있는 걸까.

아버지 팔순

지난 주말,

한국에서는 아버지의 팔순 축하 event가 있었다.

한국에 있는 두 동생/가족이 아주 멋지게 event를 치루어내었다.

아버지의 팔순 생신을 가까이에서 축하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속이 쓰리고 마음이 아파서…

주말에 많이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의 생신은 7월 4일이다. 그래서 지난 20년 가까이, K 운동을 섬기면서 아버지 생신을 제대로 축하해드리지 못했었다.

술을 잘 못하시는데,

아마 앞에 놓은 와인을 반잔 정도 드시고는 얼굴이 붉게 되신 것 같다.

딸, 아들 부부, 손자가 생신을 축하하는게 많이 기쁘셨겠지.


동생들이 수고가 많았다.


내가 집을 떠난 것은,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였으니까,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다.

그 이후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집을 떠나 살면서, 결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제는, 내 딸이, 내가 집을 떠나오던 시절의 내 나이만큼 컸다.

아버지께서 팔순을 맞으셨다는게, 잘 믿어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게 된다. 아버지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