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tation of Ministry

지난 주말 Podcast에서 완전 찔리게 들은 설교가 youtube에도 올라와 있었다.

Tim Keller는 Martyn Lloyd Jones의 광팬(?)임이 분명하다.
Tim Keller 설교들중에서 매우 핵심적인 key는, 자주 Martyn Lloyd Jone에게서 가져오는 것 같다.

위의 설교에서도 역시 그렇다.

왜 현대 보수 기독교에서는 Martyn Lloyd Jones와 같이 설교하는 사람이 없는 걸까…

내 기도

대학교 4학년 때였던가…
몇명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 당시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이자 큰 선배님으로 여겨졌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같은 학교에 계신 ㅈ모 교수님이나 ㅇ모 교수님 같은 분들도 있었고,
다른 학교에 계시지만 영향을 많이 끼치셨던 ㅅ교수님, ㅇ교수님, ㄱ교수님 등등…
그리고 같은 교회에서 만났던 ㅊ박사님 같은 분이나 나와 같은 직장에 계셨던 ㄱ박사님 같은 분들…

그 당시 그분들은 대부분 40대였다. (30대도 있었다.)
40대에 이미 후배들에게 따라야할 이정표같은 것으로 계셨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불과 20년 후에 어쩌면 우리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20년 뒤에는 저분들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을까?
이분들이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우리가 금방 이분들의 빈자리를 채워야하는 세대인데, 과연 우리가 그럴 수 있겠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화들짝 놀랐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정말 얼마 있지 않아서 우리가 한국 교회를 책임질 사람들이 될 수 있겠다.
정말 잘 준비하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의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때 그 교수님들은 여전히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들이고,
그때 20대 대학생들인 우리는 후배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 해 주지 못하는 실패한 세대가 되어버리고 있다.

내가 코스타에 가서 하는 가장 간절한 기도는 이것이다.
하나님, 또 다시 10년, 20년을 실패한 세대만이 길러지는 시간을 보낼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할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들을 정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정말 좀 세워주십시오.

내일이면 참 오랜만에 코스타 집회로 떠난다.
한 주 동안, 많이 울면서 기도할 생각이다.

(다음 한 주 블로그도 쉽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꾸벅~)

힘든 것을 해결해버리는 종교

교회등의 기독교 모임에서 소위 ‘기도제목’이라는 것을 나눈다.
나는 ‘기도제목’을 나눈다고 하는 표현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기도 요청을 한다, 서로 어려운 것을 나눈다, 내가 기도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는 식의 표현을 써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그렇게 기도제목을 나눌때 들어보면,
압도적 대다수가 자기 힘든거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힘든게 없으면 기도할게 없다고 한다.

기독교인 다수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기독교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볼 수 있다.
(혹은, 내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어떤 영적 상태에 놓여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힘든일을 해결하고자하는 것에 모두 함몰되어있다는 것은,
현대 기독교가 힘든일을 해결하는 기독교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든일은 물론 해결해야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힘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기회이다.
그리고 그 힘든 일을 통해서 내가 단련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힘든 일들은 정말 힘들다. 아프다.
그렇지만 그 힘든 일을 해결하려고만 노력하는 종교는,
기복종교의 모습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권리와 사랑

Stanley Hauerwas가 한 말에서 더 develop한 생각

우리는 권리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곤한다.
특히 인권에 대해서는 그렇다.
인권은 모든 도덕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여겨진다.

인권(Human Right) –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하는 권리이다.
그런데,
권리는 과연 윤리의 근본이 될 수 있을까?

요즘 세상에서는 목소리를 높여라, 네 권리를 주장해라, 네 목소리가 들려지게 해라… 는 이야기를 참 많이들한다.
나는 약자가 사회에서 보호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매우 사회적으로 건강한 합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과연 도덕의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그 도덕의 기준으로 권리를 제시하지 않고 사랑을 제시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라.

나는 권리가 도덕의 근본이 되는 세상보다는,
사랑이 도덕의 근본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언제 이것에 대해서도 한번 좀 더 생각을 풀어봐야겠다.

비장함?

참 오랜만에 다음주에는 KOSTA 집회에 참석한다.
금년에 참 오랜만에 참석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년에 또 참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도 보고,
좋은 이야기도 나누고,
또 깊이 따로 기도도 하고…
그런 시간을 가질 기대들이 참 많다.

그렇지만 반면,
이번엔 나름대로 마음과 자세가 비장하다. ^^

최근에,
만일 이번이 내가 마지막으로 참석하는 KOSTA 집회라면 나는 뭘 하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 이것도 좀 해야겠고, 저것도 해야겠고…
그런 생각을 머리속으로 막~ 하다가…
문득 헬렌켈러의 Three days to see 라는 짧은 글이 생각났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마음을 고쳐잡았다.
음악을 연주하는 player가 아니라 그 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감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하나님께서 소중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더 많이 appreciate하겠다고.

다음주가 또 기대된다.
전투태세에 맞추어 어제 또 짧게 머리를 깎았다. ^^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4)

때로는 공동체 전체를 바꾸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정말 헌신된 2-3사람 심지어는 어떤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큰 공동체가 바뀔수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헌신된 소수의 희생보다 더 powerful한 것은,
전혀 가능성 없어 보였던(?) 사람의 변화이다.

정말 복음 때문에 변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은 감격스러울뿐 아니라 영광스럽다.
완전 농땡이이거나,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의 변화는 그저 그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

물론 어떤 사람의 회심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고 감격스럽겠지만,
오래 교회를 다니던 사람이 눈이 열려 복음의 새로운 영역을 깨닫게 되는 일이라던지,
burn-out되어있거나 낙망해있는 리더가 상황이 변화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새 힘을 얻는 일들 역시 큰 감동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 입장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꾸준히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애매한 대중 전체를 대상으로 대포를 뻥뻥 쏘아대는 것 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면서도 옳은 일이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2)

어떤 공동체가 스스로를 identify하는 것에는 두 종류의 description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 공동체는 이러이러한 공동체이다’ 라는 positive description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 공동체는 이러이러한 공동체가 아니다’ 라는 negative description이다.

positive description은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하게 해놓지 않으면 많은 왜곡이 생길 수 있고, 무엇이 일차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가 하는 것을 define하게 된다.

반면
negative description은 모든 경우에 다 필요하거나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그 공동체의 지향을 더 명확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적절한 negative description이 없을 경우 그 공동체는 방향성을 잡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negative description을 너무 남발하면 그 공동체의 입지 자체를 너무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흔히 ‘대안 공동체’라고 이야기를 할때 ‘대안 (alternative)’라는 말은,
negative description을 함의한다.

status quo에 대한 대안,
시대정신에 대한 대안,
세속에 대한 대안 등등은… 각각 status quo, 시대정신, 세속의 어떤 측면을 반대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negative description은 공격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기 쉽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해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의 지향을 명확하게 한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1)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믿고 있는 것, 그 공동체가 따르고 있는 것등을 반복해서 공유해야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더더욱 그렇다.

공동체 리더가 흔히 빠지는 착각 가운데 하나는,
내가 이러이러한 것은 벌써 공동체에게 이야기했으니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라는 식의 생각이다.

공동체에서는 매우 자주,
아주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에대해 over-communication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라면,
십자가, 하나님 나라, 구원, 죄 등등에 대한 것을 아주 많이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리더(설교자, 목회자를 포함한)들이 몇번 설명한것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이 중요한 것들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그래서 그것이 충분히 반복되어서,
그 기본적인 스피릿과 연관된 공동체만의 스토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한다.
일단 그렇게 공동체만의 스토리가 기본적인 스피릿과 연관되어서 만들어지고 나면, 그건 많은 공동체가 다다르지 못하는 한단계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복, over-communication은 정말 중요하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9)

개인의 영적 성숙을 공동체에 떠넘기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매우 활동적인 개인 영적 성숙이 일어나고 있다고 가정할때,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공동체이다.

어떤 사람이 새로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복음 안에서 성숙해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보다 조금 더 영적 성숙의 여정에서 앞서 있는 사람과의 인격적인 대화는 대단히 powerful한 효과가 있다.

몇년동안 책을 읽고,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하면서 얻어져야 할 것이,
어떤 사람과의 진솔한 한번의 대화를 통해서 얻어질수도 있다.

만일 어떤 공동체에 다양한 분야의 성숙함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공동체에 속해서 그 많은 자양분을 받으며 자라는 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에 자신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는 어떻게든 많고도 깊은 대화를 통해 뽕을 뽑아야 한다. ^^
그 사람이 귀찮아 할꺼야, 그 사람이 바쁘니까… 그럴게 아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자신이 어떤 면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영적성숙을 도울 수 있는 면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라고 자신의 시간을 다른사람을 위해서 써야 한다.
그게 그 사람에게 그 자리에서 맡겨진 소명이다.

바람직하기로는,
한 공동체 안에 가능하면 다양한 분야의 성숙함이 공존하는 것이 더 좋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7)

나는 현대 교회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nice함’ 이라고 생각한다.
공감, 이해, 예의, 친절함 등등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서로에게 매우 nice 하다.
이건 소위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더 심하다.

그런데 서로 nice하게 대하기 때문에,
정말 꼭 해줘야하는 이야기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복해서 잘 못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거 아니라고 이야기해줘야 하는데… 그게 nice한 문화에서는 잘 안된다.

나는 이렇게 ‘nice함’이 교회 내에 넘쳐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죄’를 가볍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어떤 사람이 하나님보다 커리어를, 돈을, 성공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매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정말 심각하면서도 대단히 위험한 세계관과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자신을 계속 찌르면서 자해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얼굴을 주먹을 날리는 한이 있어도 그 습관을 그치도록 해야하지 않는가.

돈을, 섹스를, 권력을,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그런 마음이 없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