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ed vs. Driven

Gordon McGonald 목사님의 Ordering Your Private World 라는 책을 보면
(한국 번역판 이름은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Called people과 driven people의 대비가 나온다.

책을 읽은지 벌써 거의 20년쯤 되었으므로…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적극성과 능동성, 그리고 잘 정리된 삶에 대비되어,
쫓겨서 사는 삶은 피동적이고 소극적이고 잘 정돈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된 또 한가지의 dimension을 최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떤 건강한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할때,
called people(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적극적으로 한다. 희생이 이들에게는 억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일 수 있다.

그러나,
Driven people (쫓겨다니는 사람)은,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이끄는 주체 (사람, 조직, 가치)등에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임하게 된다. 희생이 이들에게는 불평과 불만과 갈등의 이유가 된다.

함께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주의의 사람들을 called people로 만들도록 섬기면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희생하도록 돕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의의 사람들에게 논리와 경험등을 앞세워 충고와 명령과 당위를 남발하면서 called people로 있던 사람들 조차도 driven people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특히 내가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 내 가족들, 내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called people로 만들고 있을까, 혹은 driven people로 만들고 있을까.

대답에 자신이 없다.

성급한 자아비판의 오류

나는 자아비판을 즐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매우 성숙한, 자기 성찰을 잘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내가 자아비판을 즐기는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음을 본다.

1. 자기 방어이다.
내가 내 스스로를 비판함으로써 다른이가 나를 비판할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소 치사한 자기방어라고 할 수 있다.

2. 게으름이다.
겸손, 혹은 자기성찰 이라는 건강한 가치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나와 내 주위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내 스스로 건강한 가치를 지킨다는 자긍심도 지키게 되고 스스로의 만족감도 느끼면서 부지런히 나와 내 자신을 살피는 귀찮음도 피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무지이다.
최근 어떤 형과의 대화를 하면서, 내가 그 형에게 내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거짓이 많은지, 나의 manipulative한 성향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작하여 만들어낸 사역의 열매가 많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러자 그 형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그렇게 맺으셨는데… 과연 네 능력으로 심지어는 아주 얄팍한 수준의 사역의 열매라도 맺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 하나님의 일하심을 덮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지금 이 글도 그릇된 자아비판은 아닐지…

가을이 외롭지 않다.

대학 다닐때나,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때 였던 것 같다.
나는 유난히 가을을 많이 탄다고 느꼈었다.
가을만 되면 외롭고, 괜히 멜랑꼴리 해지고 그랬는데…

언젠가 부터 가을이 외롭지 않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혼을 하고나서 외로움이 채워져서 일까?
바쁜 생활 속에 외로뭄을 느낄 여력이 없어서일까?

Liturgy

지난 토요일에는,
수욱 자매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참 예쁜 결혼식이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많이 사랑하는 모습도 예뻤고.

그런데,
그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주례사도 듣고 (목사님의 주례사도 참 좋았다.)
기도도 하고… 우… 아… 탄성도 지르고…
맛있는 식사도 하고 하면서…
함께 참석한 사람들과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나의 결혼 (결혼식이 아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혼식에 참석한 이유 때문에,
나도 결혼에 대한 생각을 다시 많이 하게 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런 것이 liturgy(의식)의 의미이자 힘이 아닐까 싶다.
내가 20대에는… 강력한 반형식, 반의식(anti-liturgical) 주의자였다.
그런데… 점점 의식의 소중함이랄까 그런게 깨달아 진다.

결혼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서 결혼식에 많이 참석하고,
탄생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서 신생아를 위해 많이 기도하고,
죽음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서 장례식에 많이 참여하고,
그리고 복음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 예배에 많이 참석하고.

민우는 바쁘다

지난주엔가, 민우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눈 내용.

민우가, 자신이 몹시 바쁘다고 이야기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것 저것 자신의 바쁜 일정을 내게 이야기하면서,
아빠는 이렇게 바쁜 일정을 이해조차 못할꺼라고…
자신은 정말 몹시 바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면서,
매일 자기가 이메일이 10개씩이나 온다고,
이메일 쓰는 것도 큰 일이라고 엄살을 떨었다.

어린 민우에게,
물론 그 수준에서 많이 바쁘고 벅찬 일정이나…
너무 많이 해야할 일이 많은 그런 상황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크면,
자신이 그렇게 바쁘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얼마나 얕은 호들갑이었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텐데…

내가 스스로 바쁘다고 여기면서,
민우와의 대화를 곱씹어 본다.

Red Sox가 졌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든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실.
나는 Red Sox Fan 이다.

어제,
Red Sox가 Tampa Bay Rays에 졌다.
American league championship 경기였는데, Tampa Bay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겼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Red Sox가 진것에는 그리 많이 섭섭하지 않다.

Red Sox.
이전에는, 86년동안이나 World series를 우승하지 못하던…
그야말로 underdog 이었던 team이었으나
이제는 전체 major league 팀중 두번째로 돈을 많이 쓰는 부자 팀이 되었다.

반면
Tampa Bay는, 작년까지 거의 매년 꼴찌를 하던 팀이었다.
major league 전체에서 가장 돈을 적게쓰는 팀 가운데 하나인데…
이 팀이, major league에서 가장 많이 돈을 쓰는 팀 두개 (Yankees와 Red Sox)를 모두 이겼다.

늘 꼴찌만 하던 이 Tampa Bay가 올해는 우승을 좀 하면 좋겠다.
돈을 많이 들여서 비싼 선수들을 사와서 경기를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적은 돈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선수를 뽑고, 팀이 함께 뭉쳐서 경기를 이기는 방식을 더 많이 볼수 있었으면… 싶다.

MLB에도, NFL 처럼 salary cap이 있으면 좋겠다.

Tampa Bay 화이팅!

블로그

은규형제의 꼬임에 빠져 시작한 블로그.

언젠가 부터는 내 생각도 좀 더 잘 정리하고,
내가 하는 고민과 묵상들 생각들과 경험들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서 매일 쓰기 시작했었다. (휴일 제외)

하면서…
에이, 설마 이렇게 매일 쓰는게 며칠이나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4월 초부터 그렇게 했으니 벌써 6개월 동안이나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엔 묵상과 생각이 넘쳐나서 하루에 다 쓰지 못하고 며칠에 나누어 쓰기도 하고…
그럴 경우엔 여러날 것을 미리 써놓는 경우도 있다.

내가 얼마나 더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아직까는 좀 더 할 수 있는 것 같아 보인다. ^^

열등한 사람과 함께 지내기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나보다 열등한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사람을 위해서 slow-down 하면서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합당할까.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해봐라… 하면서 열심히 뛰어가는 것이 좋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성취한 유익들을 그 사람과 나누겠다는 마음과 목표로 살아가야 할까.

그러나 그것도 그 사람이 스스로가 열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심한 열등감에 이미 빠져 있거나,
헛된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막연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면..?

경쟁구조 속에서 살아남기에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
경쟁구조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때…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쉽지 않지만,
더불어 가고자 해도 어떻게 해야할지 하는 것을 찾는 일은 더 어려운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엄청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버릴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

극심한 경쟁구조는,
가진 사람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모두 망가뜨리는 듯 하다.
경쟁구조 속에서도 건강한 영성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 물론, 내가 열등한 사람일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고민은… 이것과는 다른… 또 다른 커다란 묵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두가지 고민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어린 소녀였던 어머니

67년전 오늘,
하나님께서는 예쁜 여자아이를 이땅에 태어나게 하셨다.

늘 내게는,
어머니였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어머니일… 그분이,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로 태어났을 때를 상상해 본다.

그 작은 여자아이의 안에,
지난 40년 동안 내게 부어주셨던 그 사랑이 다 들어 있을 수 있었을까.

그 여자아이는,
어릴때 자신이 그렇게 일생을 헌신해서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될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이땅에 주셔서 이땅의 한 구석을 비추게 하시고,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 사랑을 베풀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한다.

무대위의 주인공

돌아오는 월요일은, 내 어머니의 생신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내 머리속에 떠 오르는 이미지는,
나를, 그리고 내 동생들을 무대위의 주인공으로 만드시고 그 주인공들을 위해 여러가지 뒤치닥 거리를 하는 사람이다.

함께 무대를 공유하는 조연도 아니고,
그저 그 주인공의 의상을 챙기고 주인공이 공연을 하는 동안 객석에 앉아 그 배우의 공연을 눈물과 웃음과 긴장으로 지켜보는 사람.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어머니의 그러한 헌신과 사랑이 감사했고,
내가 그 사랑을 받은 만큼 무대위에서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라 믿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상황을 조금 바꾸어서 보니…
내 어머니도, 그 인생의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계신 것이 보인다.

아주 초라하고 형편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창하게 화려하고 주목받는 것도 아닌…
그러나 어머니의 삶의 context에서 최상의 것을 드리면서 살아가는 무대 위의 주인공.

나의 사랑, 내 어머니는…
어머니 인생의 무대의 주인공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아 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performance를 보시면서 참 많이 기뻐하시고 즐기시고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정말 훌륭한 무대위의 주인공이시다.
내 인생의 조연이 아닌… 어머니 인생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