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고난? 공동체의 고난!

예전에,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라는 주제로 한해동안 K 운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2004년이었던가.

그때…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함께 섬기던 간사들중 몇 사람이 비슷한 어려움들을 겪는 일들을 경험했었다.

구체적으로는 언급하지 않고, 그냥 ‘직장관계’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보자.

뭐 그냥 sensitivity를 가지지 않고 그 상황을 만나면, 어휴 다들 직장 때문에 힘들어하네… 기도하자…

이렇게 하고 지날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유난히 이상하게 그렇게 공통으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것이 깊이 마음에 박혔었다.

아니, 왜 이렇게 간사들이 같은 어려움을 다 함께 겪는 걸까…

그러다가 적어도 내가 깨닫게 된것은 이것이었다.

아… 그래…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지금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니겠는가!

간사들이 공통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다가… 그것을 위해 기도하다가… 그런 깨달음을 얻고, 실제 Korean Student Diaspora를 보니 정말 그게 보였다. 정말 이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게… 눈이 열려 보였다.

그리고,

적어도 나에겐,

그때 그 발견은 내가 Korean Student Diaspora를 바라보는데 중요한 시각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고난은 때로,

공동체로 엮어서 볼때야 비로소 해석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 불만이다.

난 요즘 하나님께 불만이 가득하다.

정말 불만이 가득하다.

하나님께서, 악인은 잘되게 하시고, 의인은 어렵게 하시고,

당신의 사람들을 돌보시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정의, 사랑, 돌보심 그따위 것들은 개나줘버려 하는 식으로 보고 계신 것 같아 보인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아픈 일들을 많이 겪는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을 수준을 넘어,

눈물 조차도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는 것 같다.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추시지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기도가 꽉 막혀, 하나님께 기도할때마다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 기도가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음… 그건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시는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은혜의 하나님이 아닌건데….

….

그런데 재미있는건,

나와 전혀 개인적인 communication을 하지 않는 한국의 어떤 목사님께서 요즘 매주 이런 부류의 설교를 하신다.

그분도 하나님께 불만이 요즘 가득하신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중학교때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때 나는,

‘공부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때 나는,

‘많이 성취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예수님을 갓 믿고 나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후, 신앙의 여정 속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열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말씀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용기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었다.

요즘 나는,

‘믿음의 사람’이 정말 되고 싶다.

내 믿음의 shallow함이 견딜수 없이 부끄럽고 안타깝고 싫다…

금식기도를 밥먹듯이?

한동안은,

내가 금식기도를 밥먹듯이 한적도 있었다. ^^

툭하면 한끼 금식,

좀 더 땡기면 하루 금식,

3일 연속 금식까지도 해봤던 것 같다.

그 이상은 영 힘이 없어서… 기도도 못하고 그냥 잠만 자게 되었었다. ^^

대학원 시절 한참 여러가지로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난 정말 주님께 금식하며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그랬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금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금식을 밥먹듯이 하는 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건강한 것인지 자신할수는 없으나,

얼마전에 세상을 떠나신 달라스 윌라드가 권장했던 그 금식을 좀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음…

금식한다고 떠들면서 금식기도 하는것 만큼 꼴불견이 없는데,

이 글을 쓰다보니 어째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은 민망함이 화악~ 밀려오네… ^^

내 동생이 보고 싶다…

오늘은,

내 동생 생일이다.

한국에선 벌써 어제이겠지만.

한살차이나는,

내 여동생이 오늘은 많이 보고 싶다.

요즘 그저 가끔 한번씩 카톡이나 한번씩 주고 받는 정도밖에 연락 못하고 지내지만,

내 동생의 깊이가 점점 깊어져가면서,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점점 내게도 큰 기쁨이 된다.

오늘, 난,

내 동생의 오빠인것이 참 감사하다.

내 동생이 보고 싶다.

따라가기 벅찬?

달리기를 하다보면… 따라가기 벅찬 사람이 있다.

꽤 내가 노력을 해도 그 사람은 내가 노력한 것보다 훨씬 저 만큼 앞에서 달려간다.

그 사람과 경쟁해야하는 관계라면, 그 사람의 존재가 부담스럽고 싫다.

그러나,

내가 방향을 찾고 싶어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상태라면,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 참 큰 도움이 된다.

신앙은,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그렇게 ‘따라가기 벅찬’ 사람을 만나면 매우 상쾌하도록 반갑게 느껴진다.

그런 분들을 ‘멘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텐데,

요즘 어떤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글들을 읽으며, 아니면 대화를 나누며,

아 이분들은 내가 따라가기 벅찬 분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참 기쁘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좀 가까이 계시면 좋으련만…)

마음을 열어놓는 대화 – connecting dots

지난 토요일,

동네 예쁜 어떤 가족이 이사를 하고 아는 사람들을 왕창~ 초대해서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언제봐도 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기에,

마음이 바쁘고 무거운 중에도 찾아갔다-

예쁘게 집을 꾸며놓은 것을 보며 참 예쁘게 느껴졌다.

그 가족이 정말 그 집에서 예쁘게 잘 살기를 기원했다.

또 이제는 이 동네 이웃이 되신 (혹은 되시고 있는?)

(A 목사님 가족 – A 목사님)도 뵐 수 있었다.

이틀후면 A 목사님도 join하신다고… his on his way~

그러는 와중에,

잠깐…

J 형제와 E 형제 두명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직장생활, 하나님 나라, 뭐 그런 얘기였다.

나도 내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뭐 뚜렷한 대답을 서로 얻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게 하며, 

아… 이렇게 같은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다는게 이런거구나.

서로 대답이 없더라도, 이 싸움을 이렇게 하며 고민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내게 힘을 주는 거구나…

아… 참 좋다…

뭐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J 형제도, E 형제도,

한때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들로부터 좋은 insight도 얻고, 그들에게 내 고민을 이야기도 해줄 수 있는,

‘동료’가 되었다는 생각에 또 참 기뻤다.

어떤 개인이 겪고 있는 개인적인 경험이,

때로 그 개인의 경험 자체로는 잘 해석되지 않는데,

그것을 공동체로 묶어서 connecting the dots을 해보면 뭔가 더 큰 그림이 보이는 것을 아닐까…

뭐 그런 비슷한 생각도 좀 더 해보게 되었다.

오늘 저녁에는,

뭐 개인적으로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정서적으로나, 취하고 있는 입장으로나…

동의하는 면이 많은 한분과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

connecting the dot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간이 될수 있을까…

simple answer

예전에는,

기독교가 인간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대단히 simple answer를 주기 때문에 명쾌하고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simple answer로 다루어내고자하는 시도가 대단히 유치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기독교가 제공하는 answer가 결코 simple answer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기독교는 simple answer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simple vision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소심하다-

나는 참 소심하다. ^^

시험때만 되면 긴장해서 시험을 잘 못보기도 하고…

당황하면 생각이 그냥…. 하얗게 되어버리는 때도 많다.

한가지 옛날 이야기.


나는 과학고를 다녔다.

그런데, 나때는 과학고 초기여서 사실 별로 유명하지 않아서 들어가기 쉬웠을 뿐 아니라,

나는 그나마도 아슬아슬 커트라인근처의 점수로 합격했다.

그냥 학업점수로는 원래 안되는 건데,

‘창의력 테스트’ 점수가 좋아서, 그 덕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학 등수가 60명중 50등이었다. ^^)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사실 나는 꽤 주눅이 많이 들었었다.

소위 ‘명문’ 중학교 출신들은 정말 그 당시에 벌써 ‘선행학습’을 하고 들어온 애들이 많았다.

명문 중학교 출신이 아닌 애들 중에는, 정말 천재들이 있었다.

완전히 기가 죽었다.

고1 영어 첫시험은, 그 전해의 학력고사 문제였다.

중학교 막 졸업한 애보고 대입 문제를 풀라니…

나는 아마 그걸 대충 40점쯤 받았던 것 같다.

그후 정말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성적이 전혀 오르질 않았다.

그러던중,

기숙사 옷장 구석에서, 그 방을 쓰던 선배가 놓고간 ‘작년 시험문제’를 보았다.

뭐 그냥 무심코 그걸 공부 했는데… 그 다음 영어시험에서 그 문제가 거의 그대로 다 나왔다!

나는 사상 초유의 95점인가 하는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그 이후에 내 영어 성적이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속 90점대를 유지했다. 지난 시험문제를 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야말로 나는 기가죽어서 성적을 못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학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나는 정말 수학천재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이 친구는 수학에 관한한 정말 천재였다.

그 친구 옆에서, 나는 고등학교 내내 수학에 기가 죽어 지냈고,

그게 대학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겨울방학때면, 미분방정식 같은 과목을 혼자서 다시 독학으로 복습을 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아주 복잡한 수학 문제가 포함된 quantum physics 같은 것들은 아주 재미있게, 잘 했다.

내 박사학위를 받는데에도, 미분 방정식을 푸는 부분이 꽤 중요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

나는 수학을 잘 못했다기 보다는, 수학이라는 과목에 기가 죽어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같이 소심한 사람이 때로는 과감하게 돌진도 하고,

무지막지한 용기를 내기도 하고,

무모한 도전을 하기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은데…

결국,

내가 신앙을 가진 이후에 나는 참 담력이 많이 강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나 자신을 보며 (돌이켜 보며) 내 그 용기가, 깊은 신앙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그저 소심한 나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극복해보고자했던 나 혼자만의 ‘영차영차’가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그냥 소심한 나로 계속 남아 있는 상태로 말이다.

소망과 과정

내가 기독교 신앙에 빠지게(?) 된 것은,

그것이 이야기하고 있는 궁극적 소망 (목표, goal, vision)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독교 신앙 생활의 99%는, 소망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과정을 겪어내는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을 지탱해 주는 것은 ‘소망’이긴 하지만,

너무 많은 경우 그 ‘소망’을 전혀 바라볼 수 없는 중에도 ‘과정’을 겪어내어야 한다.


‘신’이 세상과 함께 변해가고 있다는 식의 소위 ‘과정신학’의 관점을 받아들이기는 나로선 좀 어렵긴 하지만,

그러나… 

과정신학의 방법론으로 악의문제를 풀어보고자 했던 시도로부터 배울 점은 없을까….

뭐 그런 류의 생각을 좀 해보았다.

여유가 좀 있다면 그런 공부와 고찰도 좀 해 보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