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선 사람

역시 지난 주일 예배시간에 있었던 일.

나는 조금 뒤쪽, 문 바로 옆쪽에 앉아있었는데, 아직 예배가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때 홈리스 노인 한 사람이 문으로 들어와서 내가 앉아있는 곳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계속 서 있었다.

그분은 홈리스가 끌고 다니는 작은 카트 하나를 끌고 들어와서는 뒤쪽에 그냥 조용히 서서 예배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았다.

한 10분정도 그렇게 서 있었나…

그리고는 그분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내 생각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 같고,
그분은 그냥 아무도 그분의 존재를 알아채지도 못하게 짧게 예배에 참석하고 갔다.

나는 그 홈리스 할아버지가 그렇게 나간 이후 계속 예배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내가 가서 말이라고 붙였어야 했던 걸까.
나 말고는 그분을 아무도 못본 것 같았는데.
가서 여기 내 옆에 앉아라 그렇게 권하기라도 할껄 그랬나.

마침 그분이 그렇게 서 있던 동안에는,
앞에서 아주 잘 차려입은 한 가족이 나와서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고 advent를 상징하는 촛불을 켜는 순서가 진행되고 있었다.

잘 차려입은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 앞에서 촛불을 켜고 있을때,
그 홈리스 할아버지는 외롭게 그렇게 뒤에 서 있다가 나갔다.

아직도 나는 마음이 많이 무겁다.

Worship him

어제 예배 시간에, 솔직히 말해서 별로 마음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것 같다.
집중도 잘 못했고, 찬양도 잘 따라부르지도 못했고.

그런데,
예배를 다 마치면서 부른 찬양 한곡에 나는 확~ 넘어갔다.

그건,
예수님을 ‘worship’ 하자는 노래였다.

예수님을 예배한다고.

성탄절이면 늘 예수님께서 오신 의미를 되새기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그걸로 묵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독서를 하기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이 오셨다는 사실을 두고, 예수님을 예배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싶다.

마치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는,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날이라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 오신 사랑의 왕을 예배하는 날이라는 것.

Trust?

여러 사람들과 일을 하다보면,
정말 수가 빤~히 다 보이는데도 꼼수를 쓰거나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많이 만난다.

나는 우리 회사 밖의 사람들과 일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
다양한 사람들을 그래도 꽤 만나게 되는데…

이번주에도 그런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되었다.

자기들이 별로 아쉽지 않을 때에는 뒤통수 치고, 거짓말하고, 심지어는 약간 모욕까지 해가면서 그렇게 하다가,
자기들이 아쉬워지니까 갑자기 찾아와서는 완전 사탕발림.

나는 웬만하면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내가 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그런 것들을 드러내면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게되고, 그러면 결국 관계가 비효율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번주에는 그렇게 찾아와서 엄청 친한척 하는 회사가 두개나 있었는데,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예의바르게 존중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요즘 어떤 회사와는 수백만달러를 더 달라, 못준다 뭐 그런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쪽 사람들은 이건 다 우리가 서로 다 잘되기 위한거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가 길게 잘 지속되면서 양쪽에 모두 이익이 되길 바란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냥 어떻게든 이기적으로 돈 더 벌어보려고 그렇게 하는 것.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일 하면서, 그 사람들을 존중하기란 참 쉽지 않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되기도 참 쉽지 않다.

그런 속에서 내가 여전히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보는데…
정말 정말 어렵다.

모토와 정신

가끔은 어떤 ‘모토’를 자신의 좌우명과 같이 삼고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자주, 어떤 사람이 좌우명으로 삼는 그 모토는, 그 구절이 이야기하고자하는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된 것이기도 하다.

직접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의 예를 들지 않고 설명을 하자면… (including myself)
가령,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면서 자신은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하는건 여행을 다니는 거다. 나그네된 백성이라고.

뭐 여행을 다니는게 나쁜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게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게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이거나, 그게 그 책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건 아니다.

그러니,
모토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좋다.

Growing together, Growing loneliness

고등학교때 참 좋았던 것은,
함께 했던 친구들과 내가 함께 ‘자라고’있다는 것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우리는 지식을 쌓아나가고 있었고, 생각이 자라났다.
물론 몸도 커졌고.
대학교때도 그것은 계속 되었다.
그건 그냥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있어서도 함께 하는 친구들과 함께 자라나갔다.
새로운 것들을 함께 배웠고, 성경을 읽으며 함께 토론했고, 새로운 노래를 함께 불렀다.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하던 것들을 함께 시도해보기도 했고, 새로운 시각들이 열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함께 자라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20, 30대에 그렇게 열심히 자라가던 사람들이 어느순간 자라남을 멈춘채,
자신이 그냥 생각하는 것에 머물러 그것을 고집스럽게 붙들며 사는 일들이 나타났다.
그나마 그러면 다행이지.
20, 30대에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겠다고 했던 사람들을 어쩌다 만나면,
회사 승진 이야기, 애들 교육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해외여행 이야기, 골프 이야기 정도만 하는 사람들이 되어있는 때도 많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게 계속 배우면서 자라나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그저 아주 가끔 멀리서 서로 소식을 전하는 수준으로만 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예수님 믿는 것이 외로워졌다.

이제는 그저 내가 하고 있는 싸움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자라남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 뿐.

Credit Card with annual fee

나는,
정말 절.대.로. annual fee가 있는 credit card는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이 일종의 철칙이었다.
annual fee를 조금 내면 cash back이 더 많으니까, 얼마 이상 쓰면 그게 더 이익이다… 뭐 그런 논리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거 신경쓰면서 credit card를 쓰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거 열심히 제대로 챙겨먹지 않으면 자칫 손해를 볼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무조건 credit card는 annual fee가 없는 것만 써 왔다.

그런데,
최근에 자그마치 annual fee가 395불이나 되는 credit card를 하나 만들었다!

왜 생각이 바뀌었느냐 하면…
이게 annaul fee가 395불이긴 하지만, 매년 400불어치 여행용으로 쓸 수 있는 ‘credit’이 나온다.
그러니까, 일년에 400불 어치 이상 여행을 하기만 하면 5불 이득인거다.
게다가 priority pass 라운지 카드도 주고,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혜택들이 있어서 그냥 확~ 질러 버렸다.

뒤늦게… 자본주의적 소비 카드를 갖게된 느낌… 살짝 좀 찜찜하기도 하다.

쉼과 게으름

지난 주말,
늦잠도 자고, 하루종일 인터넷 강의(?)같은 것 듣고, 컴퓨터 게임하면서 보냈다.

주말에 하는 이번학기 성경공부가 지난주 끝났기 때문에,
오랜만에 주말에 따로 뭔가를 해야하는 일이 없는 주말이었다.

예전과같이 넘치는 에너지로 필요하면 잠을 줄여가면서 그렇게 일할만큼 체력이 되지도 않고,
지난 몇달은 여러가지로 생각과 마음을 쓰게되는 일들이 더 많아서 정신적인 여유도 더 적었던 것 같다.

참 오랜만에 쉬었는데,
그냥 내가 게으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든다.
말하자면 꼭 필요한것보다 더 쉬었다는 것.

쉼과 게으름의 경계는 매우 애매하다.
그런데 결국 그 쉼과 게으름의 경계는, 분명한 양심을 가지고 마주하면 잘 분별해낼 수 있는 것 같다.

지난 주말,
나는 게을렀다.

보잘것 없는 숫자

김교신이 발행했던 ‘성서조선’은 처음에는 김교신과 몇 사람이 함께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사실상 김교신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를 다 하면서 발행하는 잡지가 되었다.
그 모습도 허름하고 해서 서점/가판대에서 내어놓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성서조선이 김교신에 의해서 발행될 당시, 대충 200명 정도쯤 되는 사람들이 그 잡지를 받아서 읽었다고 한다.

겨우 200명.

그런데도 김교신은 꾸준히 그 잡지를 발행했고,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과 성서연구모임을 계속했다.

보잘것 없는 숫자임에도 그냥 해야할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간증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어쩌다가 그냥 다른 지역의 아는 목사님이 계신 곳에 예배를 드리러 갈때, 그분께 미리 말씀을 드리면, 내게 ‘간증’을 해달라고 하시는 일이 있었다.

나는 내가 뭐 간증 그런거 하는거 참 불편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 나의 기억들이 내게는 소중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해없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자신이 없기도 하고,
대개 내게 ‘간증’을 부탁할때는 하나님 잘 믿고 ‘승리’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일들이 많은데… 나는 뭐 그렇게 대단히 ‘승리’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 간증을 부탁하는 분의 입맛에 맞는 간증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말 어떤 분들의 스토리는 참 그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느끼지기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는 그런 간증이 정말 있기도 하다.

왜 내 스토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소통되는 간증이 되기 어려울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보는데,
아마도 내가 좀 ‘특이한'(?)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뭐 좋은 의미나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냥 좀 보통과 다른… 그래서 내 스토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잘 적용되기 어려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능력에 넘치는 위치에 가지 말아야 한다

어쩌다보니 정말 능력치가 엄청난 사람들도 많이 볼 기회가 있었고,
그 속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가 하는 것도 볼 기회가 있었다.

대단히 경쟁적이면서도 높은 능력치를 요구하는 직장이나 직업은,
그것을 핸들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정말 그 사람은 처참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았다.
아주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 어찌어찌 해서 그 학교/그 직장 / 그 그룹에 들어오긴 했는데,
그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도 하지 못하는 수준인 사람들.

정말 처참하게 삶이 망가지는 것도 보았다.

그런의미에서,
과외를 열심히 해서 자기 능력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간다거나,
레주메를 뻥투기해서 자기 능력보다 더 좋은 위치에 가면,
그 사람도 불행하지고 그 사람의 주변도 모두 불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