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들과 권세자들 (5)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6:10-13의 내용을 그런 관점에서 읽어보면,
어쩌면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그냥 그야말로 정치권력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본문이 읽혀진다.

Tom Wright이 정치에 대해 자주 하는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막상 누군가가 선출되면 그 사람이 실제로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Tom Wright의 이 말은,
결국 교회가 하는 중요한 역할은, 어떤 정치 집단의 agenda를 분별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정치권력에 꼿꼿하게 맞서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힘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 되어버렸다.”
라고 이야기하는 자크 엘룰의 말은 정말 옳다.

나는 그렇게 된 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절대반지를 추구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중 누구와 한편을 먹어야 하나를 고민하는 기독교를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4)

자크엘룰에 따르면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에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권력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trivialize해버리면서 돈, 정치, 종교, 도덕, 문화를 다 뒤집어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의 기독교가 돈, 정치 ,종교, 도덕, 문화에의해 뒤집혀져 버렸다.

나는 깊게 공감하고 동의한다.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교회가 돈에의해 타락하는 모습을 비판하곤 한다.
현재 교회에 있는 배금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교회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설교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선동을 하는 것을 용인하고,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특정한 정치세력의 agenda를 교회의 agenda로 받아들여 버린다.

Tim Keller는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1980-90년대 미국의 mainline denomination 몰락은 그쪽 교회들이 ‘liberal’의 agenda를 교회 안으로 수용해서, mainline church = 민주당 지지라는 등식을 만들어버린데 그 이유가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급속이 일어나고 있는 evangelical denomination의 몰락은 그쪽 교회들이 ‘conservative’의 agenda를 교회 안으로 수용해서, evangelical church = 공화당 지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버린데 그 이유가 있다고 분석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권력을 뒤집는 것이니, 권력에 순응하거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3)

돈은 개인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모방(mimic)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살아가면서 돈은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돈을 허락하셔서 내 필요를 충족시키신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돈이 많으면 하나님 없이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기 매우 쉽다.
그러니,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고, 그런 의미에서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합당하다.

그런데, 정치권력은,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펼쳐내시는 선한 통치,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로인한 질서와 안정.
정치는, 특히 좋은 정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세상에 펼쳐내는 수단이 된다.
그러니 정치 권력을 확보하면, 하나님 없이도 선한 통치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매우 쉽다.
그러니 정치 권력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 권력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돈에 대해서 기독교 안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이해들이 있지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돈의 위험에 대해 경계하면서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마찬 가지로, 정치 권력, 정치에 대해서 기독교 안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이해들이 있지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정치권력과 정치의 위험에 대해 경계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2)

The Lord of the Rings (반지의 제왕)에 보면 ‘The Ring’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을 잘 보여준다.
꽤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던 사람들도, 그 반지만 보면 갑자기 딴 사람이 되어 그 반지를 갖고자 집착하게되고,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 ‘절대반지’는 The Lord of the Rings에서는 결국 ‘권력’을 상징한다.
그 권력을 막상 사람들이 보게되면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

이게 소설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도 정치에서 이런 것들을 늘 보곤 한다.
그건 독재국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기집권을 하는 지도자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민주국가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과 정당들에서도 그런 모습은 잘 보인다.

자크 엘룰, 리차드 포스터는 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돈은 그 자체가 가지는 ‘영적 힘’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가치중립적이고 그것을 잘 쓰기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돈을 추구하고,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결국 그 돈에의해 (악한) 영향을 받게된다고 했다.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정치권력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고, 정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낸다고 하는 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naive) 생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1)

에베소서 6:12에 나오는 Principalities and Powers (한국어로는 정사와 권세 혹은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대개는 이걸 ‘영적인’ 힘으로 해석을 많이 하는 것 같다.
google search에 요즘 AI overview 기능이 추가되었는데, 그곳에서는
“In the Bible, principalities and powers are invisible angelic forces that can be good or bad, and that rule and influence nations” 라고 정리하고 있다.

나도 그런 해석에 공감하면서도,
점점 그 정사와 권세가 어쩌면 조금 더 현실 세계에서의 정치적 권력을 의미하는 쪽으로 더 무게를 옮겨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이게 진짜 정치권력(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게 에베소서의 context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따지는 일은 사실 꽤 많은 공부와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직접 썼는가 하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고, 그러므로 그 서신의 저작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꽤 넓은 해석의 스펙트럼이 있으니.

여기서는 에베소서 context에서의 뜻을 더 깊게 찾기보다는,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로 그 뜻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지 않기 (8)

그래서 내가 정말 하루 8시간씩만 일하면서 살고 있느냐…
음… 뭐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도 많다.

특히 요즘은 회사에서 하는 어떤 프로젝트에 꽤 많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을 하고 있는 중이어서,
아침 7시에 눈을 뜨자마자 기도고 말씀묵상이고 그런거 하나 없이, 세수도 하기 전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우다다다 동부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하면서 달려들곤 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 전까지는 대개 바짝 달라붙어서 일을 하게 되니까…. 중간에 office 오가는 운전하는 시간등을 빼고 어쩌고 하더라도 하루 8시간을 지키지 못할때가 꽤 많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난 1~2년 꽤 노력한 덕에, 내 삶에서 hurry가 많이 줄어들긴 한 것 같다.

그건 결국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것 같다.

살면서 사랑할 여유를 두지 않고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많이 하게 된다.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지 않기 (7)

최근 민우와 이야기를 조금 깊게 나눈 적이 있었다.
민우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대학원을 어떤 분야로 가고 싶은지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는데,
(요즘 민우는 계속 진로로 고민이 많다)

내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면서 살고 싶느냐고 물었는데…
민우가 이야기한 것들중 꽤 상위 랭킹에 있는 것이…
자기가 하는 일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빠처럼 계속 집에서도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이야기했다.
민우가 보기에는 아빠는 저녁에 집에 와서도 매일 컴퓨터 앞에서 자기 전까지 일을 하다가 자는 사람으로 그냥 보였던 것 같다.

아…
어쩌면, 내가 민우에게 충분히 available한 아빠가 아니었겠구나.
민우가 언제든 필요할때 내게 말을 걸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interruption에 열려있는 모습이 아니었겠구나…

참 마음이 아팠다.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지 않기 (6)

John Mark Comer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확한 quote는 아니지만 의미를 전달하자면…)

내가 interruption (중단, 방해, 저지, 가로막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때, 내가 사랑하는 내 가족중 누가 내게 말을 걸어올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한참 바쁘게 미팅에 늦지 않게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카톡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런 interruption에 대한 반응을 보면 정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내가 지금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는 어떤 분의 모습이 있다.

10년전, KOSTA에는 Marva Dawn이 강사로 오셨다.
매일 아침 불편한 몸으로 꼿꼿하게 서서 한시간씩 설교를 하셨다. (그때 이미 한쪽 다리를 절단하신 상태였다.) 뭐 나름대로 그분도 KOSTA에서 전체집회 강사이셨으니, 사람들이 만나자고도 했을 테고, 또 빡빡한 KOSTA 일정 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거리도 만만치 않아서 휠체어로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바쁜 일정을 하시던 중,
휘튼 컬리지의 한쪽 구석에서 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멀리서 보았으니 어떤 내용을 나누고 있는지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그 와중에, 그 여성은 Marva Dawn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야기하고 있었고, Marva Dawn은 마치 그 순간에 그 사람 한 사람만 우주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자세로 그 여성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고 있었다.

바쁘게 오가는중, 설교의 어떤 면에 감동을 받은 그 분은,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Marva Dawn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고, 그렇게 바쁘게 가는 Marva Dawn을 붙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Marva Dawn은 그 interruption을 기쁘게 받아들여 그 사람에게 모든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아… 나도 Marva Dawn같이 되고 싶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lifestyle은 그런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지 않기 (5)

그리고 어쩌면 계속 일을 하면서,
working harder (더 열심히 일하기)를 배우기도 했지만
working smarter (더 지혜롭게 일하기)를 배우기도 했다.

그래서 더 효율적으로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는 여러가지 내 나름대로의 knowhow등이 생겼다.
그리고 예전과 같이 내가 직접 시간을 들여서 실험을 하고 data를 내는 것과 같이, 일정한 시간을 보야만 결과가 나오는 것과는 달리, 지금 하는 일은 더 깊은 통찰과 판단으로 지혜롭게 결정하는 일들이 더 중요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결심한 것은 그렇게 해서 남은 시간을 가지고 더 커리어에 투자해서 높아지거나 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남는 에너지로 따로 공부하고, 사색하고, 묵상하고, 그리고 다른 이들을 도우며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COVID-19 기간을 지내면서 나는 내가 하는 공부 양을 더 늘릴 수 있었고, 온라인에서 많으면 한주에 3그룹씩 성경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지 않기 (4)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함을 추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 것은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람들의 눈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에도 성실함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을 훈련한 것은 내게 참 좋은 습관으로 자리잡았고 나를 더 정직하고 투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정직과 투명.
그게 어쩌면 내 20대와 30대에 내가 싸우며 얻어내어야 했던 가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투쟁하면서 얻어야 하는 가치는 어쩌면 쫓겨서 사는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적어도 이곳 silicon valley에서는 정말 그렇다.

아, 물론 이곳 silicon valley에서도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은 좀 더 열심히 정직하게 투명하게 일하는 것에 훈련을 해야할것이겠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서 사는 것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정서적으로 끊임없이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바쁨(busyness)과 분주함(hurry)는 꽤 다른 개념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쁨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쫓기며 사는 분주함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평생의 삶의 모토로 삼고 살고 있는 “Contra Mundum” (세상에 대항하여)를 따라…
지금 내가 더 집중적으로 싸우며 다루어내야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 내게 있어서는, 마음의 분주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