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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11)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심지어는 미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이 약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유색인종들이 약자이기도 하다.
또 성소수자라던가, 이민자등은 여전히 약자이고,
특히 지난 수십년계속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폭력적으로 진행된 빈익빈부익부 속에서 경제적 약자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미국 사회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 ‘권력’이 정말 교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사상’, ‘철학’, ‘아카데미아’등의 세계에서는 그 권력의 역전현상이 일어났다고 본다.

미국에서 liberal democracy라는 이름으로 함께 언급되는 많은 가치들…
그 가치들의 대부분에 내가 동의하면서도…
한편 사상, 철학, 학문등의 분야에서 이미 일어난 권력역전현상을 생각해 보았을때,
그 가치를 주장하는 어떤 그룹의 사람들과 기독교가 동일화되는 것은 또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나아가서 만일 사상, 철학, 학문등의 분야에서 이미 권력 역전현상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그 분야에서 주도적 사상체계가 되어버린 그것들과 진지하게 불화를 모색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해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것이 Stanley Hauerwas가 그렇게도 liberal democracy를 까대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Stanley Hauerwas에 따르면 이 liberal democracy는 invitation for not-thinking 이란다. liberal demoracy라는 가치만 일단 들이대면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하고 다 근야 받아들인다는 거다.

기독교가 과연 어떻게 권력과 불화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하게 하는 포인트다.

(글이 길어지고 지루해져서 이쯤에서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ㅎㅎ)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9)

나는 이런 생각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양극화(polarized)되어 있는 한국과 미국같은 사회에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발…
교회가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일은 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목사가 강단에서 어떤 정치집단이나 정치가를 지지하는 발언등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교회가 비정치적이되어야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교회는 여전히 정치적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agenda에 대해 기독교와 교회가 분명히 그 가치와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 가치와, 그 가치를 추구 하는 정치집단을 동일시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 힘들 수 있다.
가령, 625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 북한과 전략적으로 평화적공존을 추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민자들에게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어떤 정치집단에 대해 그 배타적 입장으로인해 피해를 입은 이민자 집단이 미국에서 그 정치집단을 지지하기란 쉽지 않다.
혹은 대학때 독재정권과 싸웠던 자신, 혹은 자신의 동기들을 실제로 보았던 세대는, 그 독재의 잔재를 아직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치집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정치집단과 기독교적 정체성을 동일시 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어떤 정치집단을 배격하고 반대하는 것은 차라리 괜찮다.
그러나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7)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존엄을 가진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치제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억압과 폭력등에도 저항할 수 있는 내재적인 힘이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기독교가 그렇게 저항해야하는 대상, 불화해야하는 대상과 불화했을때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힘을 가져왔다.

가령,
어떤 사회에서 어떤 특정 지역출신이 부당하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기독교는 그 부당하게 차별받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몇세대가 지나면서 그 부당하게 차별받던 사람들이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고 내부적으로 더 단결해서 권력(정치권력, 경제권력, 혹은 문화권력 등)을 쟁취해냈다고 하자.
그러면 기독교는 그 사람들이 가지는 그 권력이 다른 약자를 억압하는 것에대해 다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특정 그룹과 연계되는 종교라기보다는,
끊임없이 권력과 불화하는 종교라는 말이다.
그 권력이 설사 바로 얼마전까지 기독교가 보호하고자 했던 약자그룹이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의 그룹도 절대 선이 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절대 선이 되신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6)

나 같은 비전문가가 내가 어떤 신학자를 좋아한다는둥… 그런 얘기를 하는게 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Stanley Hauerwas를 좋아한다.

이분은 때로 전달하고자하는 어떤 내용을 아주 강렬하면서도 명확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하시곤 하는데,
매우 자주 이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를 아주 신랄한 톤으로 비판하시곤 한다.

아니, 민주주의를 비판한다고?
이게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이분은 자기 주변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친구들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해서 자주,
“나는 신정주의자(theocrat)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신다고 한다.

신정주의(theocracy)라면 신의 뜻에 따라 통치한다는 명목하에 말도안되는 일들을 자행하는 매우 미개한 체제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의 생각이 맞지만,
Stanley Hauerwas는 자신이 신정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긴장한다고… ㅎㅎ

그렇게 의도적으로 충격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떤 심오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Stanley Hauerwas나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나도 그분이 이야기한방식 대로라면 역시 신정주의자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5)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같이,
기독교가 세상의 어떤 가치들을 선호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매우 자주,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을 우리에게 두지 않는 우상의 거부의 행동일 수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기독교는 그 시대의 권력을 잡고있는 어떤 가치나 사조, 체제나 경향들과 싸우게 되기 쉽다.
그것들이 그 시대의 우상이 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우상을 거부하는 기독교,
기독교 다운 기독교의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는….

어항 속의 물고기가 그 어항의 물을 거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나타낼수도 있다.

때로 무엇과 싸워야하는가 하는 것을 분별해내는 것도 매우 어렵고,
설사 그 싸워야 하는 대상을 분별해 내었다 하더라도 그 대상과 어떻게 맞서는게 가능해?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어쩌면 십계명의 제 1계명조차도 무시하는 엉터리 기독교가 되어버려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있어 중요한 장애요인은…
게으름이다.

지금 이 정도면 됐지… 내가 배워왔던 기독교면 충분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죽어있는 종교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이 보는 기독교의 모습인지…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4)

기독교가 계속해서 거부할만한 것들은 분명히 있다.
폭력, 미움, 죄, 음란함, 탐욕 등등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기독교가 거부하는 것들이아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는 이런것들까지도,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18세기 조선에서 지금과 같은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큰 물의를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 기준등을 적용해 보았을때 피해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다.

이게…
수영복과 같이 비교적 쉬운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더 많은 것들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령,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우파를 지지해야 하는가?

20세기 중반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폭력이 사람들을 억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공산주의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선택 중에서 우파를 지지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삼아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폭력에 대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싸워야하는 우상이, 공산주의의 어그러진 이상주의와 그로인해 비롯된 폭력이라면, 제한적으로 정치적 우파를 지지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에는 어떤까?
지금도 공산주의가 현대세계가 싸우고 있는 주된 우상인가?

그런 완전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지금 현대 세계가 싸워야하는 우상은 오히려 이념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체제 안에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탐욕, 쾌락추구,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폭력성 등등이 싸워야하는 더 큰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정치적 우파가 기독교 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도 잘못된 일이다.

이처럼,
어떠한 우상도 타파하는 기독교가 그 기독교적 생명력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대상은 고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떤시대에는 공산주의의 폭력이었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그것이 자본주의의 폭력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3)

반면 기독교가 권력을 탐하거나,
그 권력의 일부가 되어버리거나,
권력의 하수인이 되거나,
권력 자체가 되어버릴때 기독교는 침체되었고,
오히려 세상에서 암적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주 단순히 이야기해서,
우상숭배를 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고, 권력과 친구가 되어버리는 것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을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세상의 강력한 권력이 점점 사람들에게 우상이 되어가고 있을때,
그것을 싸워야할 대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무지(ignorance)역시 기독교를 병들게하기도 하였다.

가령,
기독교가 공산주의의 폭력과 싸운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 반공 자체가 기독교와 일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채, 극렬한 반공주의를 이야기하는 극우의 사상과 결합한 것은,
내 생각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현대 기독교가 이런류의 무지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편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2)

언제 기독교가 정말 기독교 다웠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어쨌든 어떤 사회 속에서 그 사회가 숭배하는 ‘우상’ 혹은 ‘권력’과 맞설때 였다.

하나님 아닌 인간이 만든 것들을 숭배하는 종교적 사회적 권력에 맞서기도 했고,
기독교의 껍질을 쓴 종교권력에 맞서 개혁과 혁명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실제 정치 권력에 억업받는 사람들과 함께 정치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일들을 하기도 했었다.

언제나, 모든 기독교가, 이 모든 권력들에 대해 항상 저항하고 불화했던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종파나 신학적 입장에 따라,
혹은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기독교가 어떤 권력과 그렇게 맞설때 기독교는 기독교 다웠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도,
보수 기독교는 종교적 우상숭배라는 문화적/사회적 권력과 맞서 싸웠고,
진보 기독교는 정치적 경제적 폭력이라는 철퇴를 휘두르는 권력과 맞서 싸웠다.

그런 싸움들이 모두 다 건강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 싸움들이 모두 정당했던 것도 아니다.
또, 그 싸움들이 모두 하나님이외에 나머지 것들을 상대화하는 기독교 근본으로부터 출발한것도 아니었다.

유대종교권력과 맞선 기독교,
로마 제국과 맞선 기독교,
중세 종교권력과 맞선 기독교,
인본주의 철학사조와 맞선 기독교,
굳어있고 죽어있는 신학 사조와 맞선 기독교,
히틀러와 맞선 기독교,
인종차별에 맞선 기독교,
가난과 싸운 기독교,
병과 싸운 기독교,
개인적 죄의 문제와 맞선 기독교,
3.1운동의 기독교,
공산주의의 폭력에 저항한 기독교,
독재정권에 맞선 기독교,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기독교

기독교는 참 매력적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1)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는 상당히 고약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을 절대화 하고 전 우주의 나머지 모두를 다 상대화 해버린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추종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으면, 당장 기독교는 그것을 견제, 정복,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버린다.

아니,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가 그것들을 견제, 정복,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버려야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독교는 그렇게 충분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우상이란 좋은 것을 절대화할때 나타난다.
가령, 가족은 좋은 것이지만 가족을 절대화하면 가족이 우상이 되어버린다.
사회정의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절대화하면 그것 역시 우상이 되어버린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아주 매료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제외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니,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본질상,
권력에 저항하는 성질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정치적 권력이든, 종교적 권력이든, 경제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말이다.

Praying for my daughter (2)

민우는 우리 부부와는 다른점이 참 많다.
우리 부부보다 훨씬 더 creative하다.
뭔가 계속 쪼물쪼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뜨개질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작은 모형을 만들고…
그리고 글을 쓰고, 공작을 하고…

일단 나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오랫동안 어떤 창의적인 일을 할만큼 참을성이 없다. ㅠㅠ
빨리 해야하는 일을 해치워야하는 성격이어서, 민우처럼 오랜시간 자신이 만들어내어야 하는 것에 정성을 쏟는 일을 하지 못할뿐 아니라 한 경험도 거의 없다.

그리고 민우는 우리부부보다, 최소한 나보다 훨씬 덜 분석적이다.
이게… 덜 분석적이라는 것이 분명 단점일수도 있을 테지만, 장점이 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민우가 덜 분석적이라고 쓰는 것 말고는 더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다. ㅎㅎ

대신 민우는 더 사람에 대한 compassion이 많다.
어떤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작은 상처라도 주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가령 내가 민우와 함께 어떤 물건을 사러가서, 그 점원이 빠릿빠릿하게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불편함을 표시하면… 민우는 그것을 매우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혹시 함께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내가 tip을 충분히 놓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자기 지갑을 뒤져서라도 tip을 더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다.

뭔가 나와 비슷하면 그래도 내 생각의 흐름이나 내 경험등이 민우에게 도움이 될만한 조언과 대화를 조금 더 많이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민우의 전공도, 진로도, 성격도 나와는 많이 다르니…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도 그렇게 앞으로의 경험은 더더욱… 내 경험과는 많이 다를 것이니..
내가 어떤 아빠가 되어야 민우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