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하나님 (3)

민우는 자기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더라도, 떠벌리면서 자랑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어떤건 꽤 자랑할만해보이는 것도 그냥 입을 딱 다물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아빠 엄마에게는 사소한것도 꼭 자랑을 많이 하곤 한다.
학교에서 시험 잘 본일, 새로 옷을 샀는데 마음에 들면 사진도 찍어 보내고, 교수에게 칭찬을 받은 일, 아니면 다른 친구들에게 선행을 베푼 일까지도. 최근엔 자기가 끓인 찌게나 국, 혹은 빵, 주먹밥 등 여러가지 다른 먹을것들 사진도 많이 보낸다.

요즘은 한주에 paper를 7개 써야하는 꽤 살인적인 work load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매주 하는 영상통화도 요즘은 그렇게 잘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바쁘더라도 꼭 오는 메시지가 두개 있다.
하나는 돈 보내달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렇게 자랑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민우가 자랑하는것을 다 받아 축하해주고 잘했다고 칭찬해준다.
그럼 민우는 그걸 기쁨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나도 가끔은, 그렇게 하나님에게 가서 하나님… 나 이거 이렇게 했는데 이런건 좀 칭창해주시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좀 여쭈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가만 보면, 나는 하나님과 그렇게까지 친밀하지는 않은 듯 하다.
내 자랑거리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쪼로록 달려가서 그걸 떠벌리는 건 하게되질 않는다.

아빠, 하나님 (2)

민우가 3,4살때 그림을 그리면 쪼로록 달려와서 나나 아내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곤 했다.
나는 그게 하도 귀여워서 그럴때마다 민우가 숨막히다고 할만큼 꼭 껴안아주곤 했다.

그러면 민우는 캑캑 소리를 내면서 숨이 막힌다고 그러다가…
내가 좋아주면 또 강아지가 달려가듯 다다닥 자기 도화지로 달려가서 크레용으로 엉터리 그림들을 그려서 쪼로록 달려오곤 했다.

그럼 나는 또 숨이막힌다고 할만큼 꼭 민우를 꽉 껴안아주는걸 반복했다.

민우는 놀라울만큼 그걸 여러번 반복했다.
아무리 엉터리로 그림을 그려도 아빠에게만 가지고오면 아빠가 잘했다고 야단법석을 부리면서 자기를 꼭 안아주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누구든지 어린이와같이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우리의 인생의 그림을 가지고 쪼로록 달려갈 대상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분은 내 재능없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내가 그 그림을 그분께 들고 쪼로록 달려가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인정, 세상에서의 성취, 자아실현등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자신의 그림은 옆집 아저씨에게 쪼로록 가지고가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아빠, 하나님 (1)

민우가 대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게 민우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지금도 나는 민우가 집에 오면 꼭 껴안아주고,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해준다.

아직도 내겐 애기같은 모습이 힐끗힐끗 민우에게서 보인다.

민우가 방학이 되어 집에올때면 공항에 픽업을 나가서 멀리 민우가 보일때부터 나는 껑충껑충 뛰어서 민우에게간다. 그냥 그렇게 사랑스럽다. 뭐 이유 그런거 없다. 그냥 사랑스러운거다.

민우가 늘 아빠가 최고의 아빠라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우는 아빠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굳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어려서부터,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면 얻게되는 bonus이자 penalty는 아빠를 ‘영원히’ 알고 지내게 된다는 것이라고 민우가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럼 나는 민우에게 이렇게 얘기해줬다.
You’re stuck with me forever, literally.
그럼 민우는 어휴… 그러면서도 그렇게 싫지 않은 표정을 짓고는 나를 한번 꼭 안곤 했다.

성인이 된 딸아이를 둔 아빠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내가 민우를 사랑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하긴 한걸까?
아니면 전혀 차원이 달라서 감히 그렇게 비교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사랑인걸까?
하나님께서 아버지/아빠의 이미지로 성경에 자주 나오는데, 그건 지금 이 시대의 아빠들이 갖는 이미지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어서, 자칫 하나님 = 아빠 로 등치시키면 하나님에대한 이해에 오히려 방해가되는 건 아닐까?

기도 (10)

대화는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와 서로 생각과 마음을 교환하는 행위일 것이다.

만일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그 대화를 통해서 내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물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할만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나.

그러니 그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어지는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알게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어떤 때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이 될수도 있겠고,
미래에대해 용기를 주시는 것일 수도 있겠고,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것을 함께 공감하는 것이 될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주시는 것 보다,
기도를 통해서 내가 변화되는 빈도가 훨씬 더 잦은 것이 매우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 요청은 잘 들어주시지 않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숙제는 남는다.
나는 간구의 기도를 정말 거의 잘 하지 못한다.
어차피 기도해도 뭐 얼마나 들어주시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내 욕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면 그거 뭐 얼마나 가치있는 기도일까 싶어서이다.

때로는 그게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할때도 그렇게 드러난다.
어떤 사람의 특정한 상황을 놓고 기도할때 그 기도가 너무나도 자주 그렇게 간절하지 못하다.

가끔… 아주 가끔…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할때 유난히 마음을 쏟아 기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를 시작했다가도 그 사람을 위해 전혀 다른 기도를 하게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하는 기도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나와 나누어 주셔서 기도하게 되는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래저래 나는 기도가 참 서툴다.
꽤 기도를 잘 해보려는 마음도 많고, 기도를 열심히 해보기도 했으나…
여전히 기도가 참 서툴다.

기도 (9)

내 절박한 상황 속에서 뜬금없는 중보기도…
도대체 그것을 통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기도가 도대체 뭐야?

거기서 딱 한가지 바뀐게 있는데… 그건 나였다.
나는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 기도하는 맛을 조금씩 들이기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늘 그렇게 기특한 기도만 하느냐 하면 당연히 아닌데…
적어도 그때로부터 기도를 할때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을 마음에 담아 기도하는 것을 알게 되었꼬, 그래서 내 상황의 해결보다 더 절박한 어떤 것들에 대해 기도하는 것을 조금 배우게 되었다.

기도는 결국 기도하는 사람을 바꾼다는…. 일종의 클리쉐 같은 말인데…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내게 있어서는…
그게 정말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하는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효과(?)는 크게 없는 것 같다.
이건 내 기도가 내 욕심에 가득 차있기 때문이기도 할테고,
내 상황이 많이 절박하지 않아서 내가 구하는 것들이 일종의 사치에 해당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한듯하다.

그렇지만 기도하는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되고, 그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참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기도 (8)

내가 했던 다른 기도는 또 이런 것이다.
내 상황이 정말 절박한데, 그래서 내 상황을 놓고 기도를 하려고 교회의 지하 구석방에 혼자 들어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많이 힘들다고… 좀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한 2~3분 기도하다가 보니 갑자기 마음 속에서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기도를 할 간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위한 기도였다.)

아니, 내 상황이 코가 석자인데, 내가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할때란 말인가!
내가 무슨 지역 교회가 어떤 교회들이 있는지 다 알지도 못하는데, 그 알지도 못하는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

그래서 ‘제정신’으로 다시 내 사정을 놓고 기도를 하려고 하니…
자꾸만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할 마음만 자꾸 생기는 거다.
그래서 결국 그지역의 교회들을 위한 기도만 한 한시간 하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 시즌에는 계속 그랬다. 내 사정이 워낙 열악해서 나를 위한 기도를 좀 하고 싶은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 그 기도는 안나오고 자꾸만 이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기도만 나오게 되는 거다. 한두달 이상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내 기도로 그 동네 교회들이 엄청 다 건강해지고 좋아졌느냐?
적어도 내가 알기론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냥 아주 뜬금없이 그렇게 기도할 마음이 생겨서 나는 그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엄청 간절하게 기도했었다.

이게 뭐야? 그럼 기도를 왜 하는 거야?

기도 (7)

내가 했던 절박한 기도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박사과정때 정말 일이 잘 안풀렸다.
하던 project가 fund가 없어져서 지도교수를 바꿔야 했었고, 지도교수없이 (그래서 RA 없이) 지내야 했던 기간도 꽤 길었다.
나와 얘기가 좀 되어서 내가 가기로 거의 되어가던 그룹에서는 갑자기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뽑아서 공중에 붕 뜨게 되기도 했고…

자존감 바닥, 자신감 바닥, 미래에대한 불확실성은 엄청 커졌고, 돈도 없고, 너무 힘드니까 그냥 심한 무기력감에 빠져 일종의 우울증 증상에 빠졌다.

하루종일 멍~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때도 많았고…
뭐라고 기도도 못하겠고, 기도하겠다고 뭐 자리잡고 그럴 힘도 없고.

그래서 혼자서 차를 타고 한 밤중에 찰스강변의 빈 주차장에 밤 12시 넘어서 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차 문을 걸어잠그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시편 23편을 외웠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라는게 하나도 믿어지지는 않는데…
나는 여기서 뭐 어떻게 빠져나갈 길도 잘 안보이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살기는 해야겠는데 뭘 어째야하는 지는 모르겠고…
거기서 내가 했던건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렇게 고래고래 시편 23편을 외우는 것이었다.

기도 (6)

조지 뮬러의 이야기들을 읽으면 완전 놀랍다.
로렌 커닝햄의 책들을 읽어도 그렇다.
그런책들에는 기적적으로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극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아… 하나님은 나를 그런 사람들보더 덜 사랑하시는게 분명해보인다.
나는 기도해도 그런 극적인 기도응답을 별로 경험하지 못한다.
내게있어서 대부분의 기도응답은,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내 생각을 바꾸어서 벌어진 다른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A 라는 직장에 가고 싶어 마구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A라는 직장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거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B라는 직장으로 가게 되었고…
나는 그러는 과정에서 A라는 직장에 가고싶어하던 마음이 누그러지거나 사라져서 결국 괜찮게 해결되는…

….
이렇게 내게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많은 경우 그런거다.
A라는 길이 정말 좋아보이고, 그래서 A를 위해 많이 기도했는데, 결국 그게 안되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상황.
그런데 조지 뮬러나 로렌 커닝햄이나 그렇게 엄청나게 기도하고 응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개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다.
훨씬 더 상황은 절박하고, 훨씬 더 기도의 선한 동기가 명확하고, 훨씬 더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확연한 것이다.

결국 내 기도응답이 그렇게 미지근하게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기도하는 상황과 내 기도의 모습이 그 기도요청이 꼭 들어지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인거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그 상황에서 내 의지와 욕심을 꺾는 것이 더 바람직한 상황인거다.

기도 (5)

점점 철이들고, 신앙도 성숙해져가면서 내가 하는 기도 중에도 꽤 철든 기도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기특한 기도들도 있었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내가하는 기도들에는 별로 응답을 해주시지 않았다.
여태껏 그렇다.

내가 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친구를 위한 기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
교회가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해달라는 기도…
이런 것들도, 정말 내가 기도를 해서 그 응답으로 뭔가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게된 경우가 거의 없다.

아니,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몇가지 가능성이 있겠다.

1. 여전히 내가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은 기도이다.
2. 기도가 사실은 많이 응답이 되었는데 내가 그걸 잘 알아차리지 못한 것 뿐이다.
3. 하나님께서 내 기도는 별로 들어주시지 않는 모양이다.
4. 기도란 원래 그렇게 사람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위의 4가지 중에서 4번의 가능성에 더 많이 주목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일들이 없지는 않으나,
훨씬 더 많은 경우 기도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 요구를 관철시키기위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그것이 잘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걸까…?

기도 (4)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삶에서 그렇게 막~ 필요한 것이 많지 않았다.

우리집이 대단히 부자는 아니었어도, 돈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던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했고, 학교에서 친구도 많았다.
소위 반장선거 같은걸 하면 늘 압도적으로 애들이 나를 지지해줬고,
별로 꿀리는 것 없이 지냈다.

정말 내가 그런 상황에서 달라고 요청했던 것들이 무엇이 있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별로 생각도 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을 테고,
꼭 필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있으면 좋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한편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경험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ego를 높여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