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4)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를 해결해주는 방식은 계속해서 기독교를 이익지향적인 모습에 가두어버린다.
사람들의 요구라는게 결국 대부분 이익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혹은 조금 더 작은 scale에서 어떤 지역교회나 어떤 공동체가 이익지향적인 모습으로부터 가치지향적인 모습으로 지향을 바꾸려면,
어떤 의미에서는 bottom-up의 felt need를 채우는 일이나, 당장 급해보이는 목회적 필요를 해결하는 일등의 priority를 많이 낮추어야 한다.
대신, top-down 의 ‘케리그마’를 바로 세우는 일들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그 세상의 주인이시다.
예수가 주(Lord)가 되신다는 것은 내 개인의 의견의 영역에 해당하는 선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주가 되신다는 선언이 정치적이된다…. 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선언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솔직히 기독교 안에서 그런 케리그마가 바로 세워질 소망이 그리 크게 보이질 않는다.
적어도 내가 보는 기독교 안에서는 그렇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3)

갑자기 뜬금이 없지만,
흔히 교회에서 사람들이 소위 ‘기도제목’을 나눈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들을 잘 모아보라.
그러면 그 ‘기도제목’이라는 것들이 다… 그저 이익추구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거기서 갑자기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이 하는 기도의 내용이라고 이야기하면, 갑분싸가 되어버린다.

현대 기독교는,
grass-root level에서 보았을때 완전히 이익추구집단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가치지향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되비지만 공공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는 목에 핏대를 세워 반대한다.
공공에 불이익이 되더라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밀어붙인다.

사람들은 노무현의 오래된 행적을 들으며 여전히 감동하고,
노회찬의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와 같은 연설을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지도 못한다.

노무현이나 노회찬은 가치지향적이었지만,
현대 기독교는 이익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2)

지금 가치추구를 하는 쪽의 정치적 견해가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이 좀 답답하긴 하지만 암담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특수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서 뻘짓을 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집단이 빨리 정화되어서, 좀 제대로된 논리를 펴는 가치추구 집단으로 변화되거나 대치되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가 부딛혔을때, 이익추구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가치추구를 이기기가 쉽지 않다. (양쪽의 힘이 비슷한 수준이라면)
왜냐하면 가치추구를 하는 사람들은 그 가치에 자신을 던지지만,
이익추구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그 이익을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적어도 한동안 가치추구 집단이 이익추구집단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1)

지난 토요일,
한국에서 방송된 518 기념식을 youtube로 몇번이나 다시 보았다.
나도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런데 그 기념식 전후로,
어떤 정치집단은 또 완전 이상한 소리들을 해댄다.

나는 지금 한국의 정치 지형은…
가치를 추구하는 일단의 정치집단과,
이익을 추구하는 일단의 정치집단이 맞붙어있다고 본다.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은, 그 가치를 위해서 젊은 시절에 고문도 당하고, 감옥도 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은, 젊은 시절부터 그저 이익/출세/성공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어떤 가치로 포장하려고 노력을 하긴 하는데,
영 어색하고 이상하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삑싸리를 낸다.

지금 집권세력이라고 해서 모두다 고매한 가치를 가지고 있겠느냐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큰 흐름으로 봐선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5)

지금 이렇게 쓰는 이야기는,
사실 블로그를 하고 있는 내게도 매우 큰 고민거리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독자들만 이 블로그에 정기적으로 들어오신다.

가끔 개인적인 통로나 이 블로그의 댓글등을 통해서 내게 전달되어오는 feedback들은 그냥 다 positive한 것 일색이다.

그게 어디 블로그 뿐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들,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내 주장, 내가 하는 가치판단들…
이것들에 대해 건강한 반론을 듣는 일은 정말 아주 드물다.

아, 물론 아주 무논리의 억지주장으로 내게 악악하는 사람들을 만날때가 없지는 않다. ^^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내 약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내 audience에 익숙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가끔 이 블로그에 쓰는 대로, 내가 갖고 있는 ‘외로움’은 바로 그런 고민과 맥이 닿아있는 듯 하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4)

그러면 이렇게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져버려 논리의 왜곡을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 생각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정치가가 되었던 종교지도자가 되었던…
그 사람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자기확신으로 인한 확신편향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경계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이 문제를 다루어낼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된다고 본다.

두번째로는,
건강한 비판을 계속 듣는 통로를 열어두어야 한다.
자신에게 하는 긍정적인 반응은 10분의 1로 축소시켜서 들으려 하고, 자신에게 하는 비판적인 반응을 10배로 확대시켜서 들어려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아니, 내가 이 얘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이 얘기를 했더니 은혜를 받더라고…
이건 그 얘기를 계속해도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인식해야 한다.

예전에 A 목사님이라는 분과 어떤 사역을 계속 해야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분은 매우 말씀을 잘 하시고, 옳은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분이셔서 그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분과 함께 사역을 하던 일단의 사람들이 그분이 하시는 어떤 말씀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A 목사님은 그 문제에 대해 내 말이 맞는데 왜그래 하시며 계속 반발만 하셨다.
그 목사님과 그 문제로 대화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그분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으시고, 아주 꼿꼿하게 내가 맞다는 입장을 유지하셨다.
그분과는 대화가 참 어려웠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년 뒤,
그 목사님께서 다른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내가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그때 막 facebook을 시작하셨을 때였다.
그분은…
내가 설교를 할때는 사람들이 다 아멘만 하니, 내가 다 옳은줄만 알았다.
그런데 facebook이라는 광장으로 나가보니, 내게 심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따라다니며 조목조목 따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내가 늘 옳은줄만 알았는데 그런게 아니더라.

나는 facebook을 잘 하지 않지만,
가끔 한번씩 들어가면 그분의 포스팅을 볼때가 있다.
그분은 연세가 더 드셨지만, 그분이 젊었을때보다 훨씬 더 열려있으시고, 유연하시다.

정치인들이 되었건, 목사님들이 되었건,
나는 이 A 목사님과 같은 경험들을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3)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져서 그 audience에게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되면,
그 정치가는, 그 목사님은, 점점 그 환경 속에서 ‘뽕’을 맞게 된다.
자기가 이야기하면 열광적으로 반응하니까,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맞는줄 아는 거다.
그래서 더 독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더 게을러지기도 하고, 더 논리가 무너지게 되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든, 무슨 무논리의 막밀이든,
그것에 긍정적으로 반응 하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종교적 환경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 논리에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이 헌신한 그 종교적 가치에 동의한다는 차원에서 동의하지 않는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앞에서 내가 글을 쓰긴 했지만,
요즘 종교가 되어버린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설사 어떤 정치가가 막말을 하거나 논리가 부족한 말을 하더라도,
그저 내 진영의 사람이니까 하고 그 사람의 엉뚱한 소리에 박수를 치고 열광을 한다.

이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은 그럼 무엇일까?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2)

어떤 목사님이라도,
그 목사님에게 ‘당신의 설교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설교에 대한 비판을 계속해서 경청하면서 매주 설교를 이어가는 목사님들이 있을까?
나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없을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단정적인 말이고, 정말 거의 없을 것 같다.

어떤 목사님이 살짝 뭔가 논리나 주장이 정도에서 어긋난 설교를 좀 하다고 하자.
그럼 그 교회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아마도 삼삼오오 모여서 목사님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조금 할것이다.
그러다가도, 아니 이러면 안되지.. 뭐 그렇게 이야기하는 성실하신 권사님 말씀에 살짝 기가 눌려서, 그래 뭐. 내가 그냥 좀 참고 듣지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짝 벗어난 설교도 어떤 사람들은 좋다고 듣는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목사님에게 가서 꼭 이야기를 한다. 목사님 오늘 설교 참 좋았어요.
그러면 그 목사님은 우쭐해진다. 아 이 설교가 좋았던 거구나.

목사님이 거기서 좀 정신 차려서 살짝 비뚤어진 것을 스스로 좀 바로잡으면 좋은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않고 더 비뚤어지거나 벗어나게 되면…
위에서 이야기한 현상들이 살짝 더 심각하게 일어난다.
그 설교가 불편한 사람들은 살짝 더 불만을 이야기하고,
그 설교를 잘 들은 사람들은 쪼로록 목사님에게 달려가서 설교 참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목사님은 거기서 살짝 더 우쭐해지고.

그러다가 어떤 임계점이 넘으면,
그렇게 불만을 갖던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대해. 설교에 대해 포기한채 교회를 다니거나,
아니면 교회를 아주 옮겨버린다.
그러면 목사님에게 그나마 정직한 feedback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없어져 버리고,
목사님 설교 좋았어요 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이렇게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 목사님만의 audience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중엔 그 목사님이 막말을 하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건,
그저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들만 남게되고,
그럴수록 목사님은 더 우쭐해지고 신이나서 설교를 하게된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1)

요즘 한국의 모 극우정당을 보면 정말 하는 짓이 가관이다.
끊임없이 막말을 해댄다. 좀 말이 심하다… 싶은 정도가 아니고, 입에 담기 어려운 아주 심한 극언을 쏟아내고 있다.
아니, 저러면 정말 저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쌍욕과 극언에 동조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저렇게 하면 자기들이 망한다고 생각을 안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정치 전문가가 아니니,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이렇게 하면 저 정당은 망할 것 같은데… 내가 저 정당 지지자라면 많이 속상할 것 같은데…

인터넷에서 찾아본 글이나 youtube video등을 찾아보면서 적어도 내게 꽤 설득력이 있었던 분석은,
지금 그 정당의 사람들이 극우 youtube를 너무 열심히 보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극우 youtube는 극우의 사람들만이 열심히 보는 매체이니, 거기서는 아주 극언을 하면 인기가 높아지는데, 자꾸 그런 극언들을 열심히 듣다보니 그것에 취해서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고 저렇게 망해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들을 막말이라고 신문기사에서 이야기하길래, 자세히 보니 그것도 극우 웹사이트에서 통용되는 말이라고.

지금 이 극우정당이 하는 이 일들이, 그들에게 정말 독이 될른지 잘은 모르겠는데,
(내 생각으론 이 사람들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긴 하다)
적어도 이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사실’과 많이 떨어져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audience만을 위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만 익숙해지다보니,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5)

어떤 사람이 어떤 개념을 믿고 산다는 것은, 그 믿고있는 개념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unintelligible)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중력을 믿는다.
그런데 만일 내가 중력을 의심한다면, 농구를 할때 껑충 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칫잘못하면 내가 그냥 껑충 뛰는 순간 그 힘으로 우주 밖으로 날아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안심하고 제자리 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중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중력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은 unintelligible 한것이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만 가능한 삶의 방식을 택하여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unintelligible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처절한 처형 끝에 삼일만에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 삶이 unintelligible한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의 당연한 norm이 되지 않는한,
이렇게 정치가 종교가 되는 것과 같은 nonsense는 계속 반복될 것 같다.

뜬금없이 하게된, 금년의 고난주간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