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3)

나는 고등학교가 3기, 대학교가 2기여서 선배가 별로 없었다.
공부하는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대학교 3학년때 복음에 눈을 뜨고나서는 이 어마어마한 것을 좀 따라 배울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주 절실하게 내가 따라 배울 사람들을 찾았었다.

어떤 분들은 참 배우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 있었고, 어떤 분들은 가까이 있었지만 따라 배울 만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몇년에 걸쳐 참 고마운 신앙의 선배들도 그래서 좀 만날 수 있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미친듯이 책을 찾아 읽어 책을 통해 얻은 간접 지식들도 쌓을 수 있었다.

내가 선배를 찾았던 것은 꽤 절실할때도 있었다.
내가 발견하기 시작한 이 복음의 신비를 나보다 조금 더 고민해본 사람들과 치열하게 대화하면서 배워보고 싶었다.

그때 나는, 누가 내게 그 사람의 생각을 좀 강요해도 좋으니, 그래서 내가 많이 불편해도 좋으니, 그래도 누가 내 선배가 되어 주길 많이 원했었다.

다시 말하면 누가 내게 꼰대질을 해서라도 내가 성장에 이르도록 도와줬으면 하고 바랬던 것이다.

꼰대 (2)

젊은 세대가 꼰대를 극혐하는 것과 대비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멘토’를 찾는 다는 것이다.
이게 지금의 20대까지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대로는, 지금의 30대까지는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얼핏 생각하면 꼰대는 권위주의적이고, 멘토는 공감하며 끌어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권위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내용보다는 형식에 달려있어보기도 하다.
사실 대화하는 내용은 결국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다만 그 형식을 부드럽게 하고 약간의 feedback 받는 여유를 남겨두면 그런 사람들은 꼰대로 여겨지지 않기도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는 내용은 일방적이지 않은데 이야기하는 방식이 권위적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은 그냥 꼰대가 되어버린다.

이게 어떤 사람의 조언을 받는 입장에서도 구별하기 어렵지만, 어떤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경우에도 내가 이렇게 하면 꼰대가 되나 하는 것을 구별해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실제로 내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만나 보았고,
왜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공격적으로 이야기를 할까 하면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도 만나 보았다.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냥 어떤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고 내용을 잘 전달하는 일종의 대화의 기술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꼰대 (1)

꼰대는 요즘 일종의 극혐의 대상이다.
권위주의적인 어른을 비하하는데 사용하는 단어인데, 요즘은 ‘젊은 꼰대’라는 말도 있으니 이게 반드시 어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꼰대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 일종의 비하의 언어여서 그 말을 쓰는 것이 내게 편하지 않다. 그리고 누구를 꼰대라고 몰아버리는 문화가 반드시 건강한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기선 어쩔수 없이 꼰대라는 말을, 가능하면 비하의 의미를 빼고 써보려고 한다.

나는 80-90년에를 한국에서 보냈고, 한국에서 대학원과 직장생활을 했으니 분명히 내게 꼰대질을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경험이 있다. 미국에 와서도 여러 세팅에서 꼰대들을 많이 만났다.
한편, 이제 내가 50대가 되었으니 나도 점점 꼰대가 될 가능성이 많은 나이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꽤 어릴때부터 그냥 ‘어린 꼰대’로 여겨질수 있는 성향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릴땐 이런걸 ‘리더십’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자칫 잘못하면 꼰대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꼰대질을 하기도 하는게 분명하다.

나는 꼰대를 정말 극혐했다.
내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때, 직장생활을 할때, 정말 내 주변에는 꼰대들이 넘쳐났다.
내가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오겠다고 결심했던 이유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했다.

나는 왜 그렇게 꼰대들을 못견뎌 했을까.
내 주변 친구나 동료들 가운데에는 꼰대들 밑에서 훨씬 더 잘 견디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람들 관계 잘 관리해가며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그렇게 힘들어 했을까.

내 20대에는 그런 꼰대들을 못마땅해하는 감정이 나를 몹시 힘들게한 것이었다.
한편 그런 사람들이 싫어서 힘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는 나를 보며 그 모습이 싫기도 했다.

기독교의 발흥 (10)

마지막 10장은 매우 짧다.
‘미덕’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냥 쉽게 얘기하자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핵심적 가치들/미덕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거다.

여기서 구분해야할 것은, 기독교가 만들어내는 subculture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핵심적 가치 자체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기독교가 매력적이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세상에게 매력적임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기독교의 subculture를 매력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데… (seeker-friendly church같은…)


이 책을 다 읽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고, 어떤 부분은 살짝 좀 어렵게 느끼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다닥 넘기며 읽을만큼 대단히 ‘매력적인’ 책이었다.

2020년도 이제 5월 중순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어쩌면 이 책이 내게 2020년에 읽은 최고의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참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분들에게 강추한다.

기독교의 발흥 (9)

9장에서는 기독교가 처해있던 상황은, 여러 다른 이교들과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로마는 당시 일반적으로 종교에대해 관용적이었고 그 속에서 기독교도 처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관용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들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고, 기독교는 그 속에서 도드라지게 그 자리를 확보하게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되는데에는, 기독교의 배타성이 오히려 득이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종교들은 그저 그 종교에 adhere하는 정도로 충분했지만 기독교는 기독교 이외에 다른 것을 버리라고 요구받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독교의 탄탄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그 탄탄한 조직의 결속력이 기독교의 발흥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 장 역시 지금 시대에 의미를 주는 바가 많다.

사실 지금은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어떤 한가지의 종교적 가치가 세상 속에서 지배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한가지 다른점은 로마시대는 기독교가 ‘도전자’의 위치에 있었다면, 현대는 기독교도 그렇게 무너져가는 기존질서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너지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살아있는 생명력을 갖는 원래의 기독교인가 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일 무너지는 기존의 질서로서의 기독교와, 살아있는 생명을 갖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른것이라면, 지금의 상황은 로마시대와 비슷한 상황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 속에서 true Christianity가 타락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확실히 선을 긋고 그 타락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오히려 도전하는 방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true Christianity.에 유리한 구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말하자면, 확장, 포용 등의 접근을 하기보다는, 더 깊은 헌신, 세상 속에서의 대조(contrast)등을 강조하는 형식의 기독교가 더 드러나게 될 수 있다는 거다.

이것은 내가 늘 생각해왔던대로,
대조성이 강한 강소교회들이 지금 무너져가는 기독교 세팅에서 희망을 걸어볼 주체라는 것이다.

보통 교회에서나… 이런 얘기를 하면 대개는 사람들이 그렇게 공감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그냥 이해도 잘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긴, 여기 글에서 이렇게 쓴 것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뭐라는거야… 라고 생각하실수도 있겠다….

기독교의 발흥 (8)

8장은 그렇게 읽기 쉬운 장은 아니었다.
저자가 내게는 생소한 사회학적 개념과 여러 용어들을 사용했는데 내가 그걸 다 따라가며 이해하는건 좀 벅찼다.

순교와 희생이 합리적 선택이었다는 이 장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끙끙거리다가 문득 리차드 도킨스가 이야기한 ‘밈(meme)’의 개념을 가지고 이것을 이해하니까 연결이 되는 것 같았다.
(기독교서적의 내용을 리차드 도킨스의 개념으로 이해하다니… ㅋㅋ)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고난과 순교를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결정은,
그 가치에 충분히 헌신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 그것 자체로 그들에게는 보상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지켜지고 드러나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자주 그런 헌신과 순교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 ‘meme’은 전파되었다는 것.

순교가 기독교의 발흥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 관점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빡빡하게 여러 다른 연구결과들을 인용해가며 (비록 내가 다 이해는 못했더라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한 것은 여전히 내게 신선했다.

한가지 덧붙일것은, 초대교회에서 순교가 그렇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
여전히 배교자나 도망자가 다수였을 것이고 순교자는 대단히 소수였을 것.

참, 그리고 이 장에서는 예수님이 당대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순교라는 선택을 하는 것이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꽤 중요하게 다루어지기도 한다.

기독교의 발흥 (6,7)

6장과 7장은 그 당시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6장은 읽으면 꽤 재미있는 데이터들이 제시되는데,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기독교는 주로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들에서 빠르게 전파되었고, 그 전파되는 주된 경로는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다. – 어찌보면 대단히 새로울 것이 없는 결론처럼 보이기도한다.

7장에서 그려진 그 당시 도시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그 당시 도시들은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다섯배 정도의 인구밀도였다.
심지어는 초고층빌딩이 가득한 지금의 맨하탄보다도 높았다.
하수 시설도 제대로 안되었고, 매우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악취가 진동했다.
건물들은 허술하게 지어져 무너지기 일수였고, 화재가 한번 나면 도시 전체가 다 타기전까지 진압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지진이라도 나면 도시 전체는 모두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목적으로 도시들은 다시 세워지곤 하였다.

초기 기독교가 이런 ‘도시에서의 운동’이었다는 것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가장 치열한 삶의 자리로 기독교가 간 것이었다.

기독교의 발흥 (5)

5장에서는 기독교가 여성을 ‘인간’으로 제대로 대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존중되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이야기한다.

일단, 그 당시 로마는 여성을 사실상 남성의 소유물로 보았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은 태어나면 길에 버리는등의 영아살해가 많았다. 그래서 실제로 남여 성비가 매우 불균형적이었다. – 남성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수로보면 여성이 더 많았다고 추측된다.

그리고 기독교 내에서도 여성들은 리더십의 위치까지 맡을 정도로 존중받았다.

잉여 기독교 여성과 잉여 이교도 남성 사이의 결혼이 많았을 것이고, 그것이 초기 교회에 안정적인 2차 개종자 유입으로 이어졌다. (기독교 여성이 이교도 남성을 전도해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는 심각한 저출산의 상황이었는데, 그것은 남성 우선의 사회문화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당시 로마보다 훨씬 더 여성을 존중했기 때문에 저출산의 문제가 없었고, 기독교인들의 출산률은 더 높았다.

….

이 장에서는, 소위 ‘젠더 이슈’라는 사회현상을 기독교가 어떻게 다루었고, 그것이 사회에 대해 어떤 대안적 공동체로서 작동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젠더 이슈, 저출산…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이 당시 기독교는 그렇게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힘이 다 어디에 가 있는 건지…

기독교의 발흥 (4)

맨 처음 이 책을 읽어보겠다고 생각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책에서는 한 챕터를 역병(epidemic)에 대한 것으로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역병에 대한 챕터는 역시 나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었다.

AD165년에 역병이 돌았고 이 역병은 15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제국 인구의 1/3내지 1/4정도가 사망하는 대단한 스케일이었다.
그 후 AD251에도 역시 비슷한 스케일의 역병이 한번 더 있었다고 한다.정말 무지막지하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의학이 발달된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더 언급하겠지만 그 당시 로마의 도시의 위생상태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크게 발흥할 수 있었던 이유로 몇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 이런 역병은 그 당시 승승장구하던 로마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의 사상의 근본을 흔들어대는 사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로마사람들의 세계관으로는 이 역병을 해석해낼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 역병으로 인해 아프고 목숨을 잃는 것 뿐 아니라, 이 역병은 사람들의 사고체계도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역병 앞에서도 그것을 당당하게 해석해낼만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혹은 덜 두려워하고) 그것에 맞설 수 있었다.
기독교는 역병의 상황을 해석해낼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그래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던져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다.
기독교인들이 돌본 아픈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렇게 돌봄을 받는 기독교인들은 그 간호 때문에 사망률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의 사망률이 낮다는 것은 이교도들이 보기에 주목할만한 겉으로 드러나는 분명한 차이였다.
기독교인들의 사망률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 수를 더 보존할 수 있었고, 그렇게 드러나는 결과로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드러나는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이 상황에서 선행을 많이 한 것에 사람들이 감흥이 되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식의 분석에는 그렇게 큰 힘을 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

내가 속해있는 현대 교회는, 정말 세상이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 역병의 상황을 해석해낼 힘이 있는가?
내가 속해있는 현대 교회는, 역병 앞에서 드러나는 당당함이 실제적 열매로 맺힐 정도가 되고 있는가?

이 책에 따르면, 2세기의 교회는 흥하는게 당연했고,
21세기의 교회는 (적어도 내가 접하는 미국과 한국의 교회는) 망해도 싸다…

기독교의 발흥 (3)

이 책에서 또 한가지 흥미로운것은 초기 기독교인의 다수가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흔히 내가 배워온바에 따르면,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사도행전의 시대 (AD 1세기)를 거치면서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단절/분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실제로 초기 기독교 개종의 다수는 유대교에서 이루어졌고, 2세기가 지나서까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실 New Perspective 입장의 신학자들과 3rd wave historical Jesus 그룹에서 주장하는대로, 신약성경을, 특히 복음서를, 1세기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읽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과도 맥이 닿아있다.

이 책에서는 God fearer도 초기 기독교 개종자에 꽤 큰 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그룹도 역시 1세기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제대로 파악하는것이 가능할 것이다.

참 흥미로운 포인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