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18)

도대체 나의 부르심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세상에서 엄청나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성경이나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좋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도 아니고,
세상의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삶은 헌신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그냥 2021년에 실리콘밸리에서 살고 있는 엔지니어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은 그냥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일까.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이 내가 하는 고민의 요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10년도 훨씬 넘게 거의 매일 이 블로그에 글을 써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을 위해서 나름대로 책도 읽고, 말씀 묵상도 하고, 사람들과 나누기도 하고, 다른 의견들을 듣기도 한다. 글도 쓰고, 강의도 하고, 토론을 하거나 설득을 할때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다른 어떤때보다 평신도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때라는 것이다.

예전에 기독교가 assume하던 전제들이 세상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이때,
세상의 발전속도가 너무 빨라 기독교가 이제는 한참 뒤쳐져 있는 이때,
하나님 나라의 컨텐츠 자체가 세상을 해석해낼 기능을 상실해버렸다고 느껴지는 이때,

평신가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적용하는 장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복음의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장이 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생각도 많고, 쓸 이야기도 많은데,
거의 지난 한달동안 이렇게 쓴 것이 많지 않은 독자들에게 잘 전달할만큼 잘 정리된것 같지는 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살아가면서 이 내용들도 더 계속 update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일단 이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정리를 해보려 한다.

평신도 (17)

교회는 여러 삶의 정황속에 있는 평신도들이 세상과 소통한 결과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교회에서 복음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함께 나누고 배운다.
  2. 그 내용을 가지고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세상과 소통한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내가 옳다고 주장을 하면서 외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3. 2번에서 세상과 소통하면서 얻어진 결과들을 개인적으로 반추해보고, 그것들을 다시 교회로 가지고 온다.
  4. 함께 모여진 다방면의 삶의 영역에서의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내용 자체를 update 한다.
  5. 다시 1번으로 돌아가서 그 내용을 서로 나누고 배운다. 그 후 1~5번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나는 이런 과정을 아주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거쳐야만 비로소 지금의 기독교의 무지를 조금이라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1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하나님나라 복음의 내용” 이라고 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반복해서 그 “하나님나라 복음의 내용, 컨텐츠”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의 삶의 정황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적용하는 장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의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장인 것이다.

평신도 (16)

아주 창의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예술가에게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예술에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까?

하루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도태되고 낙오되는 치열함 속에서 살고 있는 월스트릿에 있는 사람에게,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경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3주앞으로 다가온 product launch에 맞추기 위해서 밤 늦게까지 컨퍼런스 콜을 해가며 아시아에 있는 공장과 이야기를 하고 아침 7시부터 다시 그 아시아쪽의 데이터를 분석해가며 전략을 짜야하는 엔지니어에게, 기독교가 innovation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도시의 빈곤문제와 범죄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한된 resource를 어떻게 분배해야하는가 하는 것을 치열하게 연구하는 공무원에게, 기독교가 빈곤과 범죄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까?

아주 난감하지 않은가?

기독교는 그냥 무식하다.ㅠㅠ

기독교가 이렇게 무식한 이유는, 소통할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에대해 기독교가 종교적 입장에서 해답을 줄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렇지만 세상의 문제들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이야기하는 교회의 이야기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러니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그나마 믿을만한 종교가 되는 것이다.
삶이 치열하지 않아서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절박함 속에서 초월성이라는 곳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위안받을 곳이 전혀 없는 사람들,
삶과 기독교를 철저히 분리해서 사는 사람들,
기독교를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

기독교는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해석해내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평신도 (15)

르네상스맨 (한국어로는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하나?)이라는 표현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의 일을 다 할 수 있었던, 다재다능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런 르네상스맨이 지금도 가능할까.
아주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어서 이야기할수는 없겠지만, 예전보다 훨씬 더 힘들것 같다.
왜냐하면 각각의 분야가 너무 급격히 발전을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공학을 오래공부했으니,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 정도쯤 되면 물리학에 대해 뭔가 좀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가끔 책이나 다른 글들을 읽으며 깜짝깜짝 놀랄때가 있다.
아… 내가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물리학의 지식으로부터 이제는 꽤 많이 더 발전된 것들이 있구나…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는 그래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소통 채널이 필요하다.
조금 더 뛰어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전문분야로부터 조금 더 확장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넓은 분야에서 여러 지식과 경험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커버할수 있는 영역이 그렇게 넓지 않다.

잘 알지 못한 채 뭔가 아는척 하면서 이야기하다보면…
똥볼을 차는 경우가 꽤 많다. ㅠㅠ
(이런거 요즘 정말 많이 보게되지 않은가!)

가령 예를 들어서…
나는 그냥 엔지니어다. 엔지니어중에서도 요즘 많이 뜨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아니고, 어떤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엔지니어다.
그런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만 형성되는 논리도 있고, 문제도 있는데… 그것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로 잘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또, 내가 하는 일이 medical device를 만드는 일이다보니, 의료계에 종사하는 분들과 접촉할 기회들이 조금 있는데, 이 분들은 또 사고방식이 나 같은 엔지니어와는 아주 다르다!

그러니, 예를 들면 예술가, 음악가, 육체노동자, 유치원 교사, 역사학자 등과 같이 내가 살면서 많이 접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는 얼마나 사고방식이 다르겠는가.

문제는 이 세상은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고 있고,
세상은 (정치, 기업, 경제, 문화)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복잡한 것을 그래도 꾸역꾸역 해석해가며, 분석해가며, 이용해가며, 그 속에서 살아남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면 그 사람들은 도태되니까. 생존을 위해서라면 죽어라고 힘들지만 그걸 해야하는 거다.

그런데 교회는 그러지 못한다.. ㅠㅠ

평신도 (14)

나는 바로 여기에서 지금 평신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교회는,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해낼만한 힘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세상을 해석해내는 힘은, 기독교가 그것을 해석해낼만한 충분한 컨텐츠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매우 크고 심각한 이유는 도대체 그 ‘말씀’이라는게 무엇인지, ‘말씀대로’라는게 무슨 뜻인지 하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 2021년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 엔지니어로서 살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건 내가 다니는 교회가 형편없는 교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지금 기독교가 그걸 가르쳐줄 컨텐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전의 전제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
그나마도 매우 급속히 바뀌고 있어서 그냥 그것만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게 느껴지는 세상…
그 속에서 교회는, 복음은, 기독교는, 그냥 멍하니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가 많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무지무지하게 많은데, 하루에 10분남짓씩 시간을 내어서 쪽글로 이렇게 시리즈로 글을 쓰다보니 뭔가 흐름도 자연스럽지도 않고, 논리적 정합성도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한 이 이야기를 계속 조금 더 써보려고 한다. 다음주에 계속)

평신도 (13)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레슬리 뉴비긴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데…
세상과 소통한다는 것은,
세상이 복음을 비판/평가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이 세상을 비판/평가하는 것이 주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으로 세상에서 돌아가는 것을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하기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해내는 힘을 사실상 다 잃어버렸다. ㅠㅠ

가만히 생각해보라.
사회적으로 중요한 담론이되는 이슈들…
사회적 불평등, 성적 불균형, 정치적 대립, 환경문제, 인종문제, 정의(justice)의 문제, 혁신(innovation), 현대 사회의 불안의 문제, 하다못해 지금 세계가 모두 함께 겪고 있는 팬데믹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이런 것들에 대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기독교계에서 무슨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입장에 따라 기독교의 옷을 입고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보수인 기독교인들은 보수가 기독교의 가치라고 외치고,
정치적으로 진보인 기독교인들은 진보가 기독교의 가치라고 외치는데…
그 속에서 기독교는 없고 그냥 정치 사회적 외침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독교가 세상을 해석할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그 힘을 찾아야 한다. 세상과 소통해가며 다시 그 힘을 찾아야한다.

평신도 (12)

세상과 소통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컨텐츠를 만들어간다는 모델이 특히 더 중요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이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교회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때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지난 2000년동안 꽤 성공적으로 그런 작업을 해 왔다.
사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거치면서 사회와 소통하며 그 컨텐츠 자체를 잘 update해온 종교는 기독교 이외에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사상과 흐름이 바뀌는데에는 물론 기독교가 영향을 끼친 부분도 당연히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지난 2000년동안 계속해서 세상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수용,비판등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왜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멈추어야 하는가?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그런 작업을 더더욱 적극적으로 해야할때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세상은 생존을 위해서 미친듯이 여러고민을 하여 그 흐름을 바꾸어가고 있고,
그래서 세상이 아주 빠른 속도록 바뀌어가고 있는데…
교회가 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과 소통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 교회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아주 깊게 고민하여 그 내용(contents)를 만들어 나가야할때라는 것이다.

평신도 (11)

지난 글에서 했던 세상과 소통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컨텐츠를 update해야한다는 것을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한 짧은 비디오 클립이 있다.
IFES (한국의 IVF, 미국의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의 Vinoth Ramachandra의 짧은 설명이다.

IFES는 학생들을 위한 단체이므로 engaging the university라고 해서 대학사회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가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것에도 잘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신도 (10)

하나님 나라의 컨텐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이 핵심이겠지만, 실제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살아가는 사람들이 채워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아마도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역사속에서 어떤 순간에는, 그리고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일부, 인종 차별이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가치와 병립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거나 심지어는 기독교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런데 그런 모든 사람이 피부색에 따라 차별받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은 어떻게 이제는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도 받아들여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세상속에서 진행되어온 사상의 흐름, 과학적 발견 등을 기독교가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아, 물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인종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개선하는데 기독교가 공헌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그런 관점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렇지만 인종문제에 대한 모든 토론과 연구와 실험과 투쟁등이 이루어졌던 주된 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벌어진 많은 내용들을 교회가 바라보면서 수용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 자신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수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이 흔들리지 않는 진리라는 사실을 약화시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든든하게 잡고, 그 주변의 것들을 유연하게 비판하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하면서 복음을 더 진지로서 잘 설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의 컨텐츠는, 한번에 주어지는 것이 분명 있지만, 때로, 그리고 매우 많은 부분, 세상과의 소통 속에서 update되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하고, 보완되거나 추가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평신도 (9)

흔히 ‘성경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대단히 이상한 개념들을 참 많이 들었다.
성경적 직업관, 성경적 가정, 성경적 남성/여성상, 성경적 정치, 성경적 재정관리, 성경적 데이트…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들중 아주 많은 것은 (거의 대부분이라고 쓰고 싶은 유혹도 사실 조금 있지만…)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답답한) 교회문화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성경적인것과는 별로 상관없이 형성된 교회 내의 하위문화의 산물로 만들어진 개념들을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사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매우 종요하고도 핵심적인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성경의 구절을 문맥과 무관하게 따와서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여보지만… 그건 엄밀하게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심지어는 그렇게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 가운데 대단히 폭력적이거나 몰상식한것들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성경은 삶에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제공해주는 책이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는 매뉴얼이 아니다.
성경에 서술적으로(descriptive) 쓰여져 있는 것을 규범벅(prescriptive)으로 받아들이면 너무 많은 왜곡이 생긴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런 왜곡이 얼마나 많이 있어 왔나! –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을 지지한다던지, 인권을 무시한다던지, 과학과 신앙을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던지…

그렇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제공해주는 원칙들을 구체적으로 채워나가는 작업이 있어야 하고…

나는 이것이 평신도가 해야하는 매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