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5)

어떤 사람이 어떤 개념을 믿고 산다는 것은, 그 믿고있는 개념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unintelligible)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중력을 믿는다.
그런데 만일 내가 중력을 의심한다면, 농구를 할때 껑충 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칫잘못하면 내가 그냥 껑충 뛰는 순간 그 힘으로 우주 밖으로 날아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안심하고 제자리 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중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중력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은 unintelligible 한것이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만 가능한 삶의 방식을 택하여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unintelligible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처절한 처형 끝에 삼일만에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 삶이 unintelligible한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의 당연한 norm이 되지 않는한,
이렇게 정치가 종교가 되는 것과 같은 nonsense는 계속 반복될 것 같다.

뜬금없이 하게된, 금년의 고난주간 묵상

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4)

가만히 생각해보라.

죽어서 천당가고, 살아서 복받는다는건 사실 대부분의 종교가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뭐 고등종교 뿐 아니라,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같은 것들도 결국 그거 비슷한것들 아니겠는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말에 대체로 동의한다.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은,
그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거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만족을 채워주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기독교는 정말 종교가 되어버렸다.
샤머니즘이 이야기하는 것과 그리 차이가 별로 없게 되어버렸다.

기독교가 종교가 되어버려서,
기독교와 정치가 부딪히니 정치가 더 상위의 개념을 차지할 여건이 만들어진것은 아닐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린 것은, 기독교가 종교가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3)

미국과 한국의 보수 기독교의 예를 들었지만, liberal한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수 기독교는 그나마 처음에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한것이라면,
liberal 기독교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종교을 색깔을 선택하여 안착한 것으로 보인다.
liberal 기독교에서는 보수 기독교와 좀 다른 방식으로 정치는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할만큼 내가 뭘 알지는 못한다. ^^

그런데 얼핏 생각한 것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가 contents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기독교가 이야기하는건 죽어서 천당가는 것과
세상에서 복받고 사는 것이 되어 왔지 않았던가.

그것 말고는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해 뭐라 할말이 없으니,
결국 기독교 밖의 contents에 의해 지배당해버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기독교가 소위 ‘성경적’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분야에 대해 한마디씩을 거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가정, 성경적 직장생활, 성경적 경제활동, 성경적 자녀교육… 등등이 얼마나 초라하고 shallow한가를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기독교가 세상의 가치에 대한 대안적 가치라면,
세상을 제대로 해석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죽어서 천당가고 살아서 복받는다는 것 가지고 무슨 수로 세상을 해석해 내겠나.

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2)

한국을 보자.
한국이 보수기독교는 일방적으로 극우적 정치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거짓말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보수 기독교 장로/권사님들이 던지는 카톡들이 얼마나 거짓으로 가득차 있는지…

사랑, 평화, 공의, 자비의 종교인 기독교인들이
혐오, 전쟁, 거짓, 차별을 지지하는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보수기독교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미국과는 그 내용이 좀 다른 것 같긴 하다.

미국 보수 기독교가 극우가 된것은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정치적 입장을 정했고, 그 후에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며 종교적 신념을 타협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반면,
한국 보수 기독교는 그 집단이 일종의 이익집단으로 변질해버려 그 이익을 지키는 정치적 선택을 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적 입장이 훨씬 더 흉하다.

어쨌든 한국의 보수 기독교 역시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지키면서 종교적 신념을 타협한 모습을 보인다.

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1)

종교(宗敎)를 한자로 쓰면 ‘으뜸되는 가르침’이 된다.
종교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궁극의 세계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그 종교에 제대로 헌신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하위 사상체계들을 지배하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하나의 정치진영/집단/정당을 지지하고 있다가도,
그 집단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대치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정치집단에 대한 지지를 거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요즘은, 적어도 한국이나 미국을 보면 그 반대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우선 미국의 상황을 한번 보자.

트럼프는 미국내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고 당선되었다.
그런데 트럼프 개인으로 보거나, 그 사람의 여러 정책들을 보면,
그것이 정말 기독교적이라고 보기에 대단히 어렵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처음 공화당을 선택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적 신념때문에 그들이 가진 종교적 신념을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고있다.

2019년, 교회 (13)

글을 시작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쓰다보니 정말 organize되지 않은 아주 난잡한 글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생각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들이 워낙 많아서… 그걸 좀 조리있게 풀어서 써내려가는게 아주 힘들다.

뭔가 좋은 질문들과 대화가 있다면 애매하게 풀어낸 이야기들을 clarify할 기회들이 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마도 이 블로그를 읽는 많은 분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닌건지… 내 글이 워낙 난잡해서 딴지를 걸만한 포인트를 딱 하나 골라내는 것이 어려워서인지…
하여간 online과 offline에서 많은 feedback들을 받지는 못했다. ^^
사실 웬만하면 내가 내 블로그 읽어달라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몇사람에게는 꼭 읽고 생각을 나누어달라는 부탁까지 했음에도 별로 말씀들이 없으시다. -.-;

그래서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무리하게 더 풀어서 쓰는건 일단 오늘로 맺어보려고 한다.

나는 뭘 잘 아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긴 하다.
그래서 교회를 생각할때마다 나는 많이 흥분하고, 또 많이 아프다.
이 허접한 글을 맺는 지금도 많이 그렇다.

2019년, 교회 (12)

나는 거의 10년쯤 전에 혼자서 여러생각을 하면서 만일 내가 지금 어떤 지역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두가지를 뽑아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1.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지역교회
  2. 그 지역교회내에서 서로 지체에게 헌신한 구성원들

로 정리했었다.

우선, 보편교회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지역교회라는 말에는, 그 교회가 믿는 신학을 포함한다. 사도적 전통에 근거한 교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신적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보편교회를 존중하는 자세는 coherent하게 함께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보편교회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지역교회라는 말에는 그 교회가 가지는 어떤 특정한 신학적 바운더리에 대한 기술을 포함한다.
그와 함께 그 교회가 스스로를 위해존재하는 교회가 되지 않는 다는 것도 역시 포함한다.
소위 어그러진 형태의 개교회주의는 이런 속에서 발을 붙일 수 없다.

그리고 두번째로 서로에게 헌신한 구성원이라는 것은 그 교회가 cosumerism을 배제하는 공동체 지향적임을 의미한다.
공동체 내에서의 투명한 거룩한 헌신이 norm으로 여겨지는 교회라는 의미이다.

나는 이런 교회가 결국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고 그 존재가 앞으로 20~30년 뒤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교회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19년, 교회 (11)

지난달에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던 교회의 한 친구가
‘느헤미야를 묵상하면 뭔가 공감이 안된다. 느헤미야는 너무 완벽하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한편 동의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그렇다면 왜? 라는 질문을 놓을 수 없었다.
이 본문은 왜 그렇게 느헤미야를 ‘넘사벽 영웅’으로 그리고 있을까?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내가 잠정적으로 머무르게된 생각의 지점은, 결국은 그런 헌신된 리더가 난세를 구해내는 pseudo-messianic story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아, 물론 뭐 어디 주석을 찾아보고 공부하고 그럴 여유가 있지는 않아서 혼자 한 생각이므로 그런 거 잘 아는 분들이 좀 가르쳐주셔도 좋을 것 같다.)

나 개인적으로도,
도대체 이렇게 교회가 무너져내리고 있는 시대에 도대체 어떤 break-through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면…
물론 하나님께서 하셔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결국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식은, 그래도 어떤 사람들이 더 헌신하고, 더 힘내고, 더 희생해서 이루어지는게 아니겠나 하는 대답에 이르게 된다.

느헤미야도 그렇고, ‘말과 함께 달리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명명하신 예레미야도 그렇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합리해보이는 수준의 헌신과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시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들의 불합리해보이는 헌신과 희생이 결국 어떤 break-through를 마들어 내게되고.

나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힘들고 어렵고, 그래서 헌신하면 더 힘들고 더 어렵지만,
그렇기 때문에 헌신과 희생이 더 불합리하고 영양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주어진 삶의 방식이라고 인식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어떤 사람들이 결국은 이 시대에 break-through를 낸다는 말이다.

나는 내가 지난 한주동안 열나게 설명했던 교회는,
그렇게 break-through를 내는 교회의 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힘들다, 어렵다, 두렵다 그러지 말고, 정말 똘기 넘치게 그렇게 용기내고 힘내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나름대로의 절박한 마음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교회로 보면 그렇게 불합리한 헌신을 하기로 결심하는 바보같은 교회들이 좀 있어야 하고,
그런 교회가 되려면 그 속에서 불합리한 헌신을 하기로 결심하는 바보같은 사람들이 좀 있어야 한다.

2019년, 교회 (10)

솔직히 말하면 이번주에 계속 쓰고 있는 이 ‘해답을 찾는 강소교회’가 내가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를 생각하면서 머리속으로 많이 생각해보는 모델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좀 해보면,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도록 내가 설명을 잘 못하는 모양이다. ^^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루이틀만에 뚝딱 해낸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오랜시간 많은 생각의 타래들을 엮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도식화해서 설명하는게 쉽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런 개념들을 이렇게 하루에 10분씩 시간들여서 쓰는 이런 허름한 블로그 글을 통해서 풀어내려니 그것도 참 만만치 않다. -.-;

그래서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도대체 저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 가능성이 많이 있는데, 그런 분들과도 좀 많은 대화를 하면 좋겠다.
내 글쓰기의 한계때문에, 제대로 잘 풀어내지 못하는 생각을 그런 대화들을 통해서 더 잘 한번 풀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있다.

그런데 그것도 만만치 않은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이런 대화를 하자고 하면 별로 반응이 없다. -.-; 그냥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아야 하는 건가 하는 좌절을 하게될때가 많이 있다. ^^

뭐 그래도 이렇게 한번 생각을 써보는 거지 뭐.

2019년, 교회 (9)

이렇게 해답을 찾는 강소교회를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선,
매우 헌신된 평신도 그룹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멤버가 모두 다 엄청나게 헌신되어있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치열한 고민과 사색은 그 중에서도 소수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전체가 그런 치열한 사색과 해답찾기가 우리 교회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는 동의가 있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내는 사람들을 더 배워나가려는 방향으로 함께 해야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여기서 헌신된 사람들이라는건, 교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활동보다는 세상에서 살아내는 치열함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헌신된 그룹은 어느정도 post-Christendom era의 신학에 대한 기초적인 학습이 되어있으면 좋다.
스스로 성경을 해석해내는 어느정도의 기초가 있어야 하겠고, 그 해석의 다양성과 입체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shallow한 교조적 해석을 넘어서는 고민이 가능하다.)
그리고 가령 Christopher Wright의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던지, Anabaptist들이 갖는 반체제성(?)과 현대 자본주의와의 긴장 등에 대한 insight가 있다던지,
신자유주의 체제의 한계와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있다던지… 하는 등의 신학적,인문학적 소양이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면 좋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런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context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것으로 여기고 함께 고민해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평신도들이 상황에 함몰되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격려하는일이 중요하지만, 또한 상황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단순화시켜버리는 우를 범하지도 말아야 한다.
계속해서 고민과 나눔을 격려하고 organize하고, 신학적 insight를 제공하는 일을 해야한다.

이런 교회는 아마도 대개는 의도하지 않게 ‘문턱이 높은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사색과 토론과 고민의 깊이가 깊을 가능성이 높고,
헌신의 모습이 radical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위 seeker-friendliness는 그런 의미에서 많이 포기해야할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모델이 작동하려면, 그 공동체안의 radical한 친밀함과 투명함이 필요하다. 서로 자신의 한계를 내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서로 잘못된 모습을 사랑의 마음으로 지적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가령 서로의 수입과 돈 씀씀이를 공개하는 것이 필요할수도 있고, (적어도 동의하는 소수만이라도)
어려운 상황속에서 살리기 어려운 모멘텀을 그런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헌신으로 돌파해내는 것이 가능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