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고민 (3)

내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꼭 지키고자 하는 원칙이 있다.
이것이 무슨 ‘온라인 공동체’같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서로 끈끈하게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 삶을 열어서 나누고… 그런거 하지 않으려했다.
그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경공부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꽤 반복해서,
이것이 교회를 대신한다거나, 실제로 살고 있는 지역에서 하는 소그룹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실제로 참석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사는 곳에서는 교회를 아예 나가지 않거나, offline에서의 다른 fellowship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이 성경공부가 그렇게 뭔가 ‘공동체’가 되길 원하기도 한다.
혹시라도 성경공부에서 살짝 자기 이야기를 나누면서 뭔가 살짝 끈끈함(?) 같은 것이 만들어지면, 그것 때문에 참 감사하고 좋아한다.

성경공부에서 유익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 성경공부를 일종의 ‘공동체’로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참 여러가지고 고민이 많다.

그렇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 성경공부는 그냥 ‘dry’한 본문 연구 모임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경공부 고민 (2)

우선 제일 큰 고민은 내가 벅차다는 거다. ㅠㅠ

사실 회사일이 너무 많아서 힘이 들기도 하고,
금년부터는 주중에는 아예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다보니 주말에 하게 되는데,
주중에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토요일 오전에 본문 연구하고, 주말 저녁에 성경공부로 시간을 쓰는게 그렇게 쉽지많은 한다.

이번학기에는 그래도 하루저녁은 좀 쉬어야 겠다 싶어서 토요일 저녁은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금요일 저녁과 주일 저녁 이틀 두 그룹 성경공부를 해야 했고,
그 시간에는 대개는 꽤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여서 빠릿빠릿하게 잘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성경공부를 위해서 준비하고, 나름 본문 연구하는 시간 + 실제 성경공부 하는 시간을 모두 합하면 한주에 7-8시간 정도 성경공부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셈인데,
이게 내 몸을 갈아넣어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살짝 들때도 있었다.

시간은 부족하고, 체력은 딸리고…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 많다.

성경공부 고민 (1)

COVID-19기간을 지나면서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온라인에서 성경공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다니던 교회 사람들 그룹 하나, KOSTA를 통해서 알게된 사람들 그룹 하나, 이렇게 두 그룹 성경공부를 2020년 가을부터 하기 시작했다.

나는 Covid가 금방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냥 몇달 이렇게 성경공부를 온라인에서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도 그걸 계속 하고 있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계획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그냥 되는대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어태껏 해 왔는데…
오래 하다보니 여러가지 한계과 문제들도 있고, 여러가지 고민도 하게되었다.

매 학기 이메일로 안내를 보내고, 신청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그 이메일 안내를 받아보는 사람들이 104명이고,
지난 6년간 한번이라도 성경공부에 참석 한 사람들이 92명이다.
그중 한번만 참석하고는 다시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매학기 신청해서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학기에는 함께 한 사람들이 조금 적은 편이어서 15명 수준이었지만,
많이 할때는 한번에 40명 넘게 신청을 해서 3 그룹으로 해야했던 때도 있었다.

고난주간 묵상 – 은혜

Tim Keller 설교중 매우 깊게 내게 남은 이야기.
(detail은 조금 틀릴 수도 있겠다)

비기독교인인 어떤 사람이 Tim Keller에게 기독교가 불편한 이유 한가지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신과 일종의 ‘거래’가 가능한 것이라면,
내가 헌신한 만큼 신에게서 복이 오는 관계라면,
내가 그 신에게 어디까지 헌신해야하는가 하는 기준이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이 일방적으로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는 종교이다보니,
일단 그 신과의 관계를 맺고나면 그 신 역시, 자신에게 무한정 요구할 수 있게될 것 같다는 말.

다시 말하면, 신으로부터의 은혜가 무한정이니,
자신의 헌신도 무한정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기독교가 불편하다고.

John Barclay의 Paul and the Gift의 내용을 이렇게 현실에서 잘 설명한 예가 있을까싶다.

나는 내가 복음에 조금 눈을 뜨게 되었을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은혜’라는 개념이었다.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던 내게,
그런 패러다임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 은혜는 여전히 내게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은혜는 내 삶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고, 지금도 흔들고 있다.

은혜는 정말 비가역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고난주간 묵상 – 시험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이후에 시험 받으신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이겨야겠다고 결심했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시는 선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예수님때문에 이제 나 같은 사람도,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것.

십자가의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고난주간 묵상 – 구속 (Redemption)

Penal substitution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한동안은 penal substitution 없이 십자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고,
penal substitution 없는 믿음을 나름 거의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나를 사셨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20대에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penal substitution을 이해하고 있긴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이 내게 새 생명을 주셨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어떻게 해도 내가 피할 수 없는 어쩌면 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살면서 내 죄에 대해 조금 더 민감하게 사는 시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도 궁극적으로 이걸 해결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명백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외에 내 망할놈의 삶을 회생시킬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
그렇게 나를 사셨다. 핏값을 주고.

이것이 얼마나 불편하든 간에,
이것을 피할수는 없다.

고난주간 묵상 – 헤세드

하나님의 사랑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전혀 다른 차원에 가져다준다.
작년, 나는 나 자신에대한 신뢰를 잃고 힘들어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몰려왔고,
부족한 내 모습에 깊은 절망을 경험했다.

어쨌든 살아보려고 나는 성경을 열었고,
반복해서 익숙한 본문들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또 익숙한 기도를 하고 하고 또 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냐 하는 것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

나는 내 감정의 기복에 따라서,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깊게 실망하거나 낙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 가시지 않는다는 것.

그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궁극적 표현은 결국 십자가다.

고난주간 묵상 – 새 창조

내가 처음 복음에 제대로 눈을 떴을때,
그 큰 스토리는 내가 쉽게 감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사셨다/구속하셨다는 이야기는 한편 대단히 감격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의 초대이기도 했다.
그것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 신비로움을 느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렵다고 표현할만한 감정도 있었다.

내가 새롭게 태어났고, 이제 내가 살아가는 삶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라는 것이 내겐 큰 흥분의 기쁨이었다.

나는 정말 새로운 사람이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났고,
여전히 내게 그 새로운 삶에 대한 것은 기대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예전과 같이 그저 막연한 기대는 아니다.
이제는 했더니 잘 안되더라…는 일종의 경험도 쌓였고,
무엇이 근거 없는 낙관이고 무엇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소망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도 약간 더 생겼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새로운 창조의 새 세상을 열어주셨다는 것만큼 흥분되는 소망이 또 있을까.

50대 후반의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말이다.

은퇴 (8)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부르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어떻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을까?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이야기하는것 처럼, 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셨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만한 무엇이 없다.
그저 내게 던져진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다.
20대에는 내 부르심이 무엇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내게 그런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냥 최선을 다 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그리고 여러 상황 속에서 많이 사색하고, 그 사색과 내 말씀 연구/묵상을 연결시켜 내 나름대로 발견하고 깨닫는 복음을 매일 재 발견하고, 기회가 될때 그것을 나누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이 은퇴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지난 2월 말은 로마서 8장을 묵상했다.
그 속에서 이런 부르심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도 하고 내 생각과 마음을 다시 추스려볼 수 있었다.

아마 나는…
내 삶을 즐기기 위해 은퇴를 선택할것 같지는 않다.
그럴만큼 내가 충분히 돈이 많은 것도 물론 아니지만.

아마 은퇴를 한다면 그 속에서 또 다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그냥 그렇게 내게 던져질 것 같다.

내가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내가 살아기기 보다는,
그저 그렇게 내게 던져져서 나는 피동적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은퇴 (7)

나는 젊을때 힘들게 일해서 돈을 모으고,
은퇴한 이후 그냥 모아둔 돈을 쓰면서 지내는 삶의 모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퇴하고 그동안 못했던 것을 하자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은퇴를 한 이후 얼마동안 더 살 수 있을까?
아주 길면 30년까지도 될 수 있지만,
짧으면 은퇴 이후 몇년, 그냥 평균적으로 생각하면 한 10여년 더 살게되지 않을까 싶다.

10년여년 정도라면, 그건 정말 금방이다.
적어도 내가 보낸 최근의 10여년을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다.

그러니 은퇴를 엄청나게 기대하거나 은퇴를 대단히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은퇴 이후에 겸손하게 내 한계를 인정하고, 여전히 더 깊어지면서, 사랑과 지혜가 쌓여가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살짝 은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