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3)

나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나는 일반적인 성품이 모범생이니, 어려서부터 교회에 잘 빠지지 않고 다녔다.

어릴때 교회는 참 재미 없었다.
설교는 늘 지루했고, 배우는 내용은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교회에 매주 다녔다.

어릴때 배웠던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로 시작해서는 그 다음부터는 원하는 것을 주루룩~ 리스트로 만들어서 요구하는것이 기도라고 배웠다.
심지어 내가 대학생때였던가… 소위 기도 응답노트라는 것도 만들어서 응답한 기도들을 적는 ‘믿음 좋은’ 친구들도 주변엔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는 그렇게 잘 들어주지 않으셨다.
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들도 별로 그렇게 잘 들어주시지 않았다.

나는 대학교 3학년때쯤 일종의 회심의 경험을 했다. 복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고, 내 삶을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내가 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잘 응답해주시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응답해주시고…
내겐 그런일이 별로 없었다.

기도 (2)

오 할레스비가 그랬던가.
기도해서 구하지 않았는데 소중한 것이 주어지면, 그 주어진 소중한 것은 그 사람에게 독이 된다고.

사람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얻게 되었을때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자연스럽게 돌릴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떤 소중한 것을 얻으면 그것이 자신이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그것으로 인해 더 교만해지고, 그건 그 영혼에게 독이된다.

뭐 이런 식의 논리였던 것 같다.
아, 참 멋진 말인데…

그런의미에서 보면 나는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해야하는 것 같다.
우선, 나는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별로 하지 않는다.
(아, 구하는 기도를 하는데, 내게 무엇을 달라던가 하는 식의 기도를 별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나는 많이 교만하다. -.-;

내가 교만한 것은, 내가 평소에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내 필요를 구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도 (1)

자주는 아니지만, 정말 기도가 필요할때 내가 가는 곳이 집에서 45~50분 정도 떨어져 있다.
약간 뜬금없이 이 동네에 한국사람이 하는 ‘금식 기도원’이 있다.
완전 오순절 스타일의 예배도 드리고… 그러는 곳인데…

정말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낄땐 그곳에 가서 조그만 방 하나를 빌려서 혼자 한 반나절 기도하다가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한지도 몇년이 되었네…)

Redwood가 많이 서 있는 산 속에 정말 허름하게 있는 곳인데,
방에서 기도하다가 잠깐 나와서 산 속에서 산책을 하고, 다시 방에 들어가 기도하고…

돌이켜보면 그렇게 가서 정말 기도를 찐하게 잘했다고 느꼈던 적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어쩌다 한번씩 그렇게 기도를 하다가 기도가 열리는 일이 가끔씩 있다.

예전에 Boston에 있을때는, MIT 66동 건물 지하에 아무도 오지 않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이 내 비상 기도실이었다. ^^
옆에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고 깜깜하고 그런데… 기도해야겠다 싶을때 그곳에 가서 한 10분이라도 기도를 하고나면, 정말 한 10번중 한번정도 기도가 열리는 경험을 했었다.

별로 성공확률(?)이 높지도 않은데, 그렇게 가끔씩 기도가 잘 되었던 장소들을 내 나름대로 나만의 기도장소로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적어도 내게 있어 기도가 그렇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 기도의 거의 대부분은 그냥 쓰레기통에 바로 들어갈만한 기도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기도를 한다고 느껴질때가 있고,
그런 경험이 이 찌질한 내 기도를 그래도 붙들어주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분들은 기도를 하기만 하면 완전 깊게 하시고, 신비로움도 경험하시고… 그런다던데,
나는 그저 이렇게 지지부진한 기도 속에서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찾아가곤 한다.

부채의식

바울은 참 독특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인 것 같아 보인다.

낮에는 텐트를 만드는 사람으로 일하고, 밤에는 전도를 하는 삶을 살기도 하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격렬하게 토론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갈길을 가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그것 때문에 매도 맞고, 조난도 당하고, 감옥에도 갇히고… 그야말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이게 내가 해야할 일이다’라는 것이 정해졌을때 타협함 없이 쭉~ 직진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중에서도 참 독특한 것은 바울이 가졌던 부채의식이다.
내가 복음을 받았는데,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그 부채의식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평생을 살면서, 포기하거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쭉~ 직진하면서 역경을 견뎌내어야하는 것도 있을 텐데…
바울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것이 이 부채의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꼰대 (5)

꼰대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상황이나 배경에 무관하게 강요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반대는,
자신의 생각을 아무에게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사람이 리더나 멘토의 위치에 가면 훨씬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꼰대는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라도 하지.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는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고, ‘착하고 옳은 소리’만 계속 하는 리더를 상상해 보았는가?

매일 웃으면서 착하게 살아라. 교통법규 잘 기켜라, 친구랑 싸우지 말아라… 정말 착하고 옳은 이야기만 하는 nice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이끌어 리드할 수 없다.
그냥 그 사람은 착한말 위키피디아인거다.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꼰대인 경우와 착한말 위키피디아인 경우 두 가지를 놓고 생각해 볼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꼰대가 낫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어느 정도까지겠지만…

꼰대 (4)

내가 생각하기에,
일반적인 인생의 지혜는 말할것도 없고,
특히 신앙의 성숙에 관한 한, 그 길을 먼저 걸어갔던 사람으로부터 배우는것 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사람마다 필요의 차이가 있고, 또 상황에따라 그런 멘토십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분명히 많다.
그렇지만 정말 사람들을 돌볼줄 알고,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신앙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다.

그리고, 먼저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건 자신이 얻은 지혜를 따라오는 후배들에게 나누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며 얻었던 지혜는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그것을 나누는 것은 일종의 ‘빚’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선배들은 꼰대로 몰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을 후배들을 위해 내어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의 후배들은, 때로는, 의사소통 방식이 꼰대와 같이 느껴지는 선배라 하더라도,
그들로부터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 거의 필사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꼰대’라는 label은 가능한 멘토십을 약화시키고 그나마 있는 멘토십 조차도 무시하거나 거부하게될 위험이 있다.

꼰대 (3)

나는 고등학교가 3기, 대학교가 2기여서 선배가 별로 없었다.
공부하는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대학교 3학년때 복음에 눈을 뜨고나서는 이 어마어마한 것을 좀 따라 배울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주 절실하게 내가 따라 배울 사람들을 찾았었다.

어떤 분들은 참 배우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 있었고, 어떤 분들은 가까이 있었지만 따라 배울 만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몇년에 걸쳐 참 고마운 신앙의 선배들도 그래서 좀 만날 수 있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미친듯이 책을 찾아 읽어 책을 통해 얻은 간접 지식들도 쌓을 수 있었다.

내가 선배를 찾았던 것은 꽤 절실할때도 있었다.
내가 발견하기 시작한 이 복음의 신비를 나보다 조금 더 고민해본 사람들과 치열하게 대화하면서 배워보고 싶었다.

그때 나는, 누가 내게 그 사람의 생각을 좀 강요해도 좋으니, 그래서 내가 많이 불편해도 좋으니, 그래도 누가 내 선배가 되어 주길 많이 원했었다.

다시 말하면 누가 내게 꼰대질을 해서라도 내가 성장에 이르도록 도와줬으면 하고 바랬던 것이다.

꼰대 (2)

젊은 세대가 꼰대를 극혐하는 것과 대비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멘토’를 찾는 다는 것이다.
이게 지금의 20대까지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대로는, 지금의 30대까지는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얼핏 생각하면 꼰대는 권위주의적이고, 멘토는 공감하며 끌어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권위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내용보다는 형식에 달려있어보기도 하다.
사실 대화하는 내용은 결국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다만 그 형식을 부드럽게 하고 약간의 feedback 받는 여유를 남겨두면 그런 사람들은 꼰대로 여겨지지 않기도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는 내용은 일방적이지 않은데 이야기하는 방식이 권위적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은 그냥 꼰대가 되어버린다.

이게 어떤 사람의 조언을 받는 입장에서도 구별하기 어렵지만, 어떤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경우에도 내가 이렇게 하면 꼰대가 되나 하는 것을 구별해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실제로 내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만나 보았고,
왜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공격적으로 이야기를 할까 하면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도 만나 보았다.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냥 어떤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고 내용을 잘 전달하는 일종의 대화의 기술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꼰대 (1)

꼰대는 요즘 일종의 극혐의 대상이다.
권위주의적인 어른을 비하하는데 사용하는 단어인데, 요즘은 ‘젊은 꼰대’라는 말도 있으니 이게 반드시 어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꼰대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 일종의 비하의 언어여서 그 말을 쓰는 것이 내게 편하지 않다. 그리고 누구를 꼰대라고 몰아버리는 문화가 반드시 건강한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기선 어쩔수 없이 꼰대라는 말을, 가능하면 비하의 의미를 빼고 써보려고 한다.

나는 80-90년에를 한국에서 보냈고, 한국에서 대학원과 직장생활을 했으니 분명히 내게 꼰대질을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경험이 있다. 미국에 와서도 여러 세팅에서 꼰대들을 많이 만났다.
한편, 이제 내가 50대가 되었으니 나도 점점 꼰대가 될 가능성이 많은 나이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꽤 어릴때부터 그냥 ‘어린 꼰대’로 여겨질수 있는 성향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릴땐 이런걸 ‘리더십’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자칫 잘못하면 꼰대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꼰대질을 하기도 하는게 분명하다.

나는 꼰대를 정말 극혐했다.
내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때, 직장생활을 할때, 정말 내 주변에는 꼰대들이 넘쳐났다.
내가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오겠다고 결심했던 이유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했다.

나는 왜 그렇게 꼰대들을 못견뎌 했을까.
내 주변 친구나 동료들 가운데에는 꼰대들 밑에서 훨씬 더 잘 견디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람들 관계 잘 관리해가며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그렇게 힘들어 했을까.

내 20대에는 그런 꼰대들을 못마땅해하는 감정이 나를 몹시 힘들게한 것이었다.
한편 그런 사람들이 싫어서 힘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는 나를 보며 그 모습이 싫기도 했다.

기독교의 발흥 (10)

마지막 10장은 매우 짧다.
‘미덕’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냥 쉽게 얘기하자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핵심적 가치들/미덕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거다.

여기서 구분해야할 것은, 기독교가 만들어내는 subculture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핵심적 가치 자체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기독교가 매력적이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세상에게 매력적임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기독교의 subculture를 매력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데… (seeker-friendly church같은…)


이 책을 다 읽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고, 어떤 부분은 살짝 좀 어렵게 느끼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다닥 넘기며 읽을만큼 대단히 ‘매력적인’ 책이었다.

2020년도 이제 5월 중순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어쩌면 이 책이 내게 2020년에 읽은 최고의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참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분들에게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