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6)

이것이 아주 일반적으로 맞아들어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대충 생각하기에
– 부흥의 시기에는 대단한 양적 팽창이 이루어지고
– 침체의 시기에는 그 양적 팽창의 부작용을 해결하고, 다음 양적 팽창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축적된다고 본다.

그것은 사실 많은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이 그렇다.
경기호황과 침체의 사이클이나, 엘니뇨와 라니냐의 사이클도 그렇다.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자각하고 부르짖은 대로 침체의 시기에는 정말 제대로 망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침체의 시기에 많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깊어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5)

부흥의 시기에 대하여 사람들이 갖는 일종의 환상은 그 시절이 완벽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절대로 그럴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시기에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게 하시는 것이긴 하지만 대부흥의 시기에도 교회에 들어오는 소매치기가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침체의 시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력이 있다.
심한 침체의 시기에도 어디엔가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디엔가는 깊고도 싶은 신앙과 신학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는 그래서 크게 보면 cycle로 돌아가는 것이고,
각각의 시기에 다른 역할로 하나님 나라가 지탱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침체의 시기에 해야하는 일은 부흥의 시기를 사모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 침체의 시기에 감당해야하는 일들을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4)

부흥의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꼰대’가
침체의 시기를 지내고 있는 후배들에게 흔히 해주는 말들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상처가 된다.

너희가 헌신이 부족해서 그렇다 라던가…
왜 믿음이 없느냐 라던가…
조금더 노력하면 된다 라던가…

나도 정말 참 많이 듣는 소리다. -.-;
그런데 또한 내가 많이 하는 소리인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깃발만 꽃으면 순식간에 사람이 몇백명씩 모이던 시절에 복음을 전했던 전도자들은,
1000명에게 복음을 전해도 한두사람 들을까 말까하는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침체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역자들에게 참 많이 해야하는 이야기는
‘힘내라’ 라던가
‘더 헌신해라’ 라던가
‘믿음을 가져라’ 라던가
‘용기를 내어라’와 같은 이야기라기 보다는…

‘괜찮아…’ 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괜찮아’라는 말로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러나 괜찮아 라는 말을 충분히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건 그들을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굳이 잘못을 찾자면 부흥의 시기를 지났던 선배들에게 있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3)

그런데 지금은 침체의 시기임이 분명하다.

예전에 했던 방식으로 하면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유효기간이 지난 약을 먹는것과 같다.
예전에는 그 약만 먹으면 바로 팍팍 효과가 있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혹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주 희미하다.
심지어는 그 약의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전도를 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공동체는 성장하지 않고, 사람들의 헌신이 그쳤다.
헌금은 줄어들고, 찬양의 소리는 작아지고, 기도는 짧아졌다.

내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사역에서 경험하는 일이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2)

내가 속한 공동체의 경험이나 내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내가 부흥의 시대를 살았다고 이야기할수는 없을 것이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가지 다른 생각들이 있지만….
적어도 내가 부흥의 시기를 거쳤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나는 정말 아주 강력한 복음의 영향력아래 놓이게 되었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그런 경험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게 그저 내가 속한 공동체만의 현상이 아니라 한번도 접점이 없던 다른 공동체에서도 그런 일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말 아주 말도 안되는 논리로 ‘복음을 전하’고 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사방에서 그 복음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선교사로 삶을 드리는 사람도 많았고, 자신의 커리어 선택을 급격하게 변경하는 사람들도 정말 흔했다.
교회 안에서 평생 그 복음을 가지고 살고, 복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살고, 그 복음을 전하면서 살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나는 그때는 그게 그냥 당연한 것인줄 알았다.

정말 기도하고 성경공부하면 복음을 모르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예수를 믿는 것이 당연한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기도하고 헌신해서 어떤 공동체를 시작하면, 그 공동체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단기간에 성장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삶을 정말 제대로 드리고 온전히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option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이지, 그저 듣기만 하면, 제대로 이해만 하면 당연히 줄줄이 믿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경험들이 그러 했으니까. 내 80년대와 90년대의 경험은 정말 그러했으니까.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1)

교회의 역사는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를 거친다.
여기서 부흥의 시기라 함은, 양적 팽창이 많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이야기하고,
침체의 시기라 함은 양적 수축이 일어나는 시기라고 단순화 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부흥의 시대’에 내 20대를 보냈다.
그렇게 ‘부흥의 시대’를 보낸 것은 내 신앙과 신학에 당연히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실제로 별것 아닌 말을 가지고 사람들이 회심하는 일들을 경험했고,
아주 서툰 방법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쑥쑥 성숙해가는 일을 경험했다.
참 별것 아닌 설교에 사람들이 감동하고 그것을 통해 헌신하는 것도 보았고,
아주 작은 모임이 순식간에 몇배, 몇십배로 커지는 일들도 경험했다.

그런데,
지금이 ‘침체의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
그것은 한국 교회도 그렇고,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의 한인교회도 그렇고, 미국교회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부흥의 시대를 젊은 시절에 경험한 사람으로서,
침체의 시대를 사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내 기도는 끊임없이 lamentation이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7)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정말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마치 아직 무엇이 덜 이루어진 것 같이 생각될때도 있지만, 이제 정말 다 이루셨다. 죄에대한 궁극적 심판도, 내 죄에 대한 속죄도, 피조세계의 회복의 시작도, 이제 다 이루어졌다.

이제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세상이 감히 상상할수도 없는 소망이 주어졌다.

부활절에는 이제,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마음껏 죽음을 향해 조롱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나의 나된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것이다. 주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나에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주님께서… 정말… 다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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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몇가지 내가 몇가지 더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다음의 것들로 환원(reduce)시켜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지식으로 환원하지 말자.
한국 교회의 몰락을 보면서, 복음주의의 쇠퇴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 해결책을 자꾸만 knowledge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을 많이 반성했다. 물론 지식을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을 해결책으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리게되고, 따라서 매우 절망적인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passion으로 환원하지 말자.
비록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직도 참 많이 미숙한 수준이긴 하지만… 주님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고 싶은 깊은 열망이 내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열망(passion) 혹은 헌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말해야한다는 당위 혹은 윤리적 강령으로 기독교복음을 바라보고자 하는 ‘습관’이 내게 깊이 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passion이나 헌신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 identity를 define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일주일동안 묵상하면서, 내 생각의 중심이 많이 ‘나’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늘 나밖에 생각할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런 경향이 더 심화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그분’께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매우 인본주의적인 (그래서 어쩌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짓 복음으로 내가 함몰되어 가기 쉬운 것 같다.

보통은, 운전을 하면서 audio book을 듣거나, podcast를 듣거나, 설교를 듣곤 하는데, 이번주에는 헨델의 메시아를 듣게 되었다. 아… ‘할렐루야’ 코러스가 터져나오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함께 터져나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전투적 그리스도인, 성경 연구자, 사역자, 하나님 나라 일꾼… 그런 가치들이 정말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저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정말 그 모든 것을 통합해내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예수께서는, 내 모든 것을 드려 찬양드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6)

누가복음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참 길고 긴 하루가 마무리 되고 있다.

목요일 밤에 붙잡히신 후에, 밤새 고문을 당하시고, 새벽녘에 엉터리 졸속 재판을 받으시고, 또 다시 각종 모욕과 극심한 고문을 당하시다가 “해골 언덕”에서 나무 십자가에 대못으로 몸을 박아버리는 잔인한 처형을 받으시는… 정말 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다.

온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모두 담당하시고, 어그러진 세상을 다시 제대로 만드는 광대한 작업의 시작이 이제 완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신다.

십자가의 외로운 처형을 경험하시면서 참 아버지가 많이 보고싶으시지 않으셨을까.
만세전부터 함께 하였던 그 아버지와의 fellowship이 참 그럽지 않았을까.
이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마치 끊긴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인데.

금요일 낮시간이 지나면서는, 예수께서는 이제 고통을 소리쳐 표현할 힘도 다 없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내 옛 사람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깊이, 아주 깊이… 눈물과 함께 내 마음 속에 담고 싶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5)

요한복음 19:28
“목마르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것은 시편 69편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정말 목이 마르셨다.

우리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하필이면 왜 이런 육체적 고통이었을까? 꼭 이렇게까지 잔인한 처형 방법이어야 했을까?

물론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죄의 consequence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마 십자가 처형보다 더 잔인한 처형법이 그 당시 로마 제국에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 방법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가, 십자가에 달려있는 33살 청년 예수의 몸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때, 정말 내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밝히 드러나면서, 정말 어쩔줄 몰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이제는 죄가 싫은데… 그것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내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기억들.

다른이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왜 그렇게 다루어지기 어려운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랑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왜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에 목매고 있는 것인지.

내 자존심을 꺾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품는 것은 왜 그렇게 힘이드는지. 왜 나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을 그렇게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지.

각종 음란함은 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것인지.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는 것과 같은…

이런 내 안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시는 육체적 고통에 담겨있다.

내가 내 sinful nature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때 마다, 그리고 그것과 타협하고자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처절한 고통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타협하고자 하는 이 죄 의 결과는 예수의 십자가 고통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토록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는, 그것을 토닥거리며 함께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꾸 드러내고, 토설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겨내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더 선명할수록, 죄를 다루는 내 모습이 더 당당해지는 것 같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4)

마태복음 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라고 누가 썼다면,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 첫 구절을 가지고 노래 전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의 맨 끝자락에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대학 때 소위 ‘대동제’라는 곳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풍경도 생각이 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르는 clip으로 선거운동을 했던 것도 기억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노래의 첫 구절은 그 노래 전체를 떠올리게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노래와 얽혀있는 여러가지 사건, 사상,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구절은 시편 22편의 첫 구절이다.

시편 22편은 그 내용을 읽어보면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는 시편 기자가 절규하는 내용,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내용, 그리고 궁극적으로 승리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예수께서 이 시편의 첫 부분을 인용하셨던 것은, 지금 그 시편 22편의 첫부분 즉 극심한 고통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악(원수)에 대한 궁극적 심판이 곧 있게 될 것과, 예수께서 이루실 승리,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이어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하며… 그리고 궁극적인 악에대한 심판과 승리를 곱씹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는… 어쩌면 이렇게 시편 22편을 곱씹는 것 만큼 좋은 다른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 예수의 외침을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이야기를 하는 등…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이 그리고 있다.

십자가의 예수는… 정말 그렇게 고통스럽게, 외롭게, 그러나 소망을 생각하며 십자가에서 바짝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