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5)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같이,
기독교가 세상의 어떤 가치들을 선호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매우 자주,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을 우리에게 두지 않는 우상의 거부의 행동일 수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기독교는 그 시대의 권력을 잡고있는 어떤 가치나 사조, 체제나 경향들과 싸우게 되기 쉽다.
그것들이 그 시대의 우상이 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우상을 거부하는 기독교,
기독교 다운 기독교의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는….

어항 속의 물고기가 그 어항의 물을 거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나타낼수도 있다.

때로 무엇과 싸워야하는가 하는 것을 분별해내는 것도 매우 어렵고,
설사 그 싸워야 하는 대상을 분별해 내었다 하더라도 그 대상과 어떻게 맞서는게 가능해?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어쩌면 십계명의 제 1계명조차도 무시하는 엉터리 기독교가 되어버려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있어 중요한 장애요인은…
게으름이다.

지금 이 정도면 됐지… 내가 배워왔던 기독교면 충분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죽어있는 종교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이 보는 기독교의 모습인지…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4)

기독교가 계속해서 거부할만한 것들은 분명히 있다.
폭력, 미움, 죄, 음란함, 탐욕 등등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기독교가 거부하는 것들이아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는 이런것들까지도,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18세기 조선에서 지금과 같은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큰 물의를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 기준등을 적용해 보았을때 피해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다.

이게…
수영복과 같이 비교적 쉬운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더 많은 것들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령,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우파를 지지해야 하는가?

20세기 중반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폭력이 사람들을 억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공산주의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선택 중에서 우파를 지지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삼아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폭력에 대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싸워야하는 우상이, 공산주의의 어그러진 이상주의와 그로인해 비롯된 폭력이라면, 제한적으로 정치적 우파를 지지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에는 어떤까?
지금도 공산주의가 현대세계가 싸우고 있는 주된 우상인가?

그런 완전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지금 현대 세계가 싸워야하는 우상은 오히려 이념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체제 안에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탐욕, 쾌락추구,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폭력성 등등이 싸워야하는 더 큰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정치적 우파가 기독교 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도 잘못된 일이다.

이처럼,
어떠한 우상도 타파하는 기독교가 그 기독교적 생명력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대상은 고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떤시대에는 공산주의의 폭력이었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그것이 자본주의의 폭력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3)

반면 기독교가 권력을 탐하거나,
그 권력의 일부가 되어버리거나,
권력의 하수인이 되거나,
권력 자체가 되어버릴때 기독교는 침체되었고,
오히려 세상에서 암적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주 단순히 이야기해서,
우상숭배를 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고, 권력과 친구가 되어버리는 것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을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세상의 강력한 권력이 점점 사람들에게 우상이 되어가고 있을때,
그것을 싸워야할 대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무지(ignorance)역시 기독교를 병들게하기도 하였다.

가령,
기독교가 공산주의의 폭력과 싸운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 반공 자체가 기독교와 일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채, 극렬한 반공주의를 이야기하는 극우의 사상과 결합한 것은,
내 생각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현대 기독교가 이런류의 무지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편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2)

언제 기독교가 정말 기독교 다웠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어쨌든 어떤 사회 속에서 그 사회가 숭배하는 ‘우상’ 혹은 ‘권력’과 맞설때 였다.

하나님 아닌 인간이 만든 것들을 숭배하는 종교적 사회적 권력에 맞서기도 했고,
기독교의 껍질을 쓴 종교권력에 맞서 개혁과 혁명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실제 정치 권력에 억업받는 사람들과 함께 정치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일들을 하기도 했었다.

언제나, 모든 기독교가, 이 모든 권력들에 대해 항상 저항하고 불화했던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종파나 신학적 입장에 따라,
혹은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기독교가 어떤 권력과 그렇게 맞설때 기독교는 기독교 다웠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도,
보수 기독교는 종교적 우상숭배라는 문화적/사회적 권력과 맞서 싸웠고,
진보 기독교는 정치적 경제적 폭력이라는 철퇴를 휘두르는 권력과 맞서 싸웠다.

그런 싸움들이 모두 다 건강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 싸움들이 모두 정당했던 것도 아니다.
또, 그 싸움들이 모두 하나님이외에 나머지 것들을 상대화하는 기독교 근본으로부터 출발한것도 아니었다.

유대종교권력과 맞선 기독교,
로마 제국과 맞선 기독교,
중세 종교권력과 맞선 기독교,
인본주의 철학사조와 맞선 기독교,
굳어있고 죽어있는 신학 사조와 맞선 기독교,
히틀러와 맞선 기독교,
인종차별에 맞선 기독교,
가난과 싸운 기독교,
병과 싸운 기독교,
개인적 죄의 문제와 맞선 기독교,
3.1운동의 기독교,
공산주의의 폭력에 저항한 기독교,
독재정권에 맞선 기독교,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기독교

기독교는 참 매력적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1)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는 상당히 고약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을 절대화 하고 전 우주의 나머지 모두를 다 상대화 해버린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추종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으면, 당장 기독교는 그것을 견제, 정복,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버린다.

아니,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가 그것들을 견제, 정복,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버려야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독교는 그렇게 충분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우상이란 좋은 것을 절대화할때 나타난다.
가령, 가족은 좋은 것이지만 가족을 절대화하면 가족이 우상이 되어버린다.
사회정의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절대화하면 그것 역시 우상이 되어버린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아주 매료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제외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니,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본질상,
권력에 저항하는 성질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정치적 권력이든, 종교적 권력이든, 경제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말이다.

Praying for my daughter (2)

민우는 우리 부부와는 다른점이 참 많다.
우리 부부보다 훨씬 더 creative하다.
뭔가 계속 쪼물쪼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뜨개질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작은 모형을 만들고…
그리고 글을 쓰고, 공작을 하고…

일단 나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오랫동안 어떤 창의적인 일을 할만큼 참을성이 없다. ㅠㅠ
빨리 해야하는 일을 해치워야하는 성격이어서, 민우처럼 오랜시간 자신이 만들어내어야 하는 것에 정성을 쏟는 일을 하지 못할뿐 아니라 한 경험도 거의 없다.

그리고 민우는 우리부부보다, 최소한 나보다 훨씬 덜 분석적이다.
이게… 덜 분석적이라는 것이 분명 단점일수도 있을 테지만, 장점이 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민우가 덜 분석적이라고 쓰는 것 말고는 더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다. ㅎㅎ

대신 민우는 더 사람에 대한 compassion이 많다.
어떤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작은 상처라도 주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가령 내가 민우와 함께 어떤 물건을 사러가서, 그 점원이 빠릿빠릿하게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불편함을 표시하면… 민우는 그것을 매우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혹시 함께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내가 tip을 충분히 놓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자기 지갑을 뒤져서라도 tip을 더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다.

뭔가 나와 비슷하면 그래도 내 생각의 흐름이나 내 경험등이 민우에게 도움이 될만한 조언과 대화를 조금 더 많이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민우의 전공도, 진로도, 성격도 나와는 많이 다르니…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도 그렇게 앞으로의 경험은 더더욱… 내 경험과는 많이 다를 것이니..
내가 어떤 아빠가 되어야 민우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이 많다.

Praying for my daughter (1)

지난주에는 민우 졸업식으로 아틀란타에 다녀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covid-19으로 학교생활의 많은 부분을 비정상적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 잘 했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감사했다.

Conan O’Brien이 Darthmouth의 졸업식 축사를 하면서,
“여러분 자녀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곳은 고대 그리스뿐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우리 민우가 딱 그렇다.
민우는 Enligh literature와 theater를 복수전공했다.
나 같은 공돌이 생각에는…
음… 이거… 어디에 써먹는 거지? 싶은 생각이 들때가 많이 있다.

나는 고등학교를 입학한 이후에, 뭐 진로 고민… 이런걸 조금 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뭐 먹고 살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한적은 거의 없었다.
그냥 내게 주어진 일들을 아주 열심히 하면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앞길이 열리는 분야로 전공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우는 그게 아니다.
이건 졸업을 하고나서도, 여러가지로 다양한 option을 놓고 고민을 해야하는 상황이다.
민우도 딱 뭘 해야하는지 고민도 많은 것 같고,
정말 하고 싶은 것과, 현실적으로 어떻게 돈을 벌고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 사이에 여러가지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어쩌면,
나와 내 아내는 해보지 않은 고민을 민우는 하게 되었고, 하고 있는 것이다.

New Year’s Resolution(6)

기능하면서 살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하는 것이 많다고 느끼는 삶을 manage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방법은
regularity (규칙성)과 focus(집중)이다.

거의 집착이다 싶을 정도로 시간을 쪼개서 쓴다. 잠깐 집 앞에 쓰레기 버리는 일도 계획한 시간에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일로 방해받지 않기위해 노력한다.
일할때는 일하는데 집중하고 성경공부할때는 성경공부 하는데 집중한다.

이게… 기능하는 사람으로서는 좋은데, 존재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꽝이다.
열심히 일하다가도 날씨가 좋은 창밖을 보면서 날씨를 음미한다던지,
내가 집중하다가도 다른 누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그 규칙성을 깨뜨린다던지 하는 것이 내겐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다.
내가 해야하는 일을 조금더 효율적으로 함으로써 삶에 ‘여유시간’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줄이는 것…이 두가지를 아마 다 해야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새해엔 이걸 조금 더 고민하고 시도해봐야 할 것 같다.

New Year’s Resolution (5)

내가 존재하지 않고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내게 일어난 현상은,
말씀을 양식으로 먹지 않고 도구로 활용하고 있게 되었다.

나는 말씀을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을 양식으로 섭취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졌던 시기들을 돌이켜보면 그 기간의 대부분은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지는 경험으로 가득찼던 시간이었다.

요즘 내게 말씀은…
달기보다는 재미있다.

그런데 이건,
내가 예전에 양자역학을 공부할때와 딱 비슷하다.
그때 양자역학을 공부했던것이 달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말 재미는 있었다.

그렇다면 말씀을 양식으로 먹어야겠다고 내가 결심을 하면 뭔가 내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글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말씀이 달기보다는 재미있는 것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내가 존재하지않고 기능하고 있는 내 현상태에의해 만들어진 결과인지,
아니면 내 현상태의 원인인지 잘 모르겠다.

음… 굳이 현재로서의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내 생각엔 말씀이 달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기능자(functional unit)으로 작동하고 있는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말씀을 꿀처럼 더 달게 묵상하고 노력해야지…. 이런 방식으로 고쳐지지 않는 다는 말이다.

New Year’s Resolution (4)

그래서 나는 내게 하도록 주어진 것을 무작정 다 하려고 하기보다 정말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맞추어서 살기로 결심을 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부르심과 잘 align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no 하는 일들이 더 많아야 할 것 같다.
가령, 나는 더 훌륭한 커리어를 만들기위해서 살지 않기로 예전부터 결심해왔다. 그러므로 성실함이나 책임의 수준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오버해서 일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일을 열심히 하고, 계속 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성실하게 해야 하겠지만, 그 목적이 소위 ‘커리어 관리’나 ‘커리어 growth’는 아닌 것이다.

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성실함과 열심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나고 발견하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내겐 훨씬 더 소중한 경험이다.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여러가지로 많은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
그것을 감사할줄 알고, 그 주신 것들이 나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