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Week 묵상 – 소망

처음 십가가의 의미를 깨달았을때,

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아니 왜…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났고,

내 삶의 모든 영역은 그 십자가의 가치를 중심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매년 이 시즌이 될 때마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가 얼마나 shallow한 수준인가 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이 땅을 살면서, 과연 그 십자가의 신비를 다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싶지만…

이렇게 그 영광의 끝자락을 조금 잡는 것 만으로도,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소망을 준다.

…..

옛날에 황 간사님이 어느 세팅에서 설교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Charles Templeton은 복음전도자였다. 빌리그레함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가뭄 끝에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잡지에서 보고, 하나님이 어디계신가 라는 질문을 하다가 결국은 불가지론자(agnostic)가 되었다. 이런 비극적 상황을 만드는 신이라면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래서 쓴 책이 Farewell to God 이다.

반면,

Mother Teresa는, 인도 캘커타의 빈민촌을 향해 compassion을 가지다가,

결국 그 안에 들어가 평생 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들을 보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며 그 사람들을 섬겼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고통을 겪어보지도 않은 채, 그저 편안한 자리에서 사진을 보고 하나님을 버렸지만,

다른 사람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신의 눈물로 여기고 함께 고통에 동참하며 그 사람들을 섬기면서,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에게 소망의 논리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소망의 삶의 방식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한다.

…..

십자가를 바라보며,

처절하게 우리 구주께서 그 위해서 피 흘리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왜 (그렇게 하셨나)’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사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단히 분명한 대답이 주어지는 것 같다.

Holy Week 묵상 – 고통

어제, 

한국에서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탔던 배가 침몰한 뉴스를 들었다.


어찌나 가슴이 막막해지고 힘들던지…

아… 정말 몇번씩이나 탄식이 나왔다.

이건 아닌데…

정말 이런건 아닌데…

세상이 이러면 안되는 건데…

아끼는 친구들의 힘든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뉴스를 들으며…

그리고 또… 내가 그런 힘든 상황을 지나기도 하면서…

예수께서 그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 소망을 주시기 위해 자신이 그 고통을 짊어지셨음을 생각해본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두려워했을 아이들의 두려움 만큼이나 예수의 두려움이 컸을까?

그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만큼이나 예수께서는 아파하셨을까?

깊은 삶의 절망의 골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운 마음을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두고 가지셨을까?

오늘은…

도무지…

‘고통’이라는 지점으로부터 조금도 생각이 더 움직여지질 않는다.

Holy Week 묵상 – penal substitution

소위 penal substitution이라는 개념을 마치 ‘옛날 식의 atonement theory’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만드는 key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가 싶다.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희생으로,

내 죄값을 치루고,

내가 회복되었다는 말씀.

그래서 이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내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

‘역사적 예수’연구를 들여다보면,

사실 penal substitution에 관한 이야기들이 별로 나오질 않는다.

그리고,

1세기 유대교 배경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로 오셨고, 참 이스라엘이 되셔서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fulfill 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생각해보면,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시기도 하지만, 초역사적 인물이시기도 하시다.

성경은 시간 속에 침투해 온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전히 ‘내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내가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해서 사랑하는 대상이다.

내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고,

내가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원히 따를 내 주 (Lord) 이시다. 

Holy Week 묵상 – 개인적 복음

금년 초 였던가,

일본에 출장을 가 있었는데,

신깐센을 타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내 머리 속에는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니,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세상’이 아니라 ‘나’ 말이야.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것,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 등등은 논리적으로 잘 파악이 되는데,

갑자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희미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괴로웠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사랑하시긴 하지만, ‘나’라는 개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닐까.

뭐 ‘나’라는 개인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께 크게 손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말하자면,

내가 모래성을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고 하자. 

그 모래성을 참 좋아하고, 어쩌다 그것이 망가지면 안타까워할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안의 모래 한알 한알에 어떤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뭐 비슷한 논리였다. 


뭐 여러가지 논리적 전개를 통해,

나름대로 성경 여기 저기를 뒤적이며,

그리고 내 개인적인 ‘체험’을 되새기며 그 의심이 많이 가셔지긴 했었는데…

그때 얻은 교훈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디 정말 중요하다.

성경을 사유화(privatize)해서 읽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성경읽는 방법이다.

그리고, 흔히 사유화해서 읽어내는 성경 본문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잘 못 해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주간에…

그런 사유화의 오류의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 깊이 마음에 담아보고 싶다.

예수께서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나’에게 머물렀음을 마음에 더 담아보고 싶다.

결국 나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 아니던가!

Holy Week 묵상 – 복음, 역사성

복음이 그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 아니라, 시간 속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복음의 nature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종교는, 

그 종교의 경전이나 이야기들의 실제 역사적 사실 여부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일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면,

그분의 십자가 처형,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그 모든 근거와 근본을 잃어버리게된다.

기독교가 이렇게 인간의 역사 속에 뿌리 박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참으로 사람 냄새 나는 종교로 만든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news이고,

종교는 기본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advice이다.

만일, 마치 예수에 대한 뉴스가 사실이 아니어도 괜찮은,

‘내면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Holy week을 맞으면서,

복음이 역사속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것과,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뉴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나의 독서법 (1)

사실 한달에 한권 책 읽을까 말까 한 수준이므로,
내가 무슨 독서법 어쩌구를 논할만한 수준이 절대 못된다.
게다가 요즘은 그나마도 시간이 없어 잘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끔 내가 어떻게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에 한번 정리해서 써보기로 하였다.
뭐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니므로, 아마 이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
혹시 좀 도움을 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대학생때,
한학기에 6과목 정도를 들었고, 일년에 12과목을 정규학기에 들었다.
평균적으로 한달에 한권정도 text book을 보는 셈이었다.

그래서 대학생때 결심했다.
전공서적 한권당 신앙서적 한권을 읽겠다고.
그래서 한달에 한권 책읽기를 시작했다.

늘 잘 지킨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로부터 한 15년 정도는 꽤 지켰다.
처음에는 가벼운 에세이 등부터 시작했지만, 점차 신학서적들도 읽었다.

조직신학, 성서 해석학, 교회사, OT/NT survey 등은 신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수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꽤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미국의 잘 알려진 복음주의 신학교 M Div 학생들이 배우는 교재를 혼자서 독학한 경우도 있었다.)

보스턴에 있을 때에는, 근처의 신학교 한학기 강의 tape 전체를 구해다가 들으며 공부를 한적도 있었다.소위 ‘인터넷 강의’가 많이 뜨고난 다음엔 거의 미친듯이 여기저기 강의들을 들었고, 그중에는 정규 신학교 강의를 도강(?) 하기도 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좀 공부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사실 많이 남는데… 아직 포기한건 아니다! ㅎㅎ 혹시 여유가 생기면 언젠가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그리고 소그룹에 대한 책, 경건생활에 대한 책, 그리고 고전들…
이럭 저럭 읽은 것들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했던것 같기는 하다.

Not Being Excellent (4)

탁월함 중독에 걸리고 나면,

모든 것을 ‘효율’로 판단하게 된다.
효율에 거의 강박증이 있을 정도로.
탁월함 = 효율적 = 선
열등함 = 비효율적 = 악
의 등식을 부지불식간에 갖게 된다.
꼭 선,악의 개념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효율성을 추구해야할때가 물론 있다.
그런데,
그런 효율성 강박증을 조금은 풀어도 될만한 상황에서도,
그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라던가,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낼때에도…
그 시간이 효율적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렇게 효율적이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불편해하다 못해… 
‘악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악한’ 것으로 여겨진 사람은 쉽게 마음 속에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왜냐하면, 탁월함 중독, 효율성 강박이라는 frame을 버리지 않은채 judge를 하는 것이므로)
아, 세상엔 왜 이렇게 악당이 많지?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수퍼히어로가 된듯이 행동하려고 하기도 한다.
이 모두…
내게서 자주 발견되었던, 그리고 지금도 발견되고 있는 모습이다.

Not Being Excellent (3)

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전투적이다.

여기서 ‘일’이란, 단지 직장일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해야하는 잡일들, 민우 ride 주는 일, 성경공부 등등… 그야말로 모든 종류의 ‘일’이다.

대개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위해,

촘촘하게 계획을 짠다. 그 계획 속에는 나름대로 내가 ‘노닥거릴 수 있는 여유’를 조금씩 넣어놓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 계획을 ‘미친듯이’ 실행한다.

내가 이렇게 일을 실행할 때에는, 폭군이 된다.

그 일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 사건, 존재가 나의 적이 된다.

지금 이 블로그의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누가 내게와서 말을 붙이거나 방해를 하면 나는 금방 불쾌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전투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 이 글 쓸 시간 2분 남았다…)

이렇게 하면,

사실 대단히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을 해낸다.

웬만큼 많은 일도 handle 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있는 도중… 나는… 거의 ‘무인격체’가 되어버린다.

내가 짠 계획을 미친듯이 실행하는 기계와 같다.

그리고 그 일을 미친 듯이 마치고서…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나의 그 폭력적 자세에 위협을 받고 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이미 상처를 받아 나가 떨어져 있다.

탁월해야해. 그러기 위해서는 효율적이어야 해. 그러므로 치밀하게 열심히 해야해…

이런 삶의 자세속에서, 나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

그런데 문제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할 때…

이렇게 전투적이지 자세를 견지하지 않고도 이 일들을 다 해낼 수 있을까?

이게 자신이 없다.

Not Being Excellent (2)

내가,

뿌리깊게, ‘excellency’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시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금년 들어서라고나 할까.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의 관계, 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탁월함중독 (addition in excellency)”는 대단히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블로그에서 몇번에 나누어서 ‘자가증상’ 몇가지를 풀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내 자신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아예 이렇게 나서기로 했다. ^^

어려서부터 늘 모범생으로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의 특징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공부를 잘하고자 노력했던 것,

정말 죽자사자 열심히 공부했던 것,

(나는 대학때는, 일주일 다해서 10시간정도만 자면서 공부할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걸 정말 많이 즐겼다.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다.)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연구/실험/개발하면서 직장생활 했던 것 모두,

따지고 보면 그 근원에,

그렇게 해서 security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내 잘못된 동기에 대하여 수 없이 많이 반성하고, 바로 잡으려 노력해서…

정말 많이, 정말 정말 많이… 나아지져서…

이제는 그 security에 대한 것을 많이 하나님께 맡겼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생각의 깊은 곳에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40년 넘게 그렇게 살아온 탓에,

내 몸과 마음은… 탁월함중독에 빠져 있다.

이제는 스스로 주의를 기울이고, 생각을 많이 하고, 제어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어느새 내 몸과 마음은 탁월함을 추구하는 모습을 가지게 되어버린다.

내 몸이, 탁월함 중독의 상태로 길이 들어버렸다고나 할까.

Leaving the Big A – 외전

가만 생각해보니, 한가지 빠진 것이 있어서… ^^

Apple에서는,

Engineer들이 보통 NPI (New Product Introduction)이라는 task를 담당한다.

향후 2년 정도 이내에 시장에 나와야 하는 것을 개발하는 일이다.

Proof of Concept – Proto- EVT (Engineering Verification Test) – DVT (Development Verification Test) – PVT (Product Verification Test) 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제품이 나오게 된다.

한편,

GSM (Global Supply Manager)라는 사람들은, 소위 Supply chain 혹은 vendor들을 다루는 역할을 한다..

이 사람들은 Vendor들과 이야기하며 cost를 계산해서 협상하고, 때로는 새로운 vendor를 개발하는 일을 일부 담당하기도 한다.

조금 단순하게 설명하면,

Engineering 팀은 기술, GSM은 돈을 더 다루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Apple에서 vendor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늘 듣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Apple이 예전같지 않아요”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예전에는 새로운 기술과 흥미로는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vendor들과 함께 개발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engineer들과 적극적으로 일해서 기술을 개발하면 GSM이 support하는 구조였단다.

그런데, 지금은…

engineer들은 고압적으로… 이런 기술 개발해야돼. 언제까지 해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쥐어 짜고,

GSM은 그거 반값으로 낮춰… 이렇게 하면서 쥐어짜고…

도무지 flexibility도 없고, 함께 일하는 재미가 없다고.

Apple이 훨씬 더 작을 때는,

함께 일한다는 느낌이 많았는데…

지금은 정말 Apple의 명령만을 따르도록 요구받는다고…

 

큰 회사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