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거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표현을 하지만,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을 통해서 역사를 움직이신다.
그것이 창조의 의도였고, 그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plan A 이다.

나는 내 세계관이 매우 적극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에, 한국의 민주화를 겪었다.
독재가 시민의 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사회가 급격히 투명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지금도 한국 사회가 투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지만, 40년전의 한국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그래도 훨씬 나아지지 않았는가.
–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들을 거치면서 많이 투명해진 사회를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일부 되돌리긴 했지만…

나는 사람이 정의를 위해 기도할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많이 살았다. – 그리고 그것은 내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내 동년배 즈음의 소위 ‘기독 청년’ (지금은 기독중년이라고 해야하겠지만..)의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른다지.
자기의 조국이 지옥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죽을만큼 지긋지긋하게 힘들다고.

대충 나보다 20살쯤 더 어린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 지각할 수 있는 시기에 적극적인 역사의 진보가 한국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정도가 가장 강력한 기억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역사에 대해서도 덜 낙관적이고,
그나마 미국에서 오바마 정권이 바꾸어나가는 것을 부러워하는 수준에 머무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울부짖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세상에 공의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맛보았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것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맛보고 있는 세대라고나 할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상을 바꾸어나가신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 속에 스며들어 온,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탈색시키고자하는 하나님의 버티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을 향해서 분노하며 주먹을 쥐고 이 세상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했던 시대와는 달리…
이제 그 분노 마저도 거세시키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기도는 이것이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는 중에서라도, 너무 침묵하지만은 말아주십시오.
지금은 사방에서 모두 하나님께서 침묵하고만 계신것 같아 보입니다.

부도덕한 정치가 세상을 장악하고,
크리스천들은 우매하거나 독기가 올라 있거나 둘중 하나인 것 같아 보이고,
사랑이 실종되고,
사람들은 더 망가지고, 그 안에서 고통스러워 하는데…

하나님의 긍휼을 조금만 보여주십시오.

광복70주년을 맞이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

원문과 서명 링크는 이곳을 클릭

한동안, 이런것 열심히 서명하고 참여하고 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동안, 이런것 거의 서명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이 글을 읽어보니, 참 잘 썼다.
내가 깊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약간 견해를 달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으나… (엄격히 말하면 내가 약간 내 의견을 유보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해야할까)
지금은 이런 것이 정말 필요한 것 같다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서명하였다.

아직 이 글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은, 한번 꼭 읽어보길 적극 권한다.

언니를 보고싶어 하는 하이디

지난 두주 민우가 writing camp를 갔었다.
민우가 없는동안, 하이디는 민우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

민우 방 앞에서 가만히 민우 방쪽을 보고 앉아있기도 하고,
민우방에 혼자 들어가서 두리번 거리며 민우를 찾다가 왜 언니가 없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기도 하고,
민우 없는 빈방에 혼자 들어가서 민우 침대 옆에 누워 잠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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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민우를 그렇게 그리워한것은 하이디만은 아니었다. ^^

어떤 복음의 신비

말씀으로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다보면 결국 어떤 사람의 삶의 깊은 이슈들에 엮기게 된다.
그래서 말씀을 앞에 놓고 삶의 문제를 다루다가 도무지 그 사람의 아픔과 문제를 더 듣는 것이 어려워져서 그저 마음을 떨구고 앉아있게 되기도 한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혹은 그 사람과의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무지 마음이 추스려지지 않아서 몇번이고 큰 숨을 몰아쉬고 정신을 차려야할때도 있다.

최근에도,
어떤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들었던 복음성가가 도무지 마음을 달래주지 못해서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동물원 노래를 틀어놓고 한동안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고는 복음의 어떤 특별한 부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말씀으로 세워주려하다가 그 사람의 아픔에 내가 함몰되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경험은,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해준다.

어떤 영적 리더들에게서 때로 특정한 종류의 답답함이나 밋밋함을 느끼게 되곤 하는데,
그것은 그런 영적 리더들에게 바로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내가 정말 그렇다.)

지난 주말,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자기가 말씀으로 섬기는 어떤 사람의 상황에 대해 아파하면서 그저 울기만 했다고 내게 텍스트를 보내 주었다.

나는 이메일로 이야기해주었다.
네가 복음의 신비를 깊이 경험하고 있구나…

신약백성에게는 구약백성과는 다른 방식의 선교가 제시되었다는 의견에 대하여 (배우고 자라는 하루)

제가 잘 아는 사람이 ^^
지난 화요일의 제 글에 좋은 reply를 달았기에, 아예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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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9에 나오는 declare the praises of him [NIV] 또는 proclaim the excellencies of him [ESV] 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43:21에 나오는 declare my praise [ESV]와 (chosen people이라는 공통점도 pivot으로 작용하여) 비슷한 표현인데, Joel Green은 이것을 두고, 베드로에게는 구약의 vertical language와 신약의 horizontal language가 다르지 않았다고 해석했더군.

베드로의 편지와 그의 동료 요한의 편지 모두, 편지 전체 그림을 놓고 볼 때 그 선포의 형태로 삶의 방식 (거룩과 사랑, respectively)이 주로 강조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땅한 자세를 넘어서, 선포의 형태라는 것이 분명해 보이더라구.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형도 주지했듯이, 이 두 사람의 행동들 (selected and recorded by 누가) 을 보면, 예수의 삶/죽음/부활을 설명하는 형태로 자신들의 삶을 채워나갔으니…

이 두 가지가 단순 상보적이지는 않을진대, 결국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르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가 부각되어 보이는 것은, 그 핵심적인 교집합을 간과한 결과인 것 같은데. 이 둘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든지 강조점을 두는 것은 contextual matter일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의 등장으로 선교의 컨텐츠가 바뀌었다기보다는 정립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싶네. 예수가 이스라엘됨을 성취한 것은 맞지만, 그 성취를 구현하는 몫은 남겨졌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이 편지에서 권하는 삶의 방식의 핵심을 예수에게 잇대는 모습이 분명해 보이고.

Hopeful

어제 밤,
참 오랜만에 코스타 관련해서 꽤 긴 conference call을 했다.

동부에 계신 분들은 2AM 넘어서까지 해야했고,
이걸 organize한 JK는 멘탈이 초토화된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되었지만…

나는 conference call을 마치고 참 감사했다.
그리고 마음이 놓였다.

뭔가 한줄기 빛이 쭈욱~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감사했다.
그리고 참 감사했다.

교육

민우가 이제 11학년에 올라가게 된다.
슬슬 대학가는 준비를 해야하는 시기인데,
그래서 나름대로 여기저기 대학들에 대하여 좀 ‘공부’를 하고 있다.

참 흥미로운 것은,
학교마다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교육방침이 있고, 인간상이 있고, 그것에 맞추어서 커리큘럼등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학교는, 4년내내 학생들이 거의 자유롭게 아무거나 들을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어떤 학교는, 그 학교 출신이라면 공유해야하는 내용을 core로 두고 requirement 두고 있기도 하다.

미국에 살면서, 나름대로 여러 학교들 출신들을 다양하게 만나면서 지내고 있는데,
어떤 학교 출신들이 이렇다 라고 모두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학교가 제공하는 내용을 참 잘 소화하여 그 학교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공부한 학교들 (한국과 미국)을 가만히 더듬어 생각해보면,
나와 잘 맞는 학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재상에 내가 부합되지도 않는 것 같다.

만일, 내게, 조금 더 다른 교육의 option들이 있었다면,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쩌면 이렇게 엔지니어를 하고있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전공을 한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이 전공이 나와 딱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걸 거지고 박사까지 받고 여태껏 그걸로 밥벌어먹고 살고 있다.

민우는,
전반적으로는 liberal art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수학이나 과학을 뭐 잘하는 수준으로 하기는 하지만,
책읽고, 쓰고, 사색하는 쪽을 더 즐긴다.
그리고 공학쪽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 보다는 순수과학쪽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민우가 그런 관심을 갖는 것이 반갑고 감사하긴 하지만,
우리 부부가 그런 쪽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도움을 주기가 어렵기도 하다.

민우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내가 해 주어야 하는 것,
내가 해주지 말아야 하는 것의 경계가 늘 모호하게 느껴진다.

Too Serious

예전에는 내가 블로그에 농담도 올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재미있는 것들도 퍼다올리고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걸 할 수 없게 되었다.

facebook 같은 곳에서 그게 워낙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어디 재미있는 것이 올라와 있으면,
그걸 퍼다 나르는 일이 꽤 중요했었는데,
이제는 facebook같은 곳에서 매우 빠르게 퍼져버리니,
이런 B급 블로그에서 그런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지난 몇년간 이 블로그의 글이 많이 ‘심각해져’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답글을 달기도 머시기하고…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지난주,
ㄱㄷㅇ 간사님의 사진 충만한 포스팅을 읽다보니,
아… 사진 같은걸 잘 찍으면,
나 같은 사람이 얼굴에 인상 잔뜩 쓰고 하는 이야기를,
훨씬 더 부드럽게 하는 것도 가능한거구나… 싶었다.

덜 serious해지도록 노력!

바쁘게 사는 죄 (6)

사람을 바쁘게 살도록 만드는 system은 악하다.
I repeat.
사람을 바쁘게 살도록 만드는 system은 악하다.

그렇다고 그 악한 system을 무조건 뛰어나오라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해야할 일은,

1. 우선 그 system이 악함을 인정하는 것
2. 그 system 밖의 대안이 없을까를 찾아보는 것
3. 2번이 없다면, 그 system 안에서 좀 덜 바쁜 방법을 찾아보는 것
(이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 필요하다. 돈을 덜 번다거나, job security가 나빠진다거나, name value가 떨어지는 직장을 선택한다거나…)

이 시리즈의 글은,
중간에 다른 것을 쓸 일이 많아,
맥이 좀 끊긴 감이 있지만…

나름대로 내가 깊이 고민하는 것이어서 어떻게든 좀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좀 맥이 끊기니, 나도 생각의 흐름도 좀 끊긴 감이 없지 않긴 하다. ㅎㅎ)

어떤 눈물

어떤 눈물은, ‘가슴’이 움직여서 나오게 된다.
슬픈 영화를 보거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거나, 몹시 기쁜일을 겪을때 나오는 눈물이다.

이상하게 들릴수 있으나,
어떤 눈물은 ‘머리’가 움직일때 나오게 된다.
깊이있는 사색과 생각을 하다가 어떤 결론에 이르기되어 그것이 눈물로 연결된다.
말씀 묵상을 깊이 하다가 마지막에 탁~ 하고 터져나오는 깨달음과 함께 눈물이 흐르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어떤 눈물은,
그저 그 대상 때문에 자연스럽게 흐르게 된다.
내게는, 코스타가 그렇다.

96년부터 코스타에 참석해왔으니,
올해가 내 개인적으로 코스타 20주년이었다.

ㄱㄷㅇ 간사님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과 사진들을 보며,
facebook등에 뜨는 update을 보며,
간사들의 카톡 메시지를 보며…

뭐 특별히 마음이 더 찡했다거나,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거나 그런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눈물이 흘렀다.
매년 코스타에서 그렇게 많이 울었기 때문에 그냥 조건반사로 그랬던 것이었을까.

모든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는 못했으나,
그곳에 함께 하지 못한것이 참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