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을 줄 알았는데….

음… 괜찮을 줄 알았는데,
금년에 바쁘고 정신도 없어서, 그냥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제 밤에는,
ㄱㄷㅇ 간사님 블로그의 사진과 글들,
kostavoice의 글들,
간사들의 카톡 message,
facebook 등에 올라오는 update
등등을 보며,
많이 울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직 사람들이 오지 않은 공간에서,
그 공간을 채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많이 울컥했습니다.

코스타를 섬기면서 배우게된 가장 중요한 영적 원리는,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제 30대 전부를 던져서… 그리고 40대 후반에 이르도록… 몸을 던져 헌신하면서도,
적어도 코스타에서는 언제나 ‘뒤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남고싶다는 욕심을 계속 가졌었습니다.
더 이상 그러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냥 몸쓰며 기도만 많이 하는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몰래 기도하는 사람들,
우는 아이들만을 돌보며 한주를 보내는 ‘시니어’ 간사들,
밤 늦게 체크인을 하는 한 사람을 위해서 밤 늦게까지 자리정리를 하지 않고 기다리는 등록 간사들,
이런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부럽습니다. 그리고 참 많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우리 간사들이 저를 얼마나 ‘선배’로서 생각해주는지 알 수 없지만,
일부 간사들은 제가 일대일로 말을 나누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간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다.. 그저 제 동생들 같아서 많이 울컥합니다.

간사들이 서로 카톡하면서 어느 건물 어디에서 뭐 가져다달라고 이야기하는걸 읽으면,
그 움직임이 빤히~ 다 상상이 됩니다.

정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금년엔 그냥 덤덤할 줄 알았는데…
2000마일 떨어진 곳에서 소식을 들으며 혼자 눈물 콧물을 찔찔… 합니다.

제가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이 많이 속상하고 억울하도록, 풍성한 집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러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는 별로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무엇무엇을 해주십사 하는 기도는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내 요청을 하나님께 말씀드려도, 하나님께서는 별로 들으시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어쩌다 깊이 있는 기도를 하게될때면 (기도가 깊어지는 일이 요즘은 대단히 드물다. -.-;)
주로 나를 부지런히 하나님에게 가져가는 기도만을 하게된다.

무슨 내용을 다다다다… 이야기하기 보다는,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을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냥 거기에서 하나님와 맞대면을 한다.

한동안은,
이런 기도가 참 좋기도 했지만,
요즘은, 좀 하나님께 내 요청도 말씀드리는… 그런 기도를 좀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힘이 빠지는건 어쩔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간절히/급하게 요청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주로 대답이 없으시다.
정작 내가 별로 간절해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뜬금없이 별로 열심히 기도를 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주신다.

다음주간,
내 기도가 어떻게 흘러가게될지,
그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지…
좀 궁금하다.

내 간절한 기도는,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깊이 한으로 맺히는… 그런 집회가 되는 것인데…

어제 밤의 기도

내가 우리 코스타 간사 후배들을 보면서 가지는 가장 간절한 소망은 이것이다.
– 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더 알게 되는 것.

사실 난… 그거 하느라 참 힘들었었다.
아… 여기까지만…. 이것보다 조금 더 한 것은 견디기 힘들겠다… 싶으면 내가 살짝 견디기 어려운 수준으로 힘든 일들이 생기는 것을 경험했다. -.-;
(어디 뭐 코스타 간사만 그렇겠는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영역이 사실 다 그렇지…)

그러면서도,
섬기는 내내….
아…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신거구나… 하는 걸 반복해서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턱~ 하고 입에서 튀어나오는 감탄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자주,
그런 깨달음은,
사역을 하면서 아주 깊이 당황스럽고 힘든 일들을 경험하면서 얻곤 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다시 이해하게되는 일들이 생기곤 했었다.

나는,
우리 후배들이,
이 사역을 하면서 그런 경험을 좀 깊이 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것 만큼만이라도,
이들이 하나님을, 이 사역을 통해서 경험 할 수 있다면…

어제 밤에,
갑자기 일이 하나 터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마 간사들은 얼굴이 하애지도록 많이 당황하고 힘들겠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이 과정 중에, 그 누구보다도 우리 간사들을 하나님께서 많이 도닥여 주십사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더 깊이 알게되게 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뼈속 깊이 알게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의 출장 여행 팁

뭐 보통 사람들보다는 비행기 많이 타고 다니는 일을 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develop한 여행 관련된 팁들이 좀 있다.

한번 정리해 보면…

1. 비행기 check-in은, 온라인으로 한다.
비행기 check-in을 온라인으로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boarding pass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전화가 boarding pass 역할을 하니까)
check-in counter에서 까다롭게 따지는 carry-on luggage 무게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요즘은 많은 항공사가, carry-on luggage 무게 limit을 정해놓고, 그것보다 무거우면 부피가 작아도 비행기 안에 가지고 타지 못하게 한다.
또, 온라인 check-in을 하면 자리 선택을 내가 할 수 있다.

2. 온라인 check-in은, 공항에 도착해서 한다.
보통은 출발 24시간 전에 온라인 check-in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가능하면 늦게까지 기다렸다가 한다.
그 이유는, 늦게 할 경우, 가끔은 옆자리가 비어있는 자리를 선택해서 check-in할 수 있기 때문이다. ^^

3. 짐을 부치는 것은 가능하면 피한다.
이건 내 preference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3주 미만의 여행에는 짐을 부치지 않는다.
필요하면 옷을 밤에 빨라서 호텔에 걸어두고 입는다.
긴 출장을 할때에는 회사에서 세탁비 지원을 해 주지만, 나는 늘 그냥 내가 빤다. ^^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짐을 찾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혹시나 짐이 잘못 배달되거나 잃어버리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한 출장지에서 다음 출장지로 갈때, 저녁에 호텔 체크인을 하기 전에 하루종일 어떤 회사에서 미팅을 해야할 경우가 있는데…
큰 짐을 들고 이곳 저곳 오피스를 다니는 것도 번거롭고, 여름에는 땀도 삐질 삐질 난다. -.-;

4. 비행기 안에서는 거의 무조건 가장 편하게 입는다: 특히 international travel일 때에는
사실상 거의 잠옷 수준으로 편하게 입는다. – 추리닝 바지에 목 늘어진 티셔츠 같은 것들.
이걸 입고 가면 좀 민망하니까, 대개는 비행기에 타서 이륙하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갈아 입는다.
사실 아주 많은 경우, boarding이 거의 다 끝나고 비행기 문을 닫기 전까지 시간이 10분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때가 비행기 화장실이 가장 덜 붐비는 때이기도 하다. ^^
비행기 안에서 잠을 어떻게 control하느냐는, 도착해서 시차적응이 얼마나 빨리 되느냐 하는 것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5. 출장을 떠날때에는 버리기 직전의 옷을 입고 간다.
구멍이 나서 버리기 직전의 청바지, 심하게 변색이 되어서 입을까 말까 망설일 수준의 티셔츠 등등을 입고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럴때는 속옷도 구멍이 나서 마지막 한번만 더 입자고 생각하는 것을 입는다. 양말도 구멍난 것을.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런걸 입고 가면, 도착해서 그냥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갈때는 packing을 더 시간을 들여서 잘 하지만, 올때에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새로 생긴 것이 없는데도 짐이 더 커진다. 그럴때 입고간 옷을 버리고 오면, 아주 여유가 생긴다. ㅎㅎ

6. 현지용 지갑을 따로 가지고 다닌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지갑이외에, 현지에서 현지의 cash와 credit card를 넣어가지고 다닐 지갑을 따로 마련해서 가지고 다닌다. credit card는 foreign transaction fee가 없는 것을 하나 마련해서 그것은 그냥 여행다닐때만 쓴다. (아예 현지용 지갑에 늘 넣어놓고 있다.)

7. 큰 영수증 모음 pouch를 가지고 다닌다. (이 pouch는 그냥 호텔에 두는 큰 가방에 넣어놓고 있어도 된다.)
두주 정도 business trip을 하면, 영수증이 안되어도 20~30개 정도는 생긴다. 어떤 경우에는 거의 60개가 넘는 영수증을 챙겼던 적도 있었다.
이걸 잘 관리하기 위해서 영수증을 모아둘 수 있는 큰 pouch를 가지고 간다.
그리고 가능하면 작은 영수증들은 현지에서 바로 사진을 찍어서 record로 남기고 버리기도 한다. (우리 회사에서는 사진으로 찍은 것도 reimburse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나처럼 한번 여행에 두개 이상의 나라를 거쳐서 가는 일이 많을 경우에는, pouch에 두개 이상의 주머니가 따로 있으면 좋다. 다른 나라의 영수증은 다른 주머니에 모으는 식으로.
나는 이 pouch는, hotel의 invoice/영수증이 통채로 들어갈 정도로 큰 것을 사용한다.

8. 내 liquid를 담는 bag에 넣어두는 것들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로션이나 치약같은 것들은 따로 작은 백에 넣어서 security check을 할 때 꺼내놓도록 요구한다.
나는 이 bag에 치약, 로션과 같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넣어두고 다니는 것들이 있다.
– Listerine pocket-pack (긴 비행여행을 하고 도착 직전 식사를 끝낸 후에 이건 아주 유용하다.)
– 손톱깎이 (여행이 10일보다 길어지면, 중간에 꼭 손톱을 깎아야 한다.)
– 작은 반짓고리 (바늘 두개, 실 몇개가 들어 있는 성냥갑보다 조금 작은 크기)
– Asthma(천식) 약 : 나는 천식이 있으므로… 혹시나 필요할 것에 대비해서 inhaler를 가지고 간다.
– Abreva: 나는 조금만 피곤하면 입술에 cold sore가 잘 난다. 그럴 경우 초반에 abreva로 잡는게 중요하다.

9. 여권, 지갑 등과 같이 중요한 것들은, 가지고 다니는 backpack이나 computer 가방같은 곳의 같은 주머니에 넣어둔다.
나는 출장 갈때는 backpack 하나, rollaboard(바퀴 달린 가방)하나 이렇게 가지고 가는데, 여권이나 지갑 등은, 내 backpack의 같은 위치에 항상 보관한다.
그리고 집에서 나갈때, 비행기를 타기 직전, 비행기에서 내릴때 등등에 이것이 있는지를 꼭 확인한다. (최악의 경우, 여권과 지갑만 있으면 어떻게든 생존이 가능하므로 ㅎㅎ)

10. 호텔에서는 TV를 켜지 않는다.
혼자하는 여행을 할때, TV를 켜서 유익한게 하나도 없다.
일단 TV를 볼만큼 여유가 없기도 하고,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나라 말로 나오는 TV가 흥미롭기가 어렵기도 하고 ㅎㅎ, 무엇보다도… 혼자서 여행을 하다가 밤에 TV를 켜면… 어떤 나라에서는 몹쓸것들이 뜬다. -.-; 아예 피하는게 상책이다.

11. 집에는 여행용품 보관하는 작은 서랍이 있다.
여기에는 여권, 국제면허증, 전기 콘센트 어댑터, 현지용 지갑, 비누칠용 수건(나는 어디 가든지 이걸 잘 쓰는 편이다. ㅎㅎ), 여행 사이즈 각종 용품들 (치약, 로션 등등), liquid용 작은 bag, extra 전화 cable 등등이 들어 있다.
출장을 떠나기 전날에는 여기에서 필요한 것들을 쭈루룩 모아 넣는다.
나는 보통 2주 출장갈 짐을 싸는데 15분이면 된다. ㅎㅎ

이거 말고도 더 있을 것 같은데…
뭐 그냥 당장 써보자니, 이정도 되는 것 같다. ^^

[2008년] 마가복음 성경공부

2000년대 중반 즈음부터, 이런 식으로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서 사용했었다.
그런 이유는, 예전과 같이 리더들이 성경공부를 인도하는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발견했었고,
워낙 성경의 내용을 이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풀어놓고’ 말씀을 봐라… 라고 하면 완전히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서 그랬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성경 몇권은 이런식으로 다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을 했었는데,
벌써 10년 가까이… 거의 못하고 있다. -.-;

여전히 내 to-do list에는 이 내용들이 많이 overdue 되어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

=====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나라
(마가복음 2:1-17)

웅장한 의사당 건물에서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발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기대 속에 출범한 새로운 정부의 방향과 성격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연설이 되리라는 기대감이 의사당 안에 가득하다. 이때, 갑자기 뒤쪽에서 남루한 옷을 입은 어떤 중년의 여인이 소란을 일으킨다. 자신의 아들이 큰 병에 걸렸는데 수술비가 없다며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말투를 들어보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옷차림으로보아 재래시장에서 좌판을 열고 장사를 하는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그 여인이 일으키는 소란에 주목하던 청중들의 시선은 다시 대통령을 향한다. 대통령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1.지난 며칠동안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당신이 만나기에 불편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그 사람들은 어떤 특징들이 있었는가? 당신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중풍병자를 고치심 (1-12절)

2. 1장 후반부에 기록된대로 예수님은 병을 치유받으려는 많은 군중들을 피해 마을 밖에 계시다가 이제 2장에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다. 1장 후반부에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의도를 생각해 볼 때, 2장 초반(1,2절)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부터 기대했던 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은 (7절, 13절) 군중들의 기대와 어떻게 대비가 되는가?

3. 중풍병자가 예수님에게 오게되는 과정을 관찰해보라. 다음의 내용들에 대하여 어떤 것들을 알 수 있는가? 혹은 어떤 것을 유추해볼 수 있는가?

중풍병자의 육체적인 상태

중풍병자와 친구들과의 관계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의 정체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예수님에게 오면서 가졌던 기대

4.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병고치는 일들을 부탁하셨을때, 예수님은 다른 마을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떠나셨다.(1:38)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병고치는 일을 하실 것으로 예상하고 나왔을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4절) 이처럼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역시 가르치는 사역을 하고 계실때 벌어진 이 해프닝에 대하여 왜 금하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주목하시고 다루셨다고 생각하는가? 다음의 두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자세 (4-5절)

그것을 다루심으로써 다루게 될 이슈 (10절)

5.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포하신다. (5절) 그러나 바로 직후에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심으로써, 그들의 즉각적인 필요와 요청에도 응답을 하신다. (11절) 이렇게 하신 예수님의 의도와 동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었는가?

6. 때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사람들의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필요를 즉각적으로 채워주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nice)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좀더 통전적이고(holistic) 총체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그리고 때로는 전략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필요를 즉각적으로 채워주는 것을 너머서는 섬김을 통해 일했던 (혹은 실패했던)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보라. 그러한 경험이 없으면, 당신의 섬김의 어떤 부분이 이런 원리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나누어보라.

7.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자세는 사람을 섬기는 몇가지 모델을 제공해 준다.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을 정리해보라. 당신의 섬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8. 당시 율법학자들이 했던 비판을 분석해보자.(7절) 율법학자들의 비판 가운데, 옳은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은 각각 무엇인가?

레위를 부르심 (13-17절)

9. 레위를 부르실 당시 “무리가 모두 (all the multitude, 마을 사람 대부분)” 예수님께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13절) 그러나 예수님이 레위를 발견하실 당시, 레위는 그 무리 중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세관(tax office)에 앉아 있었다.(14절) 당시 세리에 대한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시각등을 고려하여 당시 레위가 세관에 앉아서 군중들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 것인지 묘사해보라.

예수님께서 레위를 불렀을 때, 레위는 어떤 느낌이었겠는가?

10. 많은 군중 속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바닷가를 걷다가 레위를 “보셨”다.(14절) 수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데에도 레위를 주목하여 보셨던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점들을 배울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어떤 특징을 말해주는가?

11. 당시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했던 비판들을
관찰해 보라. (7절, 16절)
이들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의 특징과, 이들이 간과했던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각각 무엇이었는가?

이들의 어떠한 성향/특징들이 예수님을 통해 펼쳐지는 새로운 나라에 대하여 닫혀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에게서 발견되는 비슷한 잘못은 어떤 것인가?

정리
12.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당신의 모습을 기억해보라. 혹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런 부분을 생각해보라. 당신의 그러한 모습들은 어떤 면에서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 혹은 레위와 같은가? 예수님과의 만남은 당신의 이전 모습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바꾸어 가고 있는가 혹은 바꾸길 기대하는가?)

13.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당신이 오늘 성경공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점들은 무엇인가? 우리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점들은 무엇인가?

[2007년] KOSTA/USA-2007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이 글은,
지금 우리 교회 목사님과 함께 쓴 글이다. ^^
읽다보면, 내가 흔히 quote 하지 않는 유진 피터슨 이야기가 나온다. ^^

나름대로, 코스타 운동의 운동성에 대해 reader-friendly version으로 정리해보고자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난다.

=====
KOSTA를 섬기다 보면, “KOSTA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KOSTA를 만난지 12년째가 되는 필자로서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KOSTA란 무엇일까, 무엇이 KOSTA를 KOSTA 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위해 딱딱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내용을 정리해보았을때 사람들이 흔히 KOSTA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매우 다른 KOSTA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KOSTA는 집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KOSTA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여름에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에서 여는 집회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KOSTA가 원래 추구하고 있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KOSTA는 집회를 포함한다. 그러나 KOSTA는 집회라기 보다는 KOSTA의 핵심가치(core value)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운동(movement)이다. KOSTA가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 규정(describe)하는 것은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다고 우리가 믿는 소망의 내용때문이다. 만일 KOSTA가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일회적인 집회를 통해 소부흥(mini-revival)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KOSTA는 집회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KOSTA가 꿈꾸는 것은 KOSTA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이,
(1) KOSTA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에 동의하게 되어
(2) 그 핵심 가치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 살 뿐 아니라
(3)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4) 그러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5) 그들이 몸을 담고 속해 살고 있는 피조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름에모여서 함께 하는 집회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KOSTA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KOSTA

2007년에는 집회를 앞두고 왜 갑자기 집회가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금년 주제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금년 KOSTA/USA의 주제는 “이 세대롤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이다. ‘변화(transformation)’가 금년의 키워드이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성령의 일하심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을 조차도 대량생산하고 싶어하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덕(virtue)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집회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완전한(complete)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면 참 감사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진정한 변화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작되는, 어떤 이들에게는 한단계 큰 도약을 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새롭게 갱신(renew)되는 일들이 있기를 기도한다.

건강한 혼란과 무질서를 기대하자

집회를 전후하여 이번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하는 코스탄들에게는, 결단의 기도 이전에, 뜨거운 찬양 이전에, 감격이 있는 말씀 이전에 올해의 주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혼란과 시작되어야 한다. 혼란은 무질서이다. 혼란은 불확실성이다. 혼란은 미확정이다. 혼란의 상태에서는 아무런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혼란은 좌절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그런 혼란이 필요하다. 이런 혼란의 상태는 이 세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들 자신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한 첫 삽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변화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창세기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니)의 혼란이 있어야 1:3 이후의 창조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열매와 결단으로 연결되는 집회가 되었으면 한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마음과 창조와 질서로 끝맺음을 하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집회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하더라도 그저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우리가 예상한 것들만이 일어나는 집회라면 그것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집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의 예측과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너머서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대한 기대감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이 집회의 주인공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진정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변화에의 길에 들어서서, 다른 이들과 전 피조세계를 그 변화로 이끌어내는 KOSTA/USA-2007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 이번 집회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어나길 기도한다.

[2005년] 내 경험을 상대화하기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뜨거운 물에 한번 데인 사람은, 뜨거운 것을 조심하는 것을 인생의 모토로 삼는다.
어려서 가까운 사람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은, 무병장수가 인생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하려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이 발견된다. 특히 자칭타칭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래서 아마도 생각이 조금 다른 부분을 함께 포용하지 못하고 다투는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가령,
기도를 통해서 신앙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말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메말랐다고 비판한다.
혹은 말씀의 오묘한 맛을 깨달았던 사람은 기도에 빠진 사람들을 무식한 반지성주의자로 매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어가면 갈 수록 더 심해지는 듯 하다.

나도 물론 역시 이런 면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 경험을 절대화해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모습은 내가 스스로 조심하려 해도 쉽게 나타나는 내 죄성이다.

바라기로는,
나는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내 경험을 상대화할줄 아는 지혜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지 않는 자세와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

30대 중반을 지나 30대 후반을 향해서 가는 나이에,
정말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2004년] 반윤리적 기독교

돌이켜보면, 이 글을 썼을 즈음부터,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과 위치로 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은 이때의 생각보다는 좀 더 발전되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쓸 당시, 내 수준에서는 꽤 많은 생각과 독서를 하고 있었고,
KOSTA의 주제와 관련해서 많은 묵상을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썼던 것은,
내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turning point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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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2004년] 이상주의자의 변절

나는,
내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왔고,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보아왔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이상주의자임에 자부심을 느껴왔고 그 ‘순수성(?)’을 지키려 많이 노력했었다.

그런데,
요즈음,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의 한계와 벽을 많이 실감한다.

1. 적어도 내게있어, 이상주의는 교만함과 tightly coupled 되어 있었다.
특히 신앙적 이상주의의 경우에 그랬다.
하나님 안에서의 순수함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dogma’를 ‘옳은 이상’으로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나 자신을 포함한)을 정죄하였다.
그 교만함은 다시 내 이상주의를 강화시키는 positive feedback 으로 작용하고, 결국은 나와 내 생각과 내 행동에 파과적 효과를 가져오는 듯 하다.

2. 이상주의는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킨다.
현실적으로 어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는 그 복잡한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는 (over-simplfying) 문제가 있었다.
내가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고,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다.
마치 내가 제시하는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되면 그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그렇게 상황을 설정해 버리는 오류를 종종 범해왔음을 본다.

3. 이상주의는 종종 all-or-nothing의 approach로 가게된다.
소위 ‘혼합’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하므로… 조금이라도 그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경우에는 신랄한 비판만을 남긴채 아예 발조차 담그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경우 결국 그러한 비판은 내가 아래에 쓴… ‘비판쟁이’를 양산하는 mechanism으로 작용한다.

4. 이상주의는 자주 사랑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기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너무나도 많다.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든지,
교회를 비판하면서 정작 그 속에서 당장 눈물을 뿌려 섬겨야할 영혼들을 생각하지 않는 부조리를 흔히 보게 된다.
가령… 교회가 타락했다고, 모든 교회의 문을 다 닫고 때려부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에는 그 안에 있는 영혼들이 너무 귀하다.
정말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한 눈물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을 더럽혀가며 현실과 싸우는 노력이 있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상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열거한 내 결점들을 보면서… 어쩌면 여태껏 견지해왔던 스타일의 이상주의자로부터는…
내가 변절을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2004년] 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미국에 20세기에 왔고, 지금은 21세기 이니… 두 세기에 걸친 미국 생활 동안 한국이 많이 변한것은 틀림없으렷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한 과정의 말인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이태백’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참 꿈을 꾸며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할 나이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사도행전에 나온 것 같이 ‘은과 금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선뜻 이것에 대한 대답을 섯불리 열거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예수 믿고 (현세적, 물질적) 복 받아라’
이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실제 그러한 현세적 복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로 사탕발림을 하려 한다면 복음은 정말 천박한 원색의 룸살롱 광고 찌라시 정도 이상의 attention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열심히 살아서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말을 돌려서 해서 그렇지, 사실 이건 ‘성공해라’ 라는 말이다. 이들이 성공이 싫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일까. 성공을 억지로 피해서 이태백이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복음적인 말에 이들이 거짓 위로라도 받을 것을 기대해 볼수 있으련만.

3.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실 나라도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풀어주실 테니.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앞에 두고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

어설픈 “좌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이태백들 가운데 다수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들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며…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들만 이야기 해왔지 않았는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야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고지를 점령하자고.

그런데 우리가 이들 이태백들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이 세상을 바라보는 frame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 뒤,
텅텅빈 한국의 어느 예배당에서 나와 내 아내가 예배를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태백들의 박탈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줄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