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한다

어느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려는 불교의 타락으로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고, 만일 이제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때문이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 대해 그 책임을 다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한 자책의 변이었으리라.

최근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지도적인 모 목사님의 각종 부정(?) 사례들이 TV 방송에 보도된 것을 접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 그 목사님의 축재 수준이 수십억대에 이르고 교단 내의 선거에서 일인당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뿌리며 부정 선거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불륜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그러한 보도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필자에겐 더욱 더 큰 충격이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낮은 도덕적 수준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방어해왔던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방어전술이 얼마나 먹힐수 있을 것인지하는 생각에 약간의 패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100%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은 필자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신념이다.)

지난 3월 24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또 살펴보자.
‘아말렉작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聖戰)이 북풍유도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기독교 장로인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은 스스로 이 특급비밀작전의 이름을 짓고 지휘봉을 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아말렉족은 사막지역에서 거주하던 고대유목민족. 이집트를 탈출하는 히브리족을 공격했다가 모세가 훗날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총애했던 여호수아에게 크게 패했다. 무찔러야 할 적(敵)의 상징이 바로 아말렉족이 되고 말았다.
-( 중략 )-
윤씨 기자회견을 아말렉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뭡니까.(신부장검사)

윤씨 기자회견은 각 당의 지나친 대북연계활동에 대한 경종이자 좌익세력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구약성서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내세워 아말렉족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모세)가 부하들(여호수아)을 시켜 좌익세력(아말렉족)을 물리치려 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권전부장)

대통령 선거전 와중에 특정후보(당시 김대중후보․DJ)를 비방하는 허위 기자회견이 좌익세력과의 전쟁입니까. 당신은 결국 구여권을 여호수아로 내세워 DJ를 아말렉으로 삼고 싸운거 아닙니까.(신부장검사)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권전부장)
신부장검사와 권전부장은 몇시간 동안 아말렉논쟁을 거듭했다.

-( 중략 )-

밤샘 조사는 오전 4시에 일단 끝났다. 조서에 대한 확인과 몇군데의 수정작업이 뒤따랐다.
이어 오전 4시40분. 조사실에 수사관 1명만 남은 것을 확인한 권전부장이 화장실로 들어갔고 5분 뒤 요란한 파괴음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문 밖으로 퍼져 나왔다.

위의 기사는 한국에서 각종 선거가 있을 때 마다 대표적 부정선거의 방법으로 사용된 소위 ‘북풍’ 혹은 ‘공안 정국’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 책임자였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관련된 기사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책임자는 기독교 장로였다. 주위에서 대형 부정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그 사건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이제는 별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터질 때 마다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손가락질 한다. 그리고 이 세대를 한탄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 과연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 세대가 저 자리에 서면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인가.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여전히 남을 위해 사는 것 보다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같이 배고프고 힘들 때 내배부터 채우려 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함께 커가는 것 보다는 내가 크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큰집에 살기를 좋아하고 좋은 차 타며 좋은 옷 입는 것을 내 희생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이라거나 민족과 시대와 역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편안함과 부요함에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과연 영적인 순결함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과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환경에서 나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그 부정한 ‘체제(system)’을 대항하여 싸울 힘과 용기와 동기(motivation)가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겠는가? 우리도 이 상태로 그 자리에 가면 전혀 시대와 역사를 복음으로 바꿀 힘이 없는 나약하고 부정(不貞)한 세속적 그리스도인(worldly christians)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썩어가는 세상에 대해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못한 것만이 책임이 아니라 (물론 그 역할 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 썩어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청년적 열심이 무엇을 향한 열심이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루 하루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타협하지 않고 지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시대를 타락으로 이끄는 주범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믿는 복음과 같은 복음을 믿었던 일제시대 청년 김교신이 부르짖었던 슬로건이 생각난다. ‘조선을 성서위에’. 우리는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성서위에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

[1997년]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의 사회 내에서의 선행 – 이 시대 기독 지성인들의 할 일

최근 필자 개인의 모습과 우리 공동체 여러 지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놓고서는 매우 열심히 기도도 하고 고민도 하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생각의 틀도 정리해 나가는데 반해 ‘세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적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민족, 선교, 세계를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주로 ‘면피용’의 구색 맞추기 식의 기도일 때가 많고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개인의 지극히 작은 문제들 – 이성 친구 문제, 가족 문제, 장래 진로 문제, 인간 갈등 문제, 학업의 문제 -로 채워지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이 내 짝이 될 수 있습니까’(이건 그래도 좀 낫지. ‘꼭 이 사람하고
짝이 되게 해 주세요’가 사실 대부분이다.)의 기도 제목으로는 수십일 ‘작정 기도’를 하면서도 북한의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한끼 금식기도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현 주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필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사도 바울의 고차원적 신앙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몹시 괴로워진다.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많은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여기고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을 경박한 것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199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지체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스스로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였을 전형적 모습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 1997년 대선을 예로 들지 않은 것은 현 대통령의 치적이나 업적 등이 아직 쌓여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대통령 선거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상관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기권을 하거나 별 생각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 후보나 선택한 사람이다. 또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그 당시 상태로 만족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해서 집권당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이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모 후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우리가 남이가’의 투철한(?) 지역감정으로 자기와 출신 지역이 같은 후보를 지지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기준으로 선택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감봉을 당하는 등 경제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파송한 수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에 대한 아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참고로 이 글을 통해 특정 정치 집단을 비난하거나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싶다.)

대통령 선거에서 바른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잘 정립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각 후보에 대한 도덕성, 정책(공약), 제시된 비전,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맥, 정치적 노선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과 관점으로 바르게 평가하는 식견과 안목, 통찰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안보 (통일), 외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그 전체가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 유일하고 정확 무오한 규준임을 믿는다. – We affirm the authority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 Scriptures in their entirety as the only written word of God,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그저 개인적인 ‘뜨거움’만으로
해결되어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부패가 무섭도록 심각하게 진행되어온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의 양적 팽창이 거의 경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할 때, 그저 ‘불길 같은 주 성령’의 찬송을 부름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특히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은 더욱 그러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조 조정’을 담당할 사람들은 사회의 opinion leader가 될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 속에서 개인적 ‘거룩’을 아무리 잘 실천하려 하여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죄악을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탈세를 하는 상황에서 그 기업의 물건을 애용하며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 탈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탈세로 인해 특정 계층을 위한 정당하지 못한 소위 ‘비자금’이 조성되고 결국 그러한 검은 돈은 국민 경제를 어둡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므로 그 피해자는 결국 소비자가 되고 만다. – 특히 이러한 피해는 소외된 계층에 집중되기 쉽다. 결국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역동적 경건의 행위에 역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지론’(사회의 높은 자리를 정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저지론’(사회의 기반을 파고들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미답지론’(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적은 분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등이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야하는 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의(righteousness)의 목표와 근거, 방법과 수단 등을 잘 알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불행하게도 성경적 근거를 가진 정의의 모습들을 구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실체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설정해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일은 바로 우리 세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성경공부와 묵상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은, 친일의 잔재들이 청산되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기고 80년 광주의 눈물이 씻겨지고 IMF의 아픔이 치유되는 그런 세상을 우리를 통해 이루길 원하신다.

물론 지성 사회의 복음화(전도)는 지성인들의 주된 몫이다. 그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에게 그들에게 허락하신 ‘지성’의 대가를 요구하신다.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작성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심판주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性)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종종 전도와 사회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하여 뉘우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는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31 ; 창18:25 ; 사1:17 ; 시45:7 ; 창1:26,27 ; 약 3:9 ; 레19:18 ; 눅6:27,35 ; 약2:14-26 ;
요3:3,5 ; 마5:20 ; 6:33 ; 고후3:18 ; 약2:20)

“We affirm that God is both the Creator and the Judge of all men. We therefore should share
his concern for justice and reconciliation throughout human society and for the liberation of men from every kind of oppression. Because mankind is made in the image of God, every person, regardless of race, religion, color, culture, class, sex or age, has an intrinsic dignity because of which he should be respected and served, not exploited. Here too we express penitence both for our neglect and for having sometimes regarded evangelism and social concern as mutually exclusive. Although reconciliation with man is not reconciliation with God, nor is social action evangelism, nor is political liberation salvation, nevertheless we affirm that evangelism and socio-political involvement are both part of our Christian duty. For both are necessary expressions of our doctrines of God and man, our love for our neighbor and our obedience to Jesus Christ. The message of judgement upon every form of alienation,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and we should not be afraid to denounce evil and injustice wherever they exist. When people receive Christ they are born again into his kingdom and must seek not only to exhibit but also to spread its righteous world. The salvation we claim should be transforming us in the totality of our personal and social responsibilities.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cts17:26,31 ; Gen.18:25 ; Isa.1:17 ; Psa.45:7 ; Gen.1:26,27 ; Jas.3:9 ; Lev.19:18 ;
Luke6:27,35 ; Jas.2:14-26 ; John3:3,5 ; Matt.5:20 ; 6:33 ; 2Cor.3:18 ;
Jas.2:20)

[1997년]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

앞으로 세번에 나누어서 올릴 이 글은,
지금 제 생각과는 다른 것들이 좀 있습니다….만…
그래서 올릴까 많이 망설였습니다…만….

그러나 이 글을 쓴지 18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것이 대단히 놀랍기만 합니다.

제가 다니던 청년부 회지에 쓴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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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

십자가를 볼 때마다 가슴에 울컥 솟아오르는 감동이 있음을 느낀다. ‘서른 세 살의 젊은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자신의 피를 다 쏟아가며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언제나 감동을 가져온다. 사실 그 것을 그냥 감동이라고 표현하자면, 어쩐지 그것을 너무 폄하(貶下)하는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는다.

요즈음 청년부의 모임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린다.
열정이 식었다는 말도 들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기도가 부족하다, 말씀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여러 지체들의 사랑 가득한 충고와 해결책들도 자주 들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고 모임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우리 청년부는 참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20년, 30년 동안 가지고 있던 가치를 순식간에 포기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에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열정과 감격과 뜨거움이 있다. 어느 지체의 말대로 그야말로 매주 금요일이 수련회가 되는 모임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에 걸맞는 자유, 평화, 화평, 사랑, 안정감 등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수를 믿고 이전에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의미를 알게되었다는 하덕규 집사의 ‘자유’의 가사가 과연 우리에게도 풍성하게 느껴지는가? 오히려 해야할 일들만 더 늘어난 채 ‘종교생활’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소모적인 일인가?

우리 청년부의 여러 가지 문제를 보면서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가졌던 유대주의의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모습에서 제하여 나갔다. 예수님도 그들의 의를 높게 평가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열심을 가지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죽였다. 그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일은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혀 성경에 대한 통찰력 없이 나름대로 ‘말씀을 적용’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러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느낌’을 가지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도저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일 길을 여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이 곳에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은 아닌가? 우리의 주관적 ‘느낌’이 자칫 성경의 계시적 증거를 묻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그 말씀을 우리 모임에 잘 적용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바로 그 곳에 계신다고 하셨다. 멋있는 피아노와 최고의 연주자와 영적인 분위기가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모이면 그 곳에 계셔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까지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본다.
찬양을 할 때에도 분위기에 맞추어 곡을 골라야 하고, 가능하면 인도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더욱 감동이 된다. 피아노 반주자는 최고의 솜씨로 연주를 하고 선곡된 찬양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따라 조절되고 가끔은 통성 기도를 하는 시간과 묵상기도를 하는 시간을 두어 사람들이 충분히 느끼도록 해야한다. (절대로 찬양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명백히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찬양을 매우 좋아하고, 특히 우리 청년부의 찬양은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리고 분명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한다.) 목사님의 message는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야하고 듣는 사람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어야 ‘은혜가 된다’. (이것도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런 message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의 우리 목사님의 message가 정말 이런 message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필자 개인 영성의 부족으로 자칫 귀만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공부 조장은 충분히 준비를 해와서 모르는 것을 대답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시간을 주어야 역시 ‘은혜를 받는다.’ 기도는 옆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 몇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뻥뻥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주어야 나도 ‘은혜를 받아 기도가 트인다.’
만일 위에 열거된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필수 요건이라면 우리는 중국 오지의 선교지로 가서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전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중국 오지의 선교사님들이나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을 훨씬 더 앞서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세상 학문’을 탐구해야 하지만 그것과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교회에 오면 그 모든 것들이 포기되어야 하고 내려져야 하고 잊혀져야 한다. ‘세상 학문’을 보다보면 믿음이 떨어지기 쉽고 은혜를 막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이성에 관계없이 믿는 대상이므로 나는 이성을 포기하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우리의 지성은 과연 ‘고지를 정복하는’ 도구로밖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인가? 과연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우리 청년부가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에서 그리고 각기 받은 은사에 따라서는 중국, 아프리카, 일본, 무슬림 지역에서 진정한 대안적 기독 지성이 길러지는 곳이 될 수는 없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문제는 ‘말씀의 깊이’와 ‘훈련’의 문제이다. 우리에게 말씀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령이 충만’한 것 같은데 교회를 떠나서는 그 감격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말씀의 깊이 없이 성경을 ‘점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을 때 얻는 감동이 ‘물방개점’치는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자극을 받으면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가 핵심과 근본에 대한 바른 통찰력 없이 매우 ‘자극적인 것’만을 구하다보면 자칫 더 큰 자극이 오지 않았을 때 실망하거나 낙심하게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감격과 열정이 충분히 표출되어져야 하지만 현재 우리는 좀 더 말씀의 깊이와 훈련에 몰두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행동이 우리 신앙의 표현이고 성장의 수단이지만 종교적인 행동에 우선하는 신앙의 문제가 바로 세워져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계속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 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근거로 우리의 모임을 ‘느끼는’ 모임에서 ‘배우고 훈련하는’ 모임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대한 통찰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노력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이실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 것을 찾는 것과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져야할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난 1월호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실린 기독교학문연구회 회장을 지내신 KAIST 윤완철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 믿음을 강조하되 믿음의 내용이 불분명한 열심
– 구원을 강조하되 그것만 넘어서면 방향을 잃는 목적 없는 신앙
– 하나님께서 우주 대신에 교회를 창조하신 것으로 믿는 편협함
–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 가두고 성공의 이념으로 나머지를 채우는 이원론적 신앙
– 순종보다는 제사를 드리려는 제사 종교
–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성경 공부
– 순종하려 하면서 계시를 묻지 않는 어두움
– 계명은 없고 사명만 있는 청년적 신앙
– 바울을 공부하는데 바울이 와서 들어도 감탄할 오묘한 해석
– 감격으로 시작하지 않는 윤리,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 십자가
– 정열에 들떠 방향을 잃은 사람들, 방향을 잡느라 정열을 잃은 사람들

또 다시 아시아 출장 -.-;

또 다시 아시아 출장을 떠납니다 -.-;
(사실 이 글이 올라가는 시간에는, 아시아에 가 있겠죠.)

두주동안 가는 일정이지만,
막판에 일이 좀 꼬이면(?) 좀 더 길어질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또 다시 이전 글들을 선별해서 올려보겠습니다.
(혹시 필이 오면 글을 좀 써볼수도 있겠습니다만… 음…. 시간이 될지…)

그중 어떤 것들은 지금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들도 있지만,
그래도 한번 용기를 내어보려고 합니다. ^^
(사실 예전에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무진장 부끄러운 것들이 많아서…)

저는 잘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감사하게도….

계속해서 울리던 간사들 카톡 대화도 좀 잠잠해지고,
종군기자와 같이 종횡무진 달리던 ㄱㄷㅇ간사님의 블로그도 마무리 모드이고…
이제 wrap-up만 남은 모양이다.

참 감사한 일이다.
아직 모든 일들을 다 마무리하려면,
간사들이야 할일이 많이 남았을테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좀더 상세히 들어봐야겠다.

mp3 file들 언제 팔기 시작하려나… ㅎㅎ

신학은 – 설명의 도구? 선동의 도구?

내가 생각하기에,
신학은 일차적으로 설명의 도구이지 선동의 도구는 아니다.
(물론 적절한 설명과 해석의 결과로서 선동이 불가피하게 따라올수는 있겠지만 서두…)

신학이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 세상, 인간, 피조세계, 궁극적 실재등이고,
그러한 ‘개념’들이 context 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context를 그러한 개념들에 비추어 설명하는 것도 그 내용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역사적으로 신학을 선동의 도구로 사용했던 시도들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콘스탄티즘, 중세의 교권주의 신학, 제국주의와 결탁했던 제국주의 신학 등등…

물론 그 경계가 대단히 모호한 경우도 많다.
가령, 남미의 해방신학은 설명의 도구였던가 선동의 도구였던가.
(설명을 하다보니 그것을 통해 어떤 논리가 나왔고, 그것이 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이 선동의 도구로서 활용되면 그것은 일종의 slippery slope 이라고 본다.

가령,
세상의 부조리를 보면서, 그것에 항거하기 위해 무리하게 신학에서 그 선동의 논리를 찾는 시도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선동의 지속성도 길지 못하고, 신학의 본질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로버트 웨버가 분류한 방식을 빌자면,
소위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과 여러가지로 구분이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들 ‘젊은 복음주의자’중에서 중요한 두가지 분류가 있다고 본다.

한 부류는 새롭게 맞닥드리는 세상의 조류를 신학적으로 설명해서 대안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이미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선동의 동기와 심지어는 방법까지도 정해놓고는 그 supporting argument를 신학적으로 찾아내려는 사람들이다.

어떤 부류의 젊은 복음주의자들과 만나면서,
사실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수 없으니…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깨닫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꽤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
(긍정적, 부정적 의미를 함께 포함한다)

인디에서 간사들 카톡 그룹에 내가 끼어 있는 바람에,
간사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들이 다 보인다.

그래서,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계속 인디에 가 있다.
괜히 그 카톡 메시지들 보며 눈물도 핑~ 돌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성경공부를 할때,
깊이 기도에 빠질때,
열정적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때,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message를 할때,
깊은 예배의 현장에 있을때,

그럴때가 참 좋다.
내가 종교적이어서 그런걸까.
일상생활에서 맞닥들이고 경험하는 하나님보다, 그런 세팅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이 더 강렬하고 좋다.

그러나…
뭐 내가 꼭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수는 없으니…
심지어는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살아야 할때가 더 많으니…

인디 간사들 카톡 그룹에서,
한 자매가 첫날 함께 부르자고 보낸 찬양 악보를 보고,
그 노래를 며칠째 계속 흥얼거리고 있는 중이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곳에 임재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향기가 하늘에 닿으니 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이곳에 오셔서 – 이 곳에 앉으소서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이 – 주님의 이름만이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

2불짜리 지폐

1.
지난 금요일,
직장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 그룹은, 금요일이면 동네 싸구려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먹는 ‘전통’이 있다. ^^)

동네 허름한 인도 음식점에서 싸구려 인도 음식을 사먹고,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2불짜리를 하나 받았다.

2.
몇년 전,
코스타 집회에서 작은 봉투에 2불짜리 헌금을 한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내용이 이랬다)

저는 지난 몇년동안, 2불짜리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갑에 꼭 넣어놓고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집회에서 복음을 알고 나니, 그것이 이제는 가치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2불짜리를 지갑에 넣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을 헌금으로 드립니다.

나는, 꼭꼭 눌러쓴 그 메모를 몇번이나 읽으며 참 많이 감격했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진정한 가치를 보게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이 감사했고,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지난 금요일에 받았던 2불짜리 지폐를 보면서 그때 그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인디의 집회 생각이 많이 났다.

3.
지금, 인디에서는 집회가 한참이다.
그렇게 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실 것을 믿고 감사한다.
수고하는 우리 후배들 때문에 눈물나게 감사하다.

인디 화이팅!

인디에 부분적으로 참석을 좀 한 적이 있었으나,
작년에 처음으로 full 참석을 했었다.

그러면서,
여태까지 얼굴이 아른거리는 친구들도 있고…
구석진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던 친구…
‘상담’을 마치고 나서도 내게 계속 text를 보내며 책 추천을 해달라고 조르던 친구…
진지한 얼굴로 신앙의 회의가 있다고 이야기하던 친구…
오랫동안 회의하다가 마침내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얼굴이 환해졌던 친구…
등등이 많이 생각난다.

금년에 또 다들 그렇게 오려나. 일년동안 다들 잘 살았나.

괜히 조장 훈련하는 website에 올라온 글들을 읽어 보기도 하고,
간사들이 무슨 얘기들을 하나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이제 내일부터 간사들이 인디에 모일테고,
오늘 밤 부터는 움직이기 시작할텐데…

모두들 화이팅!!
(특히, 여기 들어오는, 눈팅만 하는 인디 간사들 ^^)
I’ll be praying for you…

다행이다…?!

금년에는 인디와 시카고 양쪽 다 참석을 하지 못할 것 같다.
나로선 많이 아쉽지만, 그리고 수고하는 후배들에게 많이 미안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괜히 가서 어쩡거리는게 도움이 많이 되기 보다는,
그저 ‘옛날’의 그림자를 계속 드리우게되는 부작용이 크지는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금년에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가치와 방향을 정비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나가는 마당에,
“옛날엔 이랬다”는 이야기만 자꾸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이제 금년으로,
별로 한일 없는 ‘공동대표’도 임기가 끝나므로,
이제는 그것도 좀 털어버리고,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만 살며 섬기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여러가지로 다시 따져보고 생각해 보았을때,
이렇게 금년에 많이 땡땡이를 치게된게…
다행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