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하늘나라 놀라운 곳?

– 여섯살 때, 동생과 장난을 치다가 유리창을 깨고는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란 장난을 치다가 유리창을 깨어도 혼나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국민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여자 친구에 대해 관심을 갖었다. 그리곤, 하늘 나라란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나를 좋아해주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엄청나게 많이 맞고, 학교를 하루 결석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란 잘못을 해도 체벌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주위의 불량 학생들에게 내 돈을 빼앗겨 보았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가 만일 있다면, 그 나라엔 그 누구도 내 돈을 빼앗아 가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중학교 3학년 때, 반장을 맡았었는데, 학급의 잘못에 대한 벌은 항상 반장이 대표로 받았다. 나는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엔 내가 억울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과학 고등학교라는 낮선 환경에 처음으로 뛰어들었다. 중학교 때 까진 스스로 상당히 잘났다고 생각했던 내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나는 하늘 나라란 누구나 다 공부를 잘할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 입시라는 부담감을 남들보다 1년 일찍 겪으면서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엔 입시 지옥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6월 민중 항쟁이 일어나고, 온 사회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불의와 정의, 독재와 민주, 독점과 분배. 최초로 사회 정의라는 것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고, 만일, 정말 만일 하늘 나라라는 것이 있다면 그 나라엔 민중이 독재자를 쳐부수는 나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난 내게 진실한 친구가 없음을 보았다. 모두가 내게는 피상적인 친구들이었다. 난 절대로 내 마음을 그들에게 열어주지 않았고, 그들도 역시 그랬다. 난, 하늘 나라란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고 나를 포용해주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난 처절한만치 내 마음의 벽을 높이 쌓아갔다. 남들이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내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잘 꾸민 가면만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내 속 사람이 탄로날까봐 두려웠다. 별로 그럴것 같지는 않지만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내 속 사람을 그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알 수도 없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난 어떤 빛을 보았다! 아직 어렴풋하고 희미하긴 하지만 그 빛은 나에게 하늘 나라의 형상을 조금씩 보여주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기대하던 하늘 나라의 모습과는 다른 더 큰 무언가가… 난 내 일생에 있어서 최초로 내 마음의 문을 그 빛을 향해 열었다.

–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엄청난 비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열려진 그 비밀은 내 어둡고 좁은 가슴에 하늘 나라를 옮겨다 주었다. 이제 하늘 나라는 내 안에 와버리고 말았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큰, 그러나 조용하고 점잖은 모습이었다.

– 그 이후… 아직 내가 미처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하늘 나라의 모습을 하나 둘 씩 더 알아가면서, 내 삶의 driving force는 이제 그 엄청난 하늘 나라의 비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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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이면 25살.
내가 나름대로 ‘회심’을 경험한 것이 90년이었다.
그러니, 이때쯤에는 내가 경험한 회심이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것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

또 다시 출장

오늘 또,
아시아쪽 출장을 떠납니다.

사실 지난 몇주 계속해서 출장을 가야하는 일들이 쌓여 있었는데,
여러가지로 교묘하게(?) 출장을 피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전 정말 출장을 한번 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어서, 또 한번 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열흘 남짓 가야할 것 같은데,
출장 기간동안, 제대로 글을 쓸 여유가 없을 것 같아,
그동안은 예전에 썼던 글들 가운데 몇개를 올려보도록 하려고 합니다.

지금 보니,
이 블로그에 쌓여있는 글이 1700여개가 되더군요.
예전 글들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을 올려서,
저도 생각을 다시한번 가다듬어보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

내가 많이 비정치화 되긴 했지만…

나는 뭐 내가 정치에 개인적으로 뜻을 둔다거나 그래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내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도 않다.

어려서부터 그저 ‘모범생’으로 자라오면서,
“저렇게 데모하면 인생망친다…” 는 식의 가르침을 계속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듣고 자랐고,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복음을 깨닫고 나서,
내가 사회정의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있었다는 사실이 말로 다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정치를 통한 사회정의의 회복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한 의미의 사회정의가 과연 그렇게 정치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들게 되었고,
대충 3-4년 전부터는 내가 많이 비정치화 되었다.
여전히 내 나름대로 선호하는 정치적 그룹이 있고, 내 나름대로 꽤 분명한 정치적 선호가 있지만,
그것에, 예전만큼 목매는 자세는 갖지 않게 되었다.

뭐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병박이나 박근혜같은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때도,
그렇게 많이 힘들어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지금 이 정권은 잘못되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잘못된 일’을 할 때에는,
의도가 악해서 잘못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잘못된 일을 하기도 한다.

나는 정말 반복해서,
그래… 이 사람들은 그냥 무능력한 것이지 그렇게 악한 것은 아닐지도 몰라…
뭐 그런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물론 무능한 점도 많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의도 자체도 악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정치에 그렇게 큰 소망을 두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물속에 수장된지 일년이 되었다.

이 마음 속의 분노를 어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망치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

지난 주말에 잠시 생각해본 것.

어떤 크지않은 조직이나 공동체가 있다고 하자.
그 조직이 잘되는 모습을 가지려하면, 대단히 많은 조건이 맞아야한다.
좋은 리더, 명확한 비전, 건강한 조직문화, 좋은 조직원 등등.
그래서 big hit을 하는 조직을 만드는 일은 쉽지도 않고, 흔히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어떤 조직에, 정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아주 소수의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그 사람(들) 때문에 성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 조직에, 정말 아주 훌륭한 사람 (인격, 실력 등 다방면에서)이 아주 소수의 사람이 있다면,
조직은 그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실패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가령,
크지 않은 지역교회를 생각해보자.

작은 그룹의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쁜 소문을 돌리고, 서로 사람들을 이간질시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 그룹의 사람들이 대단히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들 때문에 전체 교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이 참 어렵다.

그러나,
또 아주 작은 그룹의 사람들이, (심지어는 그냥 어떤 한 사람이), 깊은 사랑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단점을 덮어주고, 겸손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그 교회는 그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서로 싸우고 파괴적으로 깨지는… 완전히 망가지는 사태를 피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사람들이 성공을 가로막을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파국을 막을 수 있다.

일반화하기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적당한 size의 공동체, 조직 등에 어느정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unsong hero를 쓰시는걸까?

아브라함, 모세, 다윗, 느헤미야, 이사야, 세례요한, 바울, 베드로…
이런 엄청 드러나는 리더들의 존재가 물론 중요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드러나는 리더가 아닌, unsong hero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일을 지탱해내시기도 하는것이 아닐까.

앞에서 드러나는 리더가 고함을 쳐가며 어떤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정말 요긴하게 쓰시는, 드러나지 않은 한 사람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드러나있는 리더가 없어져도… 되던 일은 될 수 있는데,
그 드러나지 않던 숨은 일꾼, 그 한 사람이 없어지면… 순식간에 스르륵… 전체가 무너져버리는.

성경에서 그런 예를 찾기가 쉽지 않고,
역사속에서 그런 예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드러나지 않으니….)

그런데,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
그런 예들이 있었다.

정작 어떤 모임이나 흐름이나 운동이나 단체나 조직의 참된 생명력이,
드러나있는 리더로부터 나오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

예전에는 정말 멋진 리더가 되고 싶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숨은 일꾼이 되고 싶음 마음이 커진다.
하나님 이외에는, 내 땀과 눈물과 수고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

민우와의 대화

벌써 좀 된 이야기인데,
민우와 몇가지 이슈에 대해서 ‘토론’을 했었다.

첫번째는 성경과 진화론에 대해서.
이 이슈에 대해 민우의 입장은 꽤 단호하다.
성경이 진화론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거부할 근거가 성경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두번째는 동성애에 대해서.
이것도 민우는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는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사실 민우 친구중에도 transgender도 있고, 동성애자도 있는 것 같다.
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부분은 그 당시 문화에 한정시켜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 이슈에 대해서, 성경해석의 여러가지 방법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민우는 좀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시간이 되는대로 좀 더 대화를 나누어봐야겠다.

세번째는 마리화나 합법화에 대해서,
민우는 이것도 합법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민우 말에 따르면, 민우 학년 아이들중에서도, 술이나 담배를 피는 아이들보다 마리화나를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한다.
워낙 많아서 사실상 이걸 현재대로 불법이라고 규정해도 도저히 control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그럴 바예는 차라리 합법화해서, 좀더 통제 가능한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게 민우의 생각이다.
그리고 세금도 걷어서 그걸 가지고 마리화나 control에 사용할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사실 내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

이제 민우도 16살이고,
여러가지 생각이 꽤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되는대로,
여러가지 다양한 생각에대해 더 토론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제에 대한 엉뚱한 처방

의사인 내 동생이 해준,
내 생각엔 아주 명언이 하나 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살을 빼려고 할때,
뭘 먹어서 빼려고 하는데, 그건 지혜롭지 못하다.
살을 빼려면 먹던것 가운데 살찌게 만드는 것을 먹지 말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그건 줄이지 않고 다른 무엇을 더 먹어서 빼려고 한다.

콜레스테롤 수치는 낮추는 일이나,
혈당을 관리하는 일이나,
혈압을 관리하는 등의 일들도 다 비슷하다.

정곡을 콕 찌르는 아주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살을 빼려는 사람이 다른 무엇을 먹어서 살을 빼려고 하는 이유는,
기존에 자기가 좋아하던 사탕, 과자, 기름진 음식 등등을 줄이기 싫기 때문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건드리지 않은채, 엉뚱한 처방을 하는 것이다.

영적인 건강에도 비슷한 원칙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지 않아서 영적인 기름이 잔뜩 끼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reach out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해야하는데,
그런 문제를 성경공부로 해결하려고 한다.

다른 예로,
성경말씀을 제대로 잘 알아 깨닫는 것이 꼭 필요한 상태에 있는 어떤 사람이,
정작 성경은 읽지 않고 찬양집회에만 따라 다니며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정말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취하고,
지나친 것을 줄여야 하는데…
이미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자꾸만 더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영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사실 내가 이런 성향이 아주 강하다… 쩝.)

우리가 struggle하고 있는 어떤 영적인 갈증의 문제는,
너무나도 자주,
아주 정곡법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부활의 믿음

부활절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celebrate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금요일의 죽음과 고통 가운데 있기도 하다.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직 부활의 아침이 한참 남은, 토요일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이 여겨진다.

어떤 분이 이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
소위 ‘전통적’ 복음주의 신학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는,
‘고통’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부활을 기뻐하고 celebrate하는 것과,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어두움과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 걸까.

그저…
‘믿어라’ 라고 얼굴 벌겋게 되어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력있게 이야기하는 key는 무엇일까?

Marcus Borg, John Dominic Crosan, Stanley Hauerwas, Walter Bruggemann 같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는 각각 어떠한가?

어제 부활절 예배는 참 좋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사순절 기간에 말씀 묵상도,
내게는 참 복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부활절 잘 보내고 나서…
살짝 불량한 생각을 좀 해보았다. ㅎㅎ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16-24, 28-30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복음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뉴스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대한 충고가 아니다.

복음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방향이라기 보다는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때로…
지금의 삶이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나,
당장 내게 어떤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때면,
복음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이 이 상황에 대한 진보나 개선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된다.

그러나,
복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대한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를 이해할때, 지금 내게 닥친 상황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해준다.

도무지,
그 복음을 알기 전과 같은 방식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리게 된다.

주님께서 이루셨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 주님께서 이루신것에대한 나의 온전한 이해이다.

이제 부활의 아침에,
나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라며 마음껏 죽음을 행해 조롱할 수 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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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고난주간에,
내가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한 것을 발견했다.
여전히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아래에 한번 덧붙여 본다.

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몇가지 내가 몇가지 더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다음의 것들로 환원(reduce)시켜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지식으로 환원하지 말자.
한국 교회의 몰락을 보면서, 복음주의의 쇠퇴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 해결책을 자꾸만 knowledge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을 많이 반성했다. 물론 지식을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을 해결책으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리게되고, 따라서 매우 절망적인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passion으로 환원하지 말자.
비록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직도 참 많이 미숙한 수준이긴 하지만… 주님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고 싶은 깊은 열망이 내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열망(passion) 혹은 헌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말해야한다는 당위 혹은 윤리적 강령으로 기독교복음을 바라보고자 하는 ‘습관’이 내게 깊이 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passion이나 헌신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 identity를 define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일주일동안 묵상하면서, 내 생각의 중심이 많이 ‘나’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늘 나밖에 생각할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런 경향이 더 심화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그분’께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매우 인본주의적인 (그래서 어쩌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짓 복음으로 내가 함몰되어 가기 쉬운 것 같다.

보통은, 운전을 하면서 audio book을 듣거나, podcast를 듣거나, 설교를 듣곤 하는데, 이번주에는 헨델의 메시아를 듣게 되었다. 아… ‘할렐루야’ 코러스가 터져나오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함께 터져나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전투적 그리스도인, 성경 연구자, 사역자, 하나님 나라 일꾼… 그런 가치들이 정말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저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정말 그 모든 것을 통합해내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예수께서는, 내 모든 것을 드려 찬양드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숨을 고르며 성경을 읽다…

누가복음 22:63-71

성경의 어떤 부분은, 깊이 많은 생각을 하도록 나를 이끌지만,
성경의 어떤 부분은, 마음이 불타도록 만들기도 한다.

또 같은 본문이라도,
어떤 때에는 그 본문을 읽으며 많은 신학적 사색을 하게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가슴에 불을 지른것 같이 느끼기도 한다.

성경가운데,
요한계시록은, 거의 언제 읽어도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게 만드는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고난 중에서 그 요한계시록을 받아들었을 초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상황 속에서, 보좌에 계신 어린양을 찬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며,
온 세상 가득한 주님의 영광을 상상하며…
눈이 촉촉해져 벅찬 가슴을 나도 모르게 움켜잡게 된다.

누가복음의 이 본문을 읽으면서는,
하도 복창이 터지고 마음이 무거워져서,
나는 요한계시록의 몇군데를 읽었다.
마음이 무거워서 계속해서 주님의 고난 기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한동안 요한계시록을 읽고나서,
다시 돌아와 이 본문을 읽었다.

주님에 대한 웅장한 찬양이 담겨있는 계시록과,
그 찬양이 대상이신 주님께서 이토록 힘없이 모욕당하시는 이 본문 사이에,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간극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무 저항도 없이,
그 십자가를 향해 각오하고 걸어가시는 주님…
그 본문을… 숨을 고르며 숨을 참아가며 숨을 거칠게 쉬어가며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