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직장 고민 (1)

나는 남들이 많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이게… 내가 여기 오려고 막 찾았던게 아니고…
다니던 직장이 망해서 lay-off 되는 바람에 job을 찾고 있었는데, 어떻게 지금 직장이랑 연결이 되어서 지금 다니고 있다.

나는 Google 소속은 아니지만 ^^
Google의 hiring process에대해서 기술하는 여러 블로그 포스팅이나 기사등등을 찾아보면,
Google에 들어가기가 꽤 어렵다고 한다.

몇년된 자료이긴 하지만, 한 기사를 보니,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position에 수천개의 resume가 들어오기도 하고…
지원한 사람의 0.01%~0.04% 정도가 offer를 받는다고 한다.
(지금은 이것보다는 더 높을 것 같긴 하다)

내가 일하는 Verily는 그렇게까지 높은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내 linkedin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job inquiry inmail이 들어온다.
하도 많이 그런 연락이 와서, 나는 나름대로 대답하는 일종의 template을 만들어 놓았다. -.-;
심하게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수준에서 정보도 주면서도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들 오고싶어 하는 회사이지만,
나는 나름대로 불만도 많다. ^^

실제로 몇달전에는, 꽤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하기도 했었다.
아주 재미있어 보이는 회사의 recruiter가 내게 연락을 해 왔고, 내 마음이 살짝 흔들렸었다.

앞으로 몇번의 글을 통해서,
내 나름대로 직장에서 하는 고민들을 좀 적어보려고 한다.

아주 고상한 그런 고민이라기 보다는 대부분… 내 욕심에 대한 이야기, 돈 이야기, 시기심이나 ambtion에 대한 이야기들일것 같다. ^^

믿음 (5)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갖는 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씨게~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하나님에 대해서 꾸준히 계속해서 신실하다는 뜻일 것이다.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께 계속 충성한다는 뜻일 것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산다는 것.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백성으로서 신실함을 놓지 않는 다는 것.

자…
믿음이라는것을 이렇게 풀어놓으면… 사실 완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구원을 얻는 것이 믿음이냐 행위냐 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 된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의 핵심이 신실함이라면,
정말 믿음 = 행동이 되어버릴수 밖에 없다.

오히려 히브리적 세계관에서는 믿음과 행위가 구별되기가 더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헬라적 세계관에 투영되면서 믿음과 행위가 따로 떨어지는 일종의 왜곡과 분리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런 것이라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이야기하는 하박국의 (그리고 바울의) 선언,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는 에베소서의 말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야고보서의 이야기 등등은…

내가 여기서 좀 풀어놓았던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당연히 공부가 많이 부족한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누구든지 좋은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꾸벅~)

믿음 (4)

앞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구약의 히브리 민족들이 ‘에무나’ 혹은 그와 어근이 같은 ‘에메스’ 그 외의 다른 파생 단어들을 사용했을때…
그 용례가 헬라문화에서 착~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구약에서 “에무나”나 “에메스”가 사용된 용례를 보면…
좀 그렇게 보인다.

구약에서는 ‘믿음’이라고 번역을 할만한 자리에 많은 경우
‘신실함’을 집어 넣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예수님 당시에, 초대교회에서 유대문화의 배경울 가진 사람들이 피스티스로 번역해서 단어를 사용했을때…
그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faithfulness, steadfastness, truthfulness 등의 개념이었을수도 있겠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표현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라는 의미라던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진리라고 인정한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할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신실하다’라고 풀어서 생각해야 더 적절하지는 않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debate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히브리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다.
그것이 구약 대부분의 narrative 이고!

믿음 (3)

자, 그럼 이중에서 신약과 구약에서 모두 사용된 에무나 אֱמוּנָה 를 한번 살펴보자.
‘에무나’가 사용된 하박국 2:4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대로 인용한다. (로마서 1:17)

이것이 종교개혁의 모토가 되었던 그 중요한 구절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역시나 하박국에서의 에무나는 로마서에서 피스티스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에무나” 라는 명사를 왜 하필이면 헬라문화에서는 “피스티스”로 옮겼을까?
문화가 다르면 당연히 단어가 일대일로 match되기가 어렵다.
하다못해 한국어의 ‘친구’라는 단어와 영어의 ‘friend’라는 단어는 거의 비슷한 단어이고, 번역을 할때도 바로 엇갈려 사용하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적으로 사용하는 용례가 사실 약간 다르다.

마찬가지로,
히브리문화에서의 “에무나”는 헬라문화에서의 “피스티스”와 살짝 다른 면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이 하박국 2:4을 가지고 왔을 때는,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이 번역했기 보다는,
이미 그때 있었던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을 참고했을 것이다.
최소한 70인역에서 “에무나”를 번역해 놓은 방식이 직간접적으로 바울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70인역을 보면 하박국 2:4의 “에무나”를 “피스티스”로 번역해놓고 있다.

아.. 물론 하박국에서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한 반면, 로마서에서는 <그의> 라는 내용이 빠져있다.
이건 또 다른 토론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넘어가자.

그리고 또,
신약에서 faithful, trustworthy 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보면, 그중 대다수가 피스티스의 여러가지 파생형의 단어들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서 달란트비유에서 주인이 돌아와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이야기할때의 ‘충성된’의 단어는 πιστός (pistos, 피스토스)이다.

헬라어단어 피스티스에도 ‘신실함’ 혹은 ‘믿을만함’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 그래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에무나가 신약에서 번역될때는 피스티스라는 것.

믿음 (2)

“faith” 라고 해서 영어성경 신약에서 search를 해보면 당연히 많은 본문이 쭈루룩~ 나온다.
그중 살짝 다른 의미로 쓰였다거나 하는 것들을 좀 걸러내면…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믿음(faith)는 πίστις(pistis, 피스티스)라는 헬라어 단어가 쓰였다.
그래서, 이 피스티스 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쓰인 것들을 쭈루룩~ 검색해보면 대부분 ‘믿음’이라고 번역하기에 적절한 곳에 사용되어있다.
말하자면 피스티스 = 믿음 이렇게 확인이 되는 셈이다.

자, 나는 Greek 단어인 πίστις(pistis) 가 믿음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은 이해를 했다.
그런데…
분명히 그 믿음이라는 개념은 헬라문화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히브리문화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개념은 그렇다.)

자…
그러면 과연 구약에서 이 ‘믿음’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한번 보자.

faith라는 단어를 NASB에서 찾아보면 사실 구약에서는 많이 나오질 않는다.

신명기 32:51
욥기 39:12
시편 146:6
하박국 2:4

딱 네개가 뜨는데,
그나마 신명기에 나오는 것은 믿음을 저버렸다는 문맥에서 faith가 사용되는데 히브리 단어로는 מָעַל (ma’al, 마앨)이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것은 믿음을 저버리다, 신실하지 못하다는 동사로 부정적인의미로 사용되는 하나의 단어이다.
그러니까, 일단 이 논의에서는 제껴두고…

나머지 단어들을 보면
욥기 39:12 에는 אָמַן (‘aman, 아맨) 이라는 동사 단어가 쓰였고,
시편 146:6 에는 אֱמֶת (’emeth, 에메쓰) 이라는 명사 단어가 쓰였고,
신약에도 인용되고 있는 하박국 2:4을 보면 אֱמוּנָה (’emuwnah, 에무나) 라는 명사 단어가 쓰였다.

그.런.데.
대충 눈치를 챌 수 있겠지만, 아맨, 에메쓰, 에무나는 어근이 같다.
실제로 Lexicon에서 찾아보면 같은 어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것은,
아맨, 아메쓰, 에무나 라는 세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가지고 구약에서 찾으면… 히야…
완전 쭈루룩~ 많이 나온다!

이중 아맨은 동사로, 어떤 것은 believe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44번), faithful 이라고 번역된 것인 22번 이나 된다.
그 외에도 trust, steadfast, sure 등등으로 번역을 했다.

에메쓰는 truth라고 번역한 것이 92번, true 라고 번역한 것이 18번, truly가 7번으로 대충 모두 truth, true 의 의미로 쓰였다.

에무나는 faithfulness로 번역한 것이 18번, truth가 13번 faithfully가 5번으로 이것도 역시 truth, faithfulness, steadfastness 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겠다.

믿음 (1)

도대체 믿음이라는건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사람/인격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등이 하는 말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에 의탁하는 것이 될수도 있겠다.

영어로는
believe in (existence)
believe
trust

등으로 번역할수도 있겠고.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것?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에게 나를 의탁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것일까?
혹시 이 가운데 어느 한 개념이 다른 개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나는 신학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헬라어, 히브리어 당연히 이런거 잘 모르고,
아마 지금 내가 여기에서 몇번에 걸쳐서 써보려고 하는 내용들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다 자세히 파헤쳐저서 설명된게 어딘가 있겠지만… ^^

그냥 나 혼자서 해본 생각들 몇개를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학회 (6)

이건, 학교에 있지 않은 완전 외부인이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아마 학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시각이 있을 수도 있을텐데
(공대쪽 이야기)

나는 주목할만한 innovation이 학계(academia)에서 일어나지 않은지는 꽤 되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하는 연구들이 꽤 괜찮은 innovation으로 연결되기도 하였고,
또 좀 폭넓게 ‘학계’라고 부를 수 있는 기업 연구소들 (IBM TJ Watson이나 AT&T Bell lab, HP labs 등등)이 있어서 그쪽에서 꽤 괜찮은 것들이 나왔었다.

이르게 보면 80년대, 좀 늦게 보더라도 90년대에는 그러나 innovation의 핵심축은 기업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innovation이라는게 주로 internet과 관련된 것이 되어버린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어서는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90년대에는,
기업에서 빨리빨리 전진하느라 미쳐 챙기지 못한 조금 더 ‘academic’한 연구들이 학계에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90년대를 지나면서는 그렇게 academic하게 해야하는 분야들이 정말 많이 없어져서 희소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계에서는 ‘cool’한 것을 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정말 보면 cool해 보이는 것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한 5~10년전까지만 해도.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학교에서 하는 cool한 것들이 현실성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현실성이 부족한 아이디어를 기업에서 받아서 하기에는 기업의 전진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러니 점점 학계와 기업의 간극이 벌어져버린다.

이게…
뭐 이것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더 큰 문제는,
그렇게 ‘cool’한 것을 주로 배우면서 아주 원칙적인 기본기를 많이 다지지 못한 교육이 대학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innovation은 기업에서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그것에 맞는 사람들이 제대로 길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회사에서도, 정말 쓸만한 사람을 뽑고 싶으면 해당 분야에서 석,박사를 한 사람을 뽑는것보다 해당 분야의 industry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더 보게 된다.
학교에서 그거 했다고 뭘 알겠어?..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적어도 내가 보고있는 학교쪽의 trend가 좀 바뀌어져야한다고 (감히) 생각한다.

첫째, 기업에서 더 잘 할 수 있는 cool한 것을 하려는 시도를 조금만 줄이고,
정말 fundamental하고 academic한 것들을 더 많이 다루어주면 좋겠다.

둘째, 정말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 되면 좋겠다. grant를 잘 따내는 사람이나 cool한 paper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이 길러지면 좋겠다.

셋째, ‘연구’에 앞서서 ‘교육’이 조금 더 강조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지금의 innovation의 무게중심은 기업쪽에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 기초에 해당하는 연구는 많이 하지 않고, cool해 보이는 연구만 많이 하기 때문에… 기업이 해야하는/할수있는/하고 있는일들을, 기업보다 더 못한 환경에서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학계 내에서는 서로 박수도 쳐주고 환호도 질러주지만, 막상 현실속에서 그걸 가지고와보면 현실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괜히 이상한 겉멋만 든 사람들이 학교에서 길러져 나오는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정말 engineer로서 일을 해야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skill set을 갖추고 나오지 못한다.
그 상황에서 잘 적응한 박사과정 학생은 또 다시 현실성 부족한 cool한 grant를 잘 쓰는 사람으로 길러져 또 다시 교수가 되고.

오랜만에 학회에 갔다가 괜히 bias 많이 된 오지랖을…
잘 알지도 못한채 지적질을 했다기 보다는, 회사에 다니면서 학교쪽에 바라는 것을 쓴 것으로 읽어주시길.

학회 (5)

나는 교수가 되고 싶었다. 잘 할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적성에 맞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교수가 되지 않고 회사에 오게 되었다.

이렇게 학회에 갈때마다 나는 ‘내가 교수 안하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을 하곤 한다. ^^

이번에 학회에 가서 하루 저녁에는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을 먹었다.
그 친구는 오래 학교쪽과 학교 연구소 등에 있다가 최근에 보스턴에 있는 회사에 들어간 친구이다.
그 친구가 그러기를…
회사에 오니까 제일 편한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잘났소~ 라고 이야기를 덜 해도 된다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가 ‘시장’이라고 하는 비교적 공정한 곳에서 평가를 받기 때문에.
반면 학교에서는
‘우리’가 아니고 ‘내’가 잘났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야하고,
그것을 평가받는 field도 그렇게 넓지 않아서 때로는 그 평가 기준 자체가 공정하지 못해보일때가 있다고.

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이 assessment에 동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도 그 친구와 비슷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학계에 있었더라면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들을 만드는데 참여해왔다.
진짜 cool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많이 했었고.
이게…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잘할 필요가 없고,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그것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다.

학회 (4)

나는 보스턴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보스턴에 더 있으려고 정말 노력을 많이 했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한 아주 열심히 여기저기 apply를 했고,
사실 내가 가기엔 너무 보수나 직책이 낮은 일들에 apply를 하기도 했었다.
아내가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했었기 때문에 함께 움직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보스턴 지역에서 job을 잡지 못하고 silicone valley로 오게 되었다.)

그때 내가 정말 완전 열을 내면서 꼭 하고 싶었던 분야의 일들이 있었다.
소위 ‘nano technology'(나도 기술)이라고 하는 것들인데…
뭐 워낙 그 분야가 넓고 다양하긴 하지만…

하버드의 어떤 교수 그룹에서 post-doc을 하고 싶어서, 그 교수에게 이메일을 한 50통쯤은 보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교수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고, 나는 결국 내가 그렇게 더 해보고 싶었던 그쪽 분야로 내 전공을 바꾸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로 와야 했다.

이번에 학회에서 그 교수가 하는 talk을 들었다.
참 재미있는 건, 그때 내가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분야의 그쪽 분야의 일이 아니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 관한 발표였다.

하버드의 잘나가는 교수이므로 아이디어도 참신했고,
학교에서 하는 연구치고는 꽤 scale도 크긴 했는데…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는 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연구였다. (학교에서 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럴수 밖에 없겠지만.)

나는,
보스턴에서 열심히 이메일을 보내고 job apply를 했던 보스턴의 한 겨울을 기억한다. 참 그때는 추웠었다.
이제 나는 그때 내가 그렇게 그 밑에 가보고 싶었던 교수의 발표를 들으며 혼자 씨익~ 웃어볼수 있는 상황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좌절했지만 지금은 더 잘 풀렸구나… 그런 식의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대로 늘 길이 열리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름대로 내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것들을 그래도 선용하셔서 꽤 괜찮은 plan B 혹은 plan C로 인도해 주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회 (3)

예전에 나는 박사과정때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공정(process)’과 관련된 일을 했었다.
그때 당시에도 벌써 여러 회사들에서는 sub-micron이라고 해서 1 micron보다 작은 크기의 패턴들을 아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 한계에 부딪힌 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비밀이었다.

우리 지도교수는 우리 분야에서는 그래도 꽤 잘 알려지고 유명한 몇 사람 중 하나였는데,
벌써 그때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연구는 industry에서 못하는 연구가 아니라 안하는 연구들을 했었다.
가령 벌써 industry에서는 수십 nanometer의 패턴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왜 그게 그렇게 만들어지는 일을 모를때.. ‘인텔이 그걸 그렇게 잘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이러이러하다…’라고 설명을 하는 정도의 연구였다고 할까.
그나마 그 연구도 거의 끝물이어서, 사실 내가 우리 분야에서 그런 쪽의 academic paper를 낸 거의 막차를 탄 몇명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내가 박사과정 학생일때 학회에서 발표를 하면, 다른 학교의 대학원생, 일부 교수, 포스트닥 같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질문도 하고 말도 걸어오고 했었다. 그런데 가령, 인텔에서 왔다고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뒤에서 쭉~ 듣고 있다가, 씨익~ 웃고는 그냥 방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때가 많았다.
마치 짜아식… 그걸 이제 너도 알았구나… 라고 이야기라도 하듯이.

이번에 갔던 학회는 주로 academia에서 참석하는 학회였다. 특히 내가 주로 있었던 session은 거의 100% 학교에서 발표하는 논문들만 나왔다.
그중에는 내가 학교에 있을때부터 아주 유~명~한 교수도 있었다.

적어도 내가 속해있는 분야에서는,
학교와 industry사이의 간극이 너무 멀다.

industry의 innovation은 너무 앞서가고,
학교는 industry가 하지 않는 일들중 어떤 일들을 하는데… 현실성이 많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나는 주로,
조용히 듣다가…
씨익~ 웃고는 방에서 나오곤 했다. ^^

그리고 가끔 똑똑해 보이는 대학원생들에게는 내 명함을 주면서, 좋은 논문들 더 나오면 내게 보내라… 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