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2)

지금 내가 와 있는 이 학회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오는 학회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정.말. 한국 사람들이 많다!

우선, 미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다. 이제는 아주 잘 알려진 대학의 교수로 있는 사람들이 꽤 있고, 무엇보다 여러 학교들에서 대학원생으로 있는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다.
지금 내가 참석하고 있는 session들은 한국에 관련된 industry가 없는 분야인데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적어도 내가 한참 학회에 열심히 참석하던때에 비해서 한국 사람들의 미국 진출이 훨씬 다양하고 활발해진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두번째로, 한국에서 온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다!
여러 대학의 교수들도 많고, 대학원생들이 완전 떼로 몰려다닌다!!
내가 한국에 있을때는 미국에 학회로 오는게 그리 쉽지 않았는데 (심지어는 교수들도)
이제는 대학원생들이 완전 떼로 몰려다닐만큼 많다.
그리고 예전에는 한국에서 하는 발표들이 그저 양으로 밀어부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제는 꽤 양질의 paper를 발표하는 것도 심심치않게 본다.
한국 대학의 젊은 교수들이 invited talk을 하는 일들도 드물지 않고.

내가 관련있는 분야는 미국이 아니면 주로 유럽(스위스, 독일을 중심으로 일부 스웨덴, 이태리, 프랑스)이 강세이다. 그런데 내가 받는 느낌은 한국 대학들에서 하는 발표들이 유럽 대학들에서 하는 발표들보다 양도 많고 질도 떨어지지 않는다.

Very impressive!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10)

욕망 자체를 죄악시 하려는게 아니다.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욕망 자체도 분명히 창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욕망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어그러진 세상 속에선, 역시 어그러져 있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 그 안의 궁극적 만족이 하나님 그분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이 내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가 내게 만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한정 사랑하는 것이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에서는,
바로 이런 기독교의 모습을 찾기가 정말 어려워 보인다.

내가 속해있는 이 현대 기독교에서는,
어쩌면 그래서 내가 믿고 있는 이 기독교에서는,
궁극적 만족이 인간적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 듯 하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9)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돌맞을(?) 이야기 계속… ㅎㅎ

내가 또 좀 까보고 싶은 것은, ‘취미활동’ 혹은 그와 비슷한 활동들이다.
자, 여기서 역시 나는 취미가 긍정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오히려 취미가 건강하게 작동하면 대단히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취미활동, 자신만의 기호에 맞는 여러가지 활동등에 현대인이 유난히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분명히 도저히 그럴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데, 특정한 취미활동을 위해서 무리한 소비를 하는 것을 아주 흔히 본다.
어떤 특정 활동이나 기호식품등에 과하게 시간을 많이 쓰는 것도 아주 많이 본다.
이게 내가 살고 있는 실리콘밸리가 유난히 더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럴까?

나는 이것 역시, 욕망에 대한 긍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계속 해서 추구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한 밸런스를 넘어가고 있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처음엔 어떤 취미나 기호활동등의 예를 좀 들면서 글을 써보려 했는데…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다 뭔가 하나씩 하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뭐라도 하나 쓰면 그 누군가를 까는 글이 되어버린다. -.-;
그래서 뭐 딱 예를 하나 들기가 참 머시기 하다.
그래도 이렇게 써도 무슨 의미인지는 전달이 되겠지… ^^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8)

자, 그럼 진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겠다.

여성이 추구하는 ‘성공’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먼저 내가 분명히 할것은,
나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모두 세상에서 공정하고 평등하게 여겨져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는 여성과 남성이 그렇게 공정하고 평등하게 대해지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불평등과 불합리함은 나를 화나게 한다.
(이걸 꽉~ 미리 한번 써 놓고…)

여성이 남성들과 같이 경쟁했는데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게 취급받아서 같은 reward를 받지 못한다거나, 똑같은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선, 일차적으로, 그 불평등에 대해 분명히 주목하고, 그 불평등이 정의롭지 못함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런 접근이 자칫 욕망을 긍정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지는 많이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둘 다 성공과 자아성취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둘다 그래서 똑 같이 일했다.

그런데 남자가 더 큰 자아성취를 얻고 성공을 얻는다.
여자는 그보다 못한 성취와 성공을 얻는다.

그러면 여기서…
여자가 갖는 자아성취의 욕망 자체의 죄성에 대한 충분한 언급없이…
그 불평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balance된 접근일까?

아, 물론 여기서 남자가 더 성공과 성취를 얻었으므로,
그 남자가 어쩌면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그 성공과 성취에 대해서 많이 경계하고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불평등의 이슈를 다루어 내면서, 그리고 그 불평등의 이슈를 시정하기 위해서 자칫…
어그러진 욕망 자체를 모두 긍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안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차별을 그냥 받아들이자는게 아니다.
차별을 다루어 내지만, 그러면서 자칫 욕망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기독교 페미니즘이 분명 가능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기독교 페미니즘이 이런식으로 욕망의 정당화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진심으로 우려한다.
여러 형태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접근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기독교 내에서 아주 많이 발견한다.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사회정의’를 이야기하면서 가끔은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한번 생각해본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7)

성공/번영하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치중립적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몇가지의 이유가 있다.

– 성공의 동기가 결국은 강한 자기애(self-love)에 기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의 성공은 그 성공의 그림자로 인해 어떤 사람들에게 고통이 되기 십상이다.
– 성공/자기성취는 많은 경우 그 사람의 궁극적 관심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버린다. ‘하나님 없이도 사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고 착각하게 되어버린다.

물론,
돈을 버는 것, 성공을 하는 것 자체를 모두 죄악시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이나 번영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공과 번영과 명예등을 향한 욕망은 그것을 쉽게 가치중립적이라고 여기기 대단히 어렵다고 본다.

기독교 내의 건강한 영성신학자/영성가 들이 성공/번영/명예 등등에 대해 경고하고 또 경고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 시대에 돈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돈 자체가 갖는 어떤 영적 power가 있다…
이렇게 리차드 포스터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성공/자기성취/번영/명예 등은 정말 개인과 공동체가 지극히 조심하면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내가 살고 있는 삶의 context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6)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을 참기 힘들어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가볍게는, 무엇을 먹고 싶다 (craving)을 참는 것을 힘들어 하기도 하지만,
조금 더 심각하게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 어떤 lifestyle을 가지고 싶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참 어려워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부모님 세대는, 자신이 무엇을 이루겠다는 꿈이나 자신이 무엇을 누리겠다는 생각보다는 훨씬 더 우리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셨던 것 같고,
자아실현보다는 생존을 위해 사셨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생존을 위해 살기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해 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흔히 직장생활 이라는 것을 그릴때, 힘들고 아니꼽고 사표쓰고 싶지만 가족을 위해 참으면서 열심히 일한다는 식의 그림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것을 포기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생존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힘들어하기 보다는 자기의 자시 자신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채우지 못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왜 그럴까.
아마도 생존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이 되니까 ‘자아실현, 자기 만족’에의 욕구가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겠지.

나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가며 가족이나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특성과,
내 꿈,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요즘 젊은 세대의 특성,
이 두가지를 모두 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내가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묻기도 하고, 더 많이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어떻게 네 자신의 욕망에 대한 확신을 그렇게 강하게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정말 내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그 이해 당사자가 나 자신일때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결정을 할때면, 처절하게 이기적인 모습으로 하기가 너무 쉽고,
그런 이기적인 결정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내 죄성에서 비롯되기 너무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내 이해에 관련된 어떤 결정을 하려 할때는,
정말 내 의도가 얼마나 선한 것인가를 아주 여러번 점검하려 노력하고,
그렇게 한 후에도 내 판단이 충분히 선하다는 것을 정말 믿기 어려워서 힘들어 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쉽게 어떤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5)

죄와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아주 큰 사명이자 특권이다.
사회적 죄와 싸울뿐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와도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형태로 내 안에 들어있는 왜곡된 욕망을 잘 발견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불편한 confrontation을 피하지 말아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죄와, 왜곡된 욕망과 계속해서 싸워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왜곡된 욕망의 민낮을 보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왜곡된 욕망이 폐혜를 피하기 위해서 욕망 자체를 대폭 용납하고 허용하고자 하는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아실현과 성화 중 어떤 것이 더 우선되는 개념일까?

나는 이 두가지가 거의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성화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그 백성이 하나님을 닮은 백성이 되는것,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그 부르심의 핵심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지나치게 자아실현을 높은 가치로 두면서 죄와 싸우는 성화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아마 다음주에는 이와 관련된 다소 controversial한 이야기를 더 던져볼 생각이다. 아마 어떤 분들은 심지어 다소 upset할 수 있을 만한 ^^)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4)

그런데 교회에서는 흔히…

종교적 언어로 사탕발림된 욕망을 긍정해준다.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을, 주님의 비전을 찾는다는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때,
목사나 교회의 자도자들은 그 사람이 정말 주님의 비전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역시, 속으로는 그래서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나,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나 모두,
왜곡된 종교적 언어로만 소통할 뿐,
솔직한 욕망의 언어로는 소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쪽팔리니까. -.-;

이건 정말 좀 역겨운 일이다.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다음과 같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욕망의 언어로 표현하되, 그 욕망을 넘어서는 거룩한 바람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령,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것이 내게 허락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물론, 기도요청을 받은 사람 역시 그렇게 투명한 언어로 기도한다.
이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혹시 그것이 이 사람을 파괴시키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주시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정도를 공급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점차 돈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더 깊게 알게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에 대해 쉽게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언어가 투명하다. 욕망을 종교적 언어로 채색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신앙의 피상성을 많이 피할 수 있다.

리차드 포스터가 이야기했던 것 처럼,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3)

그런의미에서,
이런 왜곡된 욕망의 긍정은 좀 투명해질 필요가 있다.

뽀대나는 직장에 다니고 싶은 욕망이 있을때,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뭔가 쑥쓰러워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 라던가,
비전을 주시옵소서… 기도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나는 무슨 무슨 회사에 가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고 싶다.
나는 얼굴이 예쁜 남편/아내를 맞아 결혼하고 싶다.

이렇게 솔직하게 욕망은 욕망을 제대로 설명하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치 숭고한 목표라도 되는양 사탕발림을 하는 것은 상당히 역겹다. -.-;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 자체를 추구하는 것을 너무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한다면,
그냥 그 사람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자신과 주변 사람이 그대로 보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욕망 자체를 모두 긍정하라는 뜻을 결코 아니다.
요히려 여러가지 욕망들 가운데 대부분은 왜곡되고 어그러진 욕망이고, 따라서 죄의 component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한다.

다만,
그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더럽고 오염된 욕망의 바다에 빠져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2)

교회에서 흔히 ‘기도제목을 나눈다’는 표현을 한다.
난 이 표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기도를 요청한다, 내가 기도하는 내용을 나눈다 등등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표현일텐데 말이다.

하여간, 각설하고…

그렇게 교회에서 ‘기도제목을 나눈’ 리스트를 쭉 보면…
결국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에 적절하지 않을 경우, 그 상황이 바뀌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것들이다.

병이 낫기를 바란다거나,
좋은 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좋은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잘 크거나….

아, 물론,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걸 그냥 내가 이걸 하고 싶다… 이렇게 저렴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주님을 뜻을 알기 원한다거나,
비전을 세우고 싶다거나,
인도하심을 구한다거나…

이런 대단히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런 것일까?
내 욕망을 추구하여 이루는 것일까?
그걸 좀 적나라하게 추구하는 신앙을 오히려 기복신앙이다, 번영신학이다 해서 비난하고 비웃지 않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욕망은 대단한 것이고,
그 욕망 자체를 종교적 언어로 정당화해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나 기도를 통해서, 곡조로 부르는 찬양을 통해서 모두 욕망의 추구, 욕망의 성취는 반복해서 강조되고, 조장되고,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