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지 않아서 힘든 신앙 (2)

Tony Campolo가 예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들은 적이 있다.

젊은이들은, 기독교가 너무 어려워서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기독교를 너무 쉽게 만들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나는 정말 많이 공감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더 깊이 있는 철학을 더 이야기하고, 더 복잡한 논리가 필요하고…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에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타협하지 않는 헌신, 사랑의 급진적 실천, 죄와의 끊임없는 싸움, 하나님에대한 절대적 신뢰… 뭐 그런 것들은 아닐까.

그래서 사도행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서 기술되어있는 것 처럼, (행 5:13)
그 사람들을 참 좋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막상 그 그룹에 join하는 것은 망설여 지는.. 그런 모습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렵지 않아서 힘든 신앙 (1)

소위 seeker friendly church 라는 것이 유행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 물론 지금도 그 십수년된 그 개념을 여전히 붙들고 뒤쳐져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 내용은 결국 이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와서 불편하지 않게 느낄 수 있는 교회의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는 것이다.

그 내용 자체로는 결코 나쁘지 않다.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가 함께 추구하는 신앙의 깊이가 얕아져버린다는데 있다.

요즘과 같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과연…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서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과,
그 신앙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껴서 신앙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쪽이 더 많겠는가?

이 시대에 정말 교회가 더 뼈아프게 고쳐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cool한 문화와, 시류에 어울리는 음악과, fancy한 presentation을 더 추구해서 seeker들이 편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천박하고, 이기적이고, 자기모순적인 값싼 모습을 벗어버리고, 오히려 더 counter-cultural한 모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진입장벽이 높아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깊이있는 것을 추구해야하는 시대인 것은 아닐까.

사랑에 대한 단상들 (14)

두려움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지나치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게으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완벽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기과시등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모습들의 핵심에는 결국 ‘나’가 있다.
‘나’라는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자기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에 싸여 여러가지 왜곡된 모습들을 보이게 된다.

그런의미에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성경의 말씀은,
촌철살인이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13)

“Earning the right to be heard”라는 표현이 있다.

말하자면 이런거다.
어떤 나라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본가와 지주를 처단하고,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정죄하며 유물론적 공산주의 사상에 저항하는 것을 반동이라고 몰아부치는 폭풍우가 불고 있었다.
가차없이 공산 혁명을 진행시키며 많은 숙청과 처형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떤 마을에 갑자기 전염병이 돌았다.
홍위병들은 그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 지역의 공산혁명이 주춤했다.

그런데,
그 마을에 박해를 받아 쫓겨다니던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이 그 전엽병에 위험을 감수하고 그 마을의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점차 그 전염병이 잦아들게 되었고, 홍위병들은 그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마을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 공산혁명의 리더가 그 홍위병들을 저지하면서 말했다.
“Let them do it. They earned the right to be heard”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사랑이 그처럼 극단적이어야 했을만큼, 세상이 그로부터 멀어졌던 것이었다.
그 세상에 바로 내가 있(었)다.

다음 주에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들 (4)

무엇보다도,
사랑이 별과 같이 빛나게되길 간절히 바란다.

자기애, 헌신없는 감정, 자기 agenda를 이루려는 조작(manipulation), 어떤 대상에 대한 미움의 반작용으로서 나타나는 내편 감싸기… 등등과 같은 거짓된 사랑이,
유일한 사랑의 근원이신 그분이 친히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초라하고 거짓된 것으로 드러나게 되길 바란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잃어버린 사람들,
쾌락, 성취, 승리, 비교우위 등등으로 사랑을 대체해버려 갈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다툼과 정죄, 미움과 비난 이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아니고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집회가 되길 바란다.

사랑은 기독교의 도구이자 방편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것이 명확해지는 집회가 되길 정말 바란다.

….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우리 간사 후배들에게…
그저 많이 미안할 뿐이다.

다음 주에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들 (3)

내 신앙이 성숙해가는 속에서,
빠뜨릴 수 없는 성숙의 과정은 깊이 있는 기도였다.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한 사람을 생각하며,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더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관심에 내 관심을 조금 더 맞추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섬기는 사람을 향한 가슴을 찢는 기도는,
결국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중요한 매개였다.

나는,
시카고의 두개 컨퍼런스에 모이는 귀한 학생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기도가 많이 담기길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란다.

특히…
우리 간사 후배들에게 그런 눈물의 기도가 끊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많은 수고로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그곳에 모인 학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 가슴에 담겨져…
기도가 그저 터져나오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다음 주에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들 (2)

특히 금년에 더욱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주 소수, 정말 진실된 몇 사람이 세워지길 바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열렬히 반응하는 것을 보는 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정말 몇사람만 된다 하더라도,
많은 자원과 인력과 노력을 낭비해서,
그 몇 사람을 위해서 이런 집회 할 만 하다!

아니, 그런 사람이 딱 한 사람만 있다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엄청난 자원을 낭비해가며 이런 일을 계획하실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산술적 계산이나 통계적 데이타 분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때로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것과 같은 그분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아주 뜬금없이 한 사람, 두 사람을 세우심으로써 시대를 변화시키는 것을 하셨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바로 그것을 금년에 더욱 간절히 바란다.

다음 주에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들 (1)

예전에,
툭하면 기도하자고 내게 압박(?)을 가해오던 팽모 형님은,
96년에 내가 처음 코스타 집회 참석 등록을 하고나니, 그 집회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한다며 나를 자꾸만 독려했다.
아니, 나는 뭐 코스타 관계자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그 집회 위해서 기도할만큼 내 영적인 budget이랄까 그런게 넉넉한 것도 아닌데… 이 형은 그래도 기도를 해야한다고…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것이 맞다면,
그렇게 해서 시카고에서 만났던 다른 형제 자매들로부터…
그렇게 이 집회를 위해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심심치않게 들었었다.

아, 물론 모두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참석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을테지만,
그렇게 하나님께서 미국 구석구석에 나 같이 어리버리한 사람까지도 기도하게 하시면서 그 집회를 준비시키셨었다.

그 집회에서 나누어졌던 설교나 강의를 다시 생각해보면,
수준미달의,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들이 물론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시고 세우신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경험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있는 이 순간에,
미국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사람이 뭐 대단히 신앙의 연륜이 대단하지 않아도 좋고,
신학적 훈련을 잘 받지 않았어도 좋다.
그냥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고,
그렇게 이 집회로 불러오시는 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Google과 Apple (5)

Apple에서는 사람을 뽑을때,
내가 이 일을 좀 해야겠는데, 이걸 제대로 좀 도와서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뽑는 것 같다.

그런데,
Google에서는 사람을 뽑을때,
내가 이 일을 할 수 없는데, 누가 이걸 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뽑을 때가 많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Apple에서는 그 사람의 기능적 측면에 많이 주목해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뽑는다.
그런데 Google에서는 그 사람의 존재적 측면이랄까… 그런 걸 참 많이 고려한다.

그래서 Google에서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소위 ‘interview training’이라는걸 아주 꽤 열심히 시킨다.
그래서 뽑는 사람들이 충분히 “Googley”한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12)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과연 관용(tolerance)이 필요할까?
나는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관용, 똘레앙스, tolerance라는 표현은 다음의 몇가지 이유 때문에 불편하다.

1. 우선, ‘약자’는 관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노예가 그 주인에 대해서 관용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일등병이 소대장에게 관용이 필요한가?
다시 말하면, 관용을 이야기하는 현대의 기독교는 어쩌면 ‘파워게임’이라는 frame에 이미 타협하고 정착해버린 기독교인 것이다.
높아지지 않고 낮아지고,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기독교의 핵심 정신과, ‘관용하는 기독교’라는 이야기는 서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2. 기독교가 낮아져서 섬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았다는 깊이 있는 자각이 부족하고, 우리가 이제 온 세상을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한다는 생각을 잊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사랑이 실종되어 버리면 섬김이나 낮아짐이 사라져 버린다.
관용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을 잃어버린 기독교일지도 모르겠다.

3. 관용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도피일 수 있다.
연인 사이에, I love you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I tolerate you 라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보자.
그게 무슨 연인인가.
우리가 무슬림을, 무신론자들을 tolerate한다면 그건 우리가 그들을 love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예 ‘hate’과 ‘discrimination’이 기독교의 norm이 되어버린 것같은 시대에는 그나마 tolerate이라고 좀 하면 좋겠지만 서두…
그리고 사랑이 정말 힘들때, 일단 tolerate이라도 좀 해보자고 이야기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에 대한 포기선언은 아닐까.

4. 나는 기독교가 세상에 보여주는 사랑이 변증적(apologetic)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으로 인해 기독교의 본질이 보여지고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영광이 빛난던 시기마다 기독교는,
파워를 추구하지 않고 박해를 당했고,
관용하지 않고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