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 세계관 (9)

그렇다면,

과연 이런 세계관은 세상과의 interaction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주는가?

그저 세상과 격리된 ‘초월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suggest하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면이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관에서는,

일반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은 복음이 관심을 가지는 ‘약자’들은,

그들이 세상을 바꿀 힘도, 심지어는 세상을 거스를 힘도 없음을 전제한다.

물론 어떤 특별한 재능을 더 주신 이들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헌신해서 일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약자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이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일차적인 방법은,

자신이 경험하는 초월을 통해서 세상을 trivialize하는 자세를 통해서이다.

그것을 통해, 세상과 다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흐름을 바꾸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없고, 바꿀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라는… 어찌보면 passive한 생각과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초월적 세계관 (8)

이렇게 현실 속에서 초월을 경험하면서 사는데에는,

중요한 전제들이 있다.

–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라는 믿음

– 이 땅에서 경험하는 고통이나 악의 문제가 언젠가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소망.

–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그 궁극적 소망이 이루어 지기 전까지,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현실을 초월해야 한다는 믿음

따라서 거대담론적 접근 자체가 무용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이 초월성이 건강한 바탕위에 서기 위해서는,

거대담론적 접근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때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인격적 초월성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key는,

‘은혜’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앞에서 언급한 건강하지 못한 초월성을 보이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은혜’를 소홀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월적 세계관 (7)

현대에,

초월적 세계관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첫번째로 피상성이다.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들을 좀더 깊이 곱씹어 그 의미를 체득하기 보다는,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휙~ 던져버리는…

마치 30권짜리 만화책을 만화방에서 보는 것과 같은 식으로 신앙을 다루어내는 그런 피상성은 건강한 초월성의 첫번째 적이다.

두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무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부흥의 시기’ 믿음의 선배들과 그 분들을 건강하게 해석해냈던 마틴 로이드-존스 와 같은 분들로부터 배울 것이 대단히 많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과정을 겪었다고 해서,

그분과 동행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여러 여정 속에서 겪는 고통, 좌절, 회복, 소망 등등을 통해 하나님과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과정은, 많은 경우 매우 긴 시간이 걸리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것을 넘어서서, 그 하나님께서 내 삶에 관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사실… 이 과정이 매우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것 같이 들리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과정은, 신앙생활의 백미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동행의 삶의 과정을 겪고 있어야 초월성을 향한 바른 갈망이 생기게 되고, 그것을 추구하며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네번째로,

shallow한 문화이다.

이건 한가지 예를 좀 들면 좋겠다.

선배중에, 유난히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분이 계시다. 그런데 이분은 결혼생활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의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대단히 불행한 부부생활을 하더라도 그 가운데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신다. 그런 과정 속에서 깊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배워나가야 한다고.

그런데… 이 선배의 부인은, 오랜 우울증(depression)에 시달리고 계시다.

이 선배의 결혼생활의 여정을 상상해 보면 대충 이랬을 것 같다.

‘건강한 신앙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핑크빛 꿈을 가지고 결혼을 했다. 그것도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만나서.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이 아내가 우울증 때문에 대단히 어렵다. 감정의 기복등을 감당해내는 것도 어렵고 우울증에 따른 육체적 증상들도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을 섬기겠다고 했던 이 선배의 웅장한 ‘비전’도 마치 이 아내때문에 좌절되는 것 같은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나는 내 아내를 이렇게 사랑하니까 이 모든 것을 꿋꿋하게 버티면서 끝까지 의지적으로 사랑을 지켜나가야지…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오래 그렇게 힘든 결혼생활을 지내가면서,

하나님과 씨름도 많이 하고,

자신의 죄인으로서의 모습도 많이 발견하고, 그래서 아파하면서 기도도 하고…

아내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으로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조금씩 배워나갔을 것이다.

나는 이 선배가 얼마나 지금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선배가 정말 ‘거룩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혼인관계라는 신비한 연합을 통해, ‘하늘이 열리는’ 초월을 경험하고…

그 초월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걸 너무 쉽게,

상담이라는 미명하에…

정답을 prescribe하는 식의 접근은,

초월과 신비를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경지를 영영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road block이 아닐까.

그런의미에서,

나는 현대 복음주의의 shallow함과 가벼움이 몸서리치도록 싫다…

초월적 세계관 (6)

“종교를 민중의 아편” 이라는 말은,

기독교에 대해 대단히 모욕적이다.

자끄엘루가 이야기했던 것 같이,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가치이다. 

그 기독교가 민중의 아편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또 한편,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악, 죄의 속박 아래에서 대단히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개인적인 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화 되어 있는 사회적인 죄악, 어그러진 피조세계의 질서, 악한 이들의 악한 행동으로부터 나오는 폭압 등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심각한 depression, 각종 사회적 injustice, 질병, 마음의 상처, 생계의 압박, 인간 관계의 어려움, 경제적 어려움, 억울한 사고, 깨어지는 가정/관계, 범죄, 자연재해….

실제로 이런 거대한 문제들을,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다루고 그것을 풀어나가고자 노력하는 일은 대단히 소중하고,

어떤 이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부르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부르심은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그런 많은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 등을 다루어 내면서,

그저 그 속에서 견디어 내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지켜내는 것으로 부름받았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초월성’ 이다.

초월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기에 세상을 trivialize해내는 초월성 말이다.

사회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악의 문제가 더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요구는 더 커지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모든 삶을 던져, 신앙적 양심으로 그것을 해결하고자 투신하게 되지만,

또 깊은 초월성을 추구하면서 상황을 극복해가는 요구 역시 더 커지게 되는 것 같다.

악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내려는 시도는 매우 소중하고, 그것인 대단히 복음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특별히 그럴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초월성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것 역시 대단히 복음적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약자의 복음 (Godspel of the poor)이고,

이차적으로 약자를 위한 복음 (Gospel for the poor)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초월성을 추구하는 요소가 있고,

이차적으로는 악의 문제에 대항하는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약자에게…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저 보통 사람들, 약자들에게…

복음은 세상이 제공해 줄 수 없는 ‘초월성’을 제공해 준다.

초월적 세계관 (5)

초월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빠뜨리지 말아야할 중요한 것은,

인격성이다.

인격성을 잃어버린 초월성은,

공허해지고 추상적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좀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하나님을 그저 초월적인 존재로 이해하고,

그분을 목표로 삼아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이 개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룰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면 초월성이 어그러지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신 인격을 드러내는 것인지,

십자가에서 마지막 흘리셨을 피와 눈물 한방울이…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등등을 가슴에 절절이 담아,

정말 주님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이,

건강한 초월성을 담보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다가,

주님이 마음에 사무치도록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갈망하는 것이라든지…

하늘의 구름모양이 조금 이상하기라도 하면,

혹시 오늘 주님이 다시 오시려나 하는 기대감에 하늘 저쪽을 바라보는 모습과 같은…

정말 주님의 인격적 존재를 내 모든 실존 속에서 받아들이고,

그분을 마음 깊이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속에서,

그분과의 그런 관계 속에서 초월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의 두 글에서 쓴 것 처럼,

주님의 목적되심을 잃어버린 것이라든지,

주님의 수단되심을 잃어버린 것 모두…

이런 인격성의 상실로 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첫번째 글에서 쓴,

시집살이에 힘들어하는 그 며느리는,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울고,

그래서 주님을 추구하는 그런 모습을 가진 그런 사람으로 나는 그려보고 싶었다.

그저 신비주의자가 아닌…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초월적 세계관 (4)

잘못된 초월성의 또 다른 예는,

하나님을 목표로 두고 있긴 한 것 같은데,

그 과정에 하나님이 상실해버린 경우이다.

나는, 

비뚤어진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이런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비뚤어진 평화주의적 세계관도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역을 넓히고 싶다는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표현해 내는 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저 정교한 전략과 계산과 논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소위 ‘젊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는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이런 성향을 흔히 발견한다. (나를 포함해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가 건강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고 거짓된 복음이 득세하는 것을 대단히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해내는 solution/과정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어 보인다.

궁극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바꾸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인식,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방법론도 하나님의 거대한 일하심 안의 작은 부분일 뿐이며, 자신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겸손함은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참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들에게 심정적, 정서적 동질감을 더 느끼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목표로 두고 과정에서의 초월성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보면,

더 마음이 아프다.

망가진 나 자신을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초월적 세계관 (3)

초월적이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결국은 초월성을 상실해버렸다는 것은,

신비를 상실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세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존재/임재를 잃어버린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대충 그 부류를 생각해보면,

우선, 하나님이 아젠다의 목표에 있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저 수단일 뿐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대단히 초월성을 추구하는 것 같아 보이는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오히려 그 목표에 하나님이 있지 않기 때문에, 초월성을 잃어버린 모습을 많이 보인다.

예수 믿고, 방언하고, 자기 문제 해결 받고, 병고침 받고, 미귀를 물리치고…

혹은 좀더 교묘하게 하나님을 목표에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선교를 하면서, 선교전략상 ‘영적인’ 부분을 악용하는 경우이다.

선교라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 구체적인 실행전략으로 초월적인 것을 추구한다.

영적 전쟁, 하나님의 권능…

그렇지만, 그 추구하는 정점에, 하나님 당신이 계시기 보다는, 선교적 목표가 있는 경우가 많다.

교회 성장, 교세확장, 전도, 선행 등등의 종교적 목표를 세운 후 그것의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련의 성향들은 모두 궁극적 의미에서의 초월/신비를 상실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그저,

현실 세계에서의 해결책으로 신비를 가져다 쓰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초월성은, 하나님 그분을 추구하는 것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뒤에 또 이야기 하겠지만, 하나님 그분을 추구하는 것에는 인격성이 매우 중요하다.)

초월적 세계관 (2)

한국 선교초기,

시어머니로부터 심하게 시집살이를 당하는 며느리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을 터이고,

그야말로 인격적 대우를 받는 삶 자체가 박탈당한채,

가난을 온 몸으로 싸워냐야하는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권서인(勸書人)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결국 남편몰래 얘배당을 출석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자.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여인에게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 기독교가 흔히 접근하는대로, 

그 여인을 기독교적 상담을 통해 치유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답’일까?

내 생각에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신앙은,

현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trivialize) 통로가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면,

현실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어쩌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눈을 피해 몰래 교회 예배당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기도를 하는 일을 통해,

‘광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과의 대면(encounter)가 너무나도 웅장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문제가 오히려 상대적으로 가볍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여인에게 있어서, 

현실은 단기적으로, 심지어는 장기적으로도, 개선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 질긴 목숨 끝내고 나면 저세상 가서는 편할 것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 젋다. 아직 챙겨야할 아이들도 있다.

상담이나 마음을 터놓는 대화 등과 같은 therapeutic한 방법으로 ‘치유’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분이신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하는 것을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이 마음속에 담는 ‘초월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과 나는 간데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이 여인이 경험하는 신앙의 요체일 수 있다.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며 살기 위해 세상을 변혁해나가는 것이라던가,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델은,

이 여인에게 적용되기 대단히 어려운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

지금 이 여인과 같은 위치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도 생각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다.

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위해, 이를 악물고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다.

여러가지로 사방에서 짓누르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대단히 많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적으로 개선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힘도 없다.

이런 이들에게,

‘그것은 너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거야’

세상은 변혁해라.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위에서 이야기한 여인과 같이,

교회 예배당에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초월'(transcendence)을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역설적이지만, 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닐까.

초월적 세계관 (1)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것은,

내가 받았던 신앙교육과 신앙훈련의 핵심이었다.

지난 20여년간,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얻었던 유익은 대단히 컸다.

내 삶의 방향과 전략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처음 기독교 세계관 이라고 해서 접했던 것은,

개혁주의적 세계관이었다.

창조-타락-구속 이라는 framework을 기본으로 해서,

특히 ‘영역주권론’적인 관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 피조세계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해야한다는 것은,

젊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한계를 많이 느끼고,

그 대안적 세계관에 주목하였다.

대충 지난 10년여정도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대안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는, 평화주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 세상을 거스르는 가치관 등등이 많이 포함되었었다.

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뭔가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소망의 tone으로

영역주권론적 세계관이 유용한 것이었다면,

지금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한국과 미국의 기독청년들에게는,

그들의 고통과 절망을 설명해내고, 소망과 joy를 제공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 개인적으로,

그 대안을 찾아내어 실전적용을 해보았다고 하기엔 아직 길이 멀지만,

최근 ‘초월적 세계관’ 이라고 내가 이름지은 일련의 세계관의 틀이,

혹시 대안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계관 논의를 할때,

이런 세계관은 옳고 다른 것들은 모두 잘못되었다는 식의 접근은 미숙한 자세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복음이라는 웅장한 스케일의 구조물을,

그 당시 상황에 맞도록 적용해내는 tool이 기독교 세계관이지,

기독교 세계관 자체가 복음을 함축해서 설명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범했던 잘못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복음 전체인 것인양 이야기하는, 환원주의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는, 기존의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그건 아니고, 이게 바로 유일한 복음적 세계관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는데… 사실 마음이 좀 불편하다.

서론이 좀 길었지만,

앞으로 몇번의 글을 통해서,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초월적 세계관’에 대해 좀 풀어보고자 한다.

PS 1) 아마 총 10번 정도의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생각이 다 정리된 것도 아니고 아마 헛점도 많은 것이겠지만, 용기를 내어 한번…

PS2 ) 오늘부터, 직장에서는 죽어나는 2주의 일정이 시작된다. 내 블로그에 들어와서 댓글을 확인할 여유가 없을만큼 바쁠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 다음주 중간정도까지의 분량을 대충 써놓고, 시간이 나는대로 update도 하고 다듬어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extra)

지난 한달의 절반은 ‘아시아’ 어느 나라의 시골에 있는 호텔과 그곳의 공장에서 보냈다.

매일 아침에 6시에 일어나 말씀묵상, 운동, 기도, 아침식사 후에 출근해서, 저녁 8-9시에 퇴근, 호텔방에 돌아오면 10시, 때로는 11시가 넘는 일정 이었다. 그나마 나는 아직 내 project가 본격적으로 launch하지 않았기 때문에 덜 바뻤던 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렇게 글을 쓰는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1월 한달간의 글은,

대충 12월말 휴가 기간동안 생각도 했고, 얼개도 잡아놓았고, 많이 써놓기도 했기에 빼적지 않고 쓰는 것이 가능했는데…

실제로 앞으로도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이렇게 글을 쓰는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는데까지는 해보겠지만….

예전과 같이,

‘한번 하기로 했으니, 이를 악물고 해보자’는 식으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새해에 내가 새롭게 가려보려는 자세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