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Over-estimate 하기

예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었다.


예전엔,

사자가 되고 싶어하는 고양이 후배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쓴 글이었는데,


요즘은,

왜 내 선배들은 내게 ‘저는 사자가 아니야’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이 들기도 한다.


=====


어쩌다가,
고양이 새끼 한마리가 사자와 친구가 되었다.

사자의 용맹스러운 모습에 고양이는 매료되었고, 금새 그 사자와 같이 되고 싶어했다.
사자는 친절하게 그 고양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주었다.

사자와 함께 하면서 고양이는, 늘 사자가 사냥해오는 짐승의 고기 살점을 조금씩 뜯어먹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자신이 사자가 아닌 고양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
사자가 물어온 짐승의 고기를, 잔뜩 폼을 잡고 물어 뜯으며 마치 자신이 그 사냥을 한 것같이 행동했다.

사자가 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마치 그렇게 사냥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사자에게, 자주.. 함께 힘을 합쳐 사냥 계획을 짜자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사냥에 관한한,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었다. 겨우 다람쥐 정도를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고양이는 자신이 사자인양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

나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자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사자는 일찍, 고양이에게… “너는 사자가 아니야”라고 일러주었어야 했다.

리더쉽은 때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자신과 같이 되지 말도록 권유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기도의 흐름이 끊기고… (3)

내가 downcast 되어 있을때,

‘너는 그러니까 그모양이야’ 는 식으로 이야기해주지 않고,

흔들리는 나로부터 시선을 돌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예전엔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기도의 흐름이 끊기더라도, 그로인해 급격히 ‘영적침체’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섬긴다’ 혹은… 내가 ‘도와준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키워주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결국 내 영혼을 support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단절된 것이 아닌가…

내가 기도하지 않은 것을, 

그저 주변에 사람 없음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비겁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도가 외롭게 느껴지는 것과… 기도의 흐름이 끊겼을때 내 영혼이 메마르는 것이 함께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도의 흐름이 끊기고… (2)

한편으론,

기도가 내 영혼을 살아있도록 지켜준다는 일종의 confirmation이 되었다고 볼수도 있다.

그러니까 기도를 열심히 해야지…

뭐 그렇게 결심하고나면 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더라도,

어떤 때에는 그렇게 치열한 기도 없이도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경험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럴때,

‘아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를 해야지’ 라는 식으로 결심을 하고 나면…

그럼 이런 과정에서 ‘은혜’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때,

하나님께서 견인하시는 것이 은혜의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영혼이 메말라서, 기도할 기운마저 차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촉촉한 은혜의 단비가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아직도 나 같이 그래도 힘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그러니까 기도하자’라고 결심하는 것이 valid 한 것일 것 같다.

그러지만… 그럴 기운 조차 없는 사람들은 어쩌지?

기도의 흐름이 끊기고… (1)

그래도 새해들어서 꽤 기도의 흐름을 잘 지켜오고 있었다.

출장가기 며칠전부터 약간 좀 흔들리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출장가서,

그 기도의 흐름이 완전히 끊겼다 -.-;

물론 뭐,

많이 바빴고, 시간이 부족했고… 등등의 핑계를 댈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다 핑계다.

지난 두주 정도 기도가 끊기면서 내게 일어난 변화들을 보면,

1. 많이 restless 해졌다.

안절부절하다고 해야할까. 약간 급한일만 생겨도 마음이 바빠지고… 불안해지고.

2. 너그러움이 사라졌다.

내게 조금만 실수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의 마음이 쉽게 생겼다. 그리고 그것이 잘 풀어지질 않았다.

3.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특히 더 주관적인 것이어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야말로 하나님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이 훨씬 약화되었다.

4. Judgmental 해졌다.

은혜에 대한 감각이 삶에서 사라지면서, 금방 judgmental한 모습이 고개를 들었다.

음…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기도가 끊기니 내 영혼의 생기가 없어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는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보면… 

My Transitions (3)

4.

내 네번째 transition은,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던 시기였다.

(최근 그것에 대해 좀 쓰기도 했지만..)

대충 2002-2003년 즈음에 그런 transition이 있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정복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회개, 그리고 Lordship에 대한 재정립 이었다.

MIT라는 유명한 학교에서, 그것도 비교적 유명한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마쳐가면서,

내가 세속적 성공/명예에 대한 것이 중독되듯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로 대략 6개월-1년간의 QT 말씀이 나를 그런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던 것 같다.

정말 마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프고 힘들었었다.

정말 가슴에 불덩어리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오히려 복음의 가치와 충돌하는 방식이었다니…

정복주의적 영역주권론 이라고나 할까…

모든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하니까 모든 영역을 ‘정복’해 나가야 한다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역시 일종의 ‘멘붕’이 왔다.

이때 정복주의적 개혁주의 세계관의 대안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고,

공동체, 고난, 순결힘, 산위의 동네… 등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5.

그리고 지금.

대충 작년즈음 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고, 지금 그 transition이 거의 climax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하고 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씨익 웃으시면서, 짜아식.. 아직 멀었다… 얘야 하고 계실른지도 ㅎㅎ)

기본적으로는 내가 내 안에 가지고 있던 ‘불덩어리’가 그겋게 건강하지 않았다는 반성이 이 transition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vulnerable함, passive함, 은혜, 사랑, 약자의 하나님, 초월성, 자유, 순종, 절제, 듣는 기도 등등의 개념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좀 더 잘 정리가 될 것 같다.)

아직 나는 내가 겪고 있는 transition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렇지만 내 과거의 모습에 대해 통렬하게 아파하고 있고, 기존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대단히 passive하게 그렇게 이끌려가고 있다.

정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Something’s really happening to me…

하나님께서는 나를 또 어떤 모습으로 인도하실까…

My Transitions (2)

3.

세번째의 transition은, 96-97년 경이었다.

96년 코스타를 다녀온 전후로, 함께 하던 공동체의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생명력 없던 모임에 생명력이 공급되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도의 움직임이 생겼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나는, 새벽에 교회 van을 운전해가며 기도하려는 학생들을 모아 새벽기도를 함께 하는 일을 주도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나는 기도에 대해 거의 무지했었는데,

기도를 하다가 방언도 하게 되었고, 일종의 ‘신비체험’등도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게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는

내가 ‘기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매일 한시간씩 온몸이 땀에 젖도록 기도를 했었다.

당시 개인적으로는 많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 개인 기도는 하나도 시키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부흥’에 대한 기도만을 집중적으로 시키셨다.

정말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했었다.

이 transition을 통해서 나는,

기도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이 결코 인간적인 어떤 것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쯤부터 내게,

가슴에 불이 하나 있는 것과 같은 … 그런 상태가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15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은 (비록 기복이 있긴 하지만)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사랑이 아젠다가 될때…

‘사랑’은 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링은 그것이 ‘아젠다’가 될때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내 딸을 사랑하는 것을 예를 들어 풀어보자.

나는 내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위해서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그 아이를 향한 사랑에 맞추게 되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도 하고, 사랑과 충돌하는 다른 아젠다들을 없애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딸을 사랑하는 사랑은, 내 삶의 다른 아젠다들과 대결구도를 형성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내 딸을 향한 내 사랑은 하나의 아젠다가 되어 버린다.

즉,

딸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해야하는 high-priority to-do list에 들어가게 되고,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런 과정을 겪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무나도 자주…

내 사랑에서… 내 딸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요소가 희석되게 되고,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가치가 핏기 없고 차가운 아젠다로 전락하게 된다.

글쎄,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나도 자주 사랑을 아젠다로 환원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고 늘 마음에 두고 있는 내 아내나 민우를 향한 사랑도 그렇고,

다른 가족을 위한 사랑이나,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

공동체나 사역을 향한 사랑…

더 나아가서 주님을 향한 사랑 까지도…

나는 자주 내 아내에게,

나는 너를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랑한다…

이렇게 항변하는데,

내 아내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아마도,

생명 넘치는 사랑을,

아젠다로 환원시켜버리는 내 못된 습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초월적 세계관 (12)

(1)번 글에서 썼던 것 같이,

나는 기독교 세계관의 한가지 해석 방법이 복음 전체를 설명해 내는 것과 같이 접근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내가 여기서 언급한 초월적 세계관이 복음의 요체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어떤 이들에게는  개혁주의적/영역주권론적 세계관이 유용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평화주의적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언급한 세계관의 접근이 혹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한채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약간의 가이드를 제공해주는 것이 될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몇번의 글을 써 보았다.

한가지 더 덧붙일 것은,

아마도 현실을 피하지말고 좀더 현실에 부딛혀야 하는 사람들,

이런 초월적 세계관 보다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이런 식의 현실초월적 세계관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진취적이어서 인본주의적이 되어버린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초월적 세계관에 한번 마음을 담그어보는 것이 더 좋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런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세계관에 대한 논의가,

all-or-nothing 식의 접근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겸손한 방법으로 진행되면…

환원주의(reductionism)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더 많은 이들이 복음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초월적 세계관 (11)

초월적 세계관을 누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또 한가지는,

하나님 앞에서 수동적이 되는 자세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vulnerable해져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가지셨던 주님의 자세를 담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될 뿐 아니라 주(Lord)가 되신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과 의도와 계획은 순종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리고 예수를 주로 삼고 따르며 사는 것은 또한,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것을 전제한다.


피동성, Lordship, 성령…


사실,

개인적으로… 대략 10년쯤 전에,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가지는 정복주의적 성경에 많이 마음이 불편하여 대안을 생각하던중에,

나름대로 내가 생각했던 중요한 key concept은 ‘Lordship’ 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Lordship 얘기를 무지 많이 하고 다녔었다. ㅎㅎ)


어쩌면,

Lordship을 정복주의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logic의 뒤에는,

이런 초월적 세계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초월적 세계관 (10)

현실적으로,

이러한 초월성을 실천해 내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일차적으로는,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담론에 근거한 복음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격적으로 나를 다루시고 사랑하시는 인격적 복음을 깊이 마음속에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이것을 반복해서 reminder해주는 좋은 가르침을 통해,

논리적 변증이나 가르침, 설득이 아니라 선포와 경배가 이루어지는 공적 예배를 통해,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것을 반복해서 곱씹는 개인 경건생활을 통해서 깊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

십자가와 부활, 죄의 용서,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 광대하신 하나님 등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정 기간, 예를 들면 사순절 등과 같은 시즌에 이것을 깊이 reminder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나는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자신의 말을 따다닥 뱉어내는 기도가 아니라… (물론 처음 기도는 그렇게 시작하곤 하지만…)

정말 깊이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수용해내는 그런 기도 말이다.

그야말로 기도를 통해서 하늘이 열리는 그런 기도.

그러나,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할때,

소위 ‘자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찾는… 일부 contemplative prayer를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식의 기도보다는,

초월적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부터 (extra nos)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기도가 아주 깊어지면,

밖에서 오는 은혜와 내 안의 성령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기도가 만나는 경험을 할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