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rol Freak (2)

내가 Control freak 이라는 새로운(?) 인식은, 나로하여금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사실 최근들어 몇가지 내 마음 속에 있는 이슈들로 씨름하고 있었다.

그중 몇가지는 대충 다음과 같다.

judgmental한 것, 겸손하지 못한 것,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 삶의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 바쁘게 살면서 서두르거나 조급해하는 것, 다른이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 등등…

내 성품 내에서 이런 이슈들이 자꾸만 드러날 뿐 아니라, 이것들이 쉽게 다스려지지 않아서 나름대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control freak이라는 사실을 곱씹어 보면서, 위에 열거한 내 문제들이 사실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어떤 의미에서보면 한가지 뿌리에서 나오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예 이번 기회에 매일 조금씩 생각을 정리해가며…

자가진단을 좀 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control freak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결국 내가 control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매우 고질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유학생활을 거치면서…

참… 지긋지긋할만큼… 뜻대로 공부하는게 잘 풀리지 않는 것을 경험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이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생겼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17년 전, 유학생활을 막 시작하려할때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보면, 하나님에 대한 많이 깊어진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자꾸만 추스려 세우지 않으면 control freak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도 충분히 체득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닐까.

아직… 나는… 갈 길이 먼 듯 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 모습과 정말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것 같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7)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정말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마치 아직 무엇이 덜 이루어진 것 같이 생각될때도 있지만, 이제 정말 다 이루셨다. 죄에대한 궁극적 심판도, 내 죄에 대한 속죄도, 피조세계의 회복의 시작도, 이제 다 이루어졌다.

이제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세상이 감히 상상할수도 없는 소망이 주어졌다.

내일 부활절에는 이제,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마음껏 죽음을 향해 조롱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나의 나된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것이다. 주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나에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주님께서… 정말… 다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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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몇가지 내가 몇가지 더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다음의 것들로 환원(reduce)시켜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지식으로 환원하지 말자.

한국 교회의 몰락을 보면서, 복음주의의 쇠퇴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 해결책을 자꾸만 knowledge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을 많이 반성했다. 물론 지식을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을 해결책으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리게되고, 따라서 매우 절망적인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passion으로 환원하지 말자.

비록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직도 참 많이 미숙한 수준이긴 하지만… 주님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고 싶은 깊은 열망이 내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열망(passion) 혹은 헌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말해야한다는 당위 혹은 윤리적 강령으로 기독교복음을 바라보고자 하는 ‘습관’이 내게 깊이 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passion이나 헌신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 identity를 define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일주일동안 묵상하면서, 내 생각의 중심이 많이 ‘나’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늘 나밖에 생각할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런 경향이 더 심화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그분’께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매우 인본주의적인 (그래서 어쩌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짓 복음으로 내가 함몰되어 가기 쉬운 것 같다.

보통은, 운전을 하면서 audio book을 듣거나, podcast를 듣거나, 설교를 듣곤 하는데, 이번주에는 헨델의 메시아를 듣게 되었다. 아… ‘할렐루야’ 코러스가 터져나오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함께 터져나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전투적 그리스도인, 성경 연구자, 사역자, 하나님 나라 일꾼… 그런 가치들이 정말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저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정말 그 모든 것을 통합해내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예수께서는, 내 모든 것을 드려 찬양드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6)

누가복음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참 길고 긴 하루가 마무리 되고 있다.

목요일 밤에 붙잡히신 후에, 밤새 고문을 당하시고, 새벽녘에 엉터리 졸속 재판을 받으시고, 또 다시 각종 모욕과 극심한 고문을 당하시다가 “해골 언덕”에서 나무 십자가에 대못으로 몸을 박아버리는 잔인한 처형을 받으시는… 정말 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다.

온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모두 담당하시고, 어그러진 세상을 다시 제대로 만드는 광대한 작업의 시작이 이제 완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신다.

십자가의 외로운 처형을 경험하시면서 참 아버지가 많이 보고싶으시지 않으셨을까.
만세전부터 함께 하였던 그 아버지와의 fellowship이 참 그럽지 않았을까.
이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마치 끊긴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인데.

금요일 낮시간이 지나면서는, 예수께서는 이제 고통을 소리쳐 표현할 힘도 다 없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내 옛 사람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깊이, 아주 깊이… 눈물과 함께 내 마음 속에 담고 싶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5)

요한복음 19:28
“목마르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것은 시편 69편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정말 목이 마르셨다.

우리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하필이면 왜 이런 육체적 고통이었을까? 꼭 이렇게까지 잔인한 처형 방법이어야 했을까?

물론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죄의 consequence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마 십자가 처형보다 더 잔인한 처형법이 그 당시 로마 제국에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 방법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가, 십자가에 달려있는 33살 청년 예수의 몸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때, 정말 내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밝히 드러나면서, 정말 어쩔줄 몰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이제는 죄가 싫은데… 그것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내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기억들.

다른이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왜 그렇게 다루어지기 어려운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랑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왜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에 목매고 있는 것인지.

내 자존심을 꺾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품는 것은 왜 그렇게 힘이드는지. 왜 나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을 그렇게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지.

각종 음란함은 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것인지.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는 것과 같은…

이런 내 안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시는 육체적 고통에 담겨있다.

내가 내 sinful nature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때 마다, 그리고 그것과 타협하고자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처절한 고통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타협하고자 하는 이 죄 의 결과는 예수의 십자가 고통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토록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는, 그것을 토닥거리며 함께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꾸 드러내고, 토설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겨내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더 선명할수록, 죄를 다루는 내 모습이 더 당당해지는 것 같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3)

요한복음 19:26 – 27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마리아를 생각해보면, 정말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0대 소녀일때,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고, 첫 아이를 타지에서 마굿간에서 낳아야 했다.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사생아’라고 생각했고, 평생 마리아는 그 멍에를 지고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일찍, 남편 요셉을 떠나 보내고 과부로 살았고, 그나마 아들이 ‘miracle worker’로 등장하며 요란스럽게 하더니면, 이제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땀흘려 일한 남편이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그날 수수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해 내어 남편과 나누고,
자녀들을 다복하게 낳아 길러서 후손들도 계속 더 보고,
때로는 동네 이웃과 수다도 떨고,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가졌을 10대 소녀의 꿈은, 신적 개입 (divine intervention)으로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시고 돌아가신 이후에 부활하셨지만, 아들로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사실상 이걸로 끝이었을 것이다.

이런데도…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복된 사람인 것일까?
그 삶이, 하나님의 광대한 계획으로 인해 완전히 쑥대밭이 되도록 망가졌는데.

아마 예수께서는 ‘엄마’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물론 이 처절한 고통의 끝에는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고,
그로 인해 온 인류가 소망을 갖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지만…
마리아라는 한 여자의 인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그 고통을 느끼시면서…
그 마리아를 생각하며 많이 우시지 않았을까.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2)

누가복음 23:43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설명할때 잘 사용하는 구절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필사적으로(!!) 사람을 찾아 얻어내시는 모습을 보게된다.
다시 말하면,
그 처절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고통을 통해 얻고자했던 것, 즉 사람을 얻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그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절박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다.
내가 그 진리의 빛을 깨닫지 못하던 때, 나를 바라보시며 그야말로 발을 동동 구르셨을 사랑 많으신 주님…
이제 내가 그 주님을 안다고 이야기하며 살지만, 여전히 그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우리 구주께서는…
내 눈을 바라보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는 말씀을 하고 싶어 애가 타시는데 말이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1)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20여년전, 

처음 내가 이 말씀을 가슴으로 읽게 되었을때, 나는 정말 도무지 어쩔수 없는 전율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야말로 통곡을 하듯, 그렇게 큰 소리로 울었다.

불과 며칠전,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께 환호했던 군중이 이제는 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장면.

나는 그 군중 속에서, 얼굴이 새빨개 져서 그 예수를 큰 소리로 조롱하며 비난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예수는, 이 말씀을 하실때, 그 군중속의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당연히 내 주(Lord)가 되셔야하는 창조주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내 허물을 그렇게 자신의 온 몸을 던져 담당해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 그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감수해야했던 하나님쪽에서의 cost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하는 것을 드러낸다.

20여년 전, 기숙사 방에서 혼자 무릎을 꿇었던 이후…
나는 이 말씀을 접할때마다 다시 무릎을 꿇어 흐느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반응도 할수가 없다.

주님…

회심 (14) – 맺으며

어찌보면, 부끄러운 이야기를 몇번에 나누어서 적어 보았다.
뜬금없이 내 회심의 경험을 적게된 동기는, 처음 글에서 썼던 것 처럼,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과, 내가 겪은 회심의 경험에 따르면 이 세대의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세대의 교회와 기독교를 내가 담아내는 것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지 않는 것일까.
이 특별한 경험을 한 내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일까.
왜 내게는 이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신 것일까.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이 경험을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만일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강렬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다른 이들에게 강력한 하나님과의 대면의 경험을 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도울 여지는 과연 있는 걸까.)

…

나이가 들면,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뭔가 좀 더 clear해 질 것 이라는 기대를, 20여년 전에 했건만, 여전히 나는 clue 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두렵다.

회심 (13) – 내 회심의 특징/한계

1. 나는 회심 경험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경험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신앙이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다.
 
2. 나는 회심 경험이 내 신앙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새로운 경험등을 결국 내 회심경험으로 해석해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나는 매우 보수적이다.

3. 개인적 회심이 매우 중요한 이슈일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도, 어떤 상황이 되었건, 누군가가 ‘결신’을 하는 모습을 보면… 거의 90% 이상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고인다. 구원 자체가 과정임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회심의 순간이라는 것을 중요하게여기는 이율배반성이 내 신앙 안에 있다.

4. 회심 이후에 경험했던 변화가 나름 매우 큰 것이었다. 따라서, 회심과 변화(성화)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고, 빠른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경우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5. 내 신앙과 신학이, 내 회심 경험이라는 다소 주관적 경험에 근거하는 부분이 많이 때문에, 내 신앙을 객관화시키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

Gospel Coalition에서, Don Casron, John Piper, Tim Keller 이 세사람이 대담하는 것을 podcast에 올려놓아서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역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대담이었는데…
많이 내가 공감할 수 있었으면서도… 한편 듣고나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그것은…. 이 세사람의 어조가 대충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우리는 복음도 알고, 하나님의 영광도 아는데… 우리처럼 그거 아는 사람 구하기 참 힘드네요.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다 쓸 수도 없는 일이고… 우리처럼 좀 제대로 믿는 사역자들 어디 없나요.”

그 세분이 이야기한 내용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보다 낫다’는 식의 그런 자세는 참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 회심 경험이,
나를 그런 편견/교만의 함정으로 인도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회심 (12) – 회심의 지속성/현재성

만일, 회심이 한번의 ‘경험’이고,
그 후에는 그로부터 자라가는 과정이라면…

그 회심의 강한 경험을 한것과,
감동적인 영화를 본 것, 책을 읽은 것, 영감있는 강의를 들은 것등과는 어떻게 그 경험에 차이가 나는 것일까.
신앙생활이란 결국, 그 강한 과거의 경험을 곱씹어가면서 그것에 내 삶의 근본이 있음을 기억해나가는 여정일까.

만일 회심을 ‘과거의 사건’으로 규정한다면,
그 이후의 삶은, 그 과거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강한 결단력과 정신력으로 그 과거의 사건에 걸맞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말 그런가?

회심이후에 내게 생긴 변화는 대충 이런 것들이 있었다.

우선, 매우 사고/생각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것은, 복음이라는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생긴 변화가 아닌가 싶다.
글로 써서 남기기에..좀 머쓱하긴 하지만, 사실 회심의 경험이후에 나는 학과목의 평균 평점도 더 나아졌다.
그야말로 회심 이후에 비로소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회심 이전에는 글쓰기 한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회심이후에는 글쓰는 일도, 말하는 일도 훨씬 더 쉬워졌다)

그리고, 의지력이 몹시 강해졌다.
정말 결심하고 결심해도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이 많았는데, 회심 이후에는 결심을 하고 그것을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것이 훨씬 더 쉬워졌다.
이것은, 회심의 경험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에서 통일성을 갖게되어, 그야말로 내면세계의 질서를 갖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수도 있겠고,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에따라 움직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다고 설명할수도 있겠다.

내 지,정,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거나 소멸되지 않고,
지속될 뿐 아니라 오히려 발전하는 것을 경험해왔다.

감동적인 영화나 책, 강연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남에따라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있어 회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