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7)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정말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마치 아직 무엇이 덜 이루어진 것 같이 생각될때도 있지만, 이제 정말 다 이루셨다. 죄에대한 궁극적 심판도, 내 죄에 대한 속죄도, 피조세계의 회복의 시작도, 이제 다 이루어졌다.

이제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세상이 감히 상상할수도 없는 소망이 주어졌다.

부활절에는 이제,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마음껏 죽음을 향해 조롱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나의 나된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것이다. 주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나에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주님께서… 정말… 다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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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몇가지 내가 몇가지 더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다음의 것들로 환원(reduce)시켜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지식으로 환원하지 말자.
한국 교회의 몰락을 보면서, 복음주의의 쇠퇴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 해결책을 자꾸만 knowledge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을 많이 반성했다. 물론 지식을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을 해결책으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리게되고, 따라서 매우 절망적인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passion으로 환원하지 말자.
비록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직도 참 많이 미숙한 수준이긴 하지만… 주님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고 싶은 깊은 열망이 내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열망(passion) 혹은 헌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말해야한다는 당위 혹은 윤리적 강령으로 기독교복음을 바라보고자 하는 ‘습관’이 내게 깊이 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passion이나 헌신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 identity를 define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일주일동안 묵상하면서, 내 생각의 중심이 많이 ‘나’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늘 나밖에 생각할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런 경향이 더 심화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그분’께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매우 인본주의적인 (그래서 어쩌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짓 복음으로 내가 함몰되어 가기 쉬운 것 같다.

보통은, 운전을 하면서 audio book을 듣거나, podcast를 듣거나, 설교를 듣곤 하는데, 이번주에는 헨델의 메시아를 듣게 되었다. 아… ‘할렐루야’ 코러스가 터져나오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함께 터져나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전투적 그리스도인, 성경 연구자, 사역자, 하나님 나라 일꾼… 그런 가치들이 정말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저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정말 그 모든 것을 통합해내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예수께서는, 내 모든 것을 드려 찬양드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6)

누가복음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참 길고 긴 하루가 마무리 되고 있다.

목요일 밤에 붙잡히신 후에, 밤새 고문을 당하시고, 새벽녘에 엉터리 졸속 재판을 받으시고, 또 다시 각종 모욕과 극심한 고문을 당하시다가 “해골 언덕”에서 나무 십자가에 대못으로 몸을 박아버리는 잔인한 처형을 받으시는… 정말 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다.

온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모두 담당하시고, 어그러진 세상을 다시 제대로 만드는 광대한 작업의 시작이 이제 완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신다.

십자가의 외로운 처형을 경험하시면서 참 아버지가 많이 보고싶으시지 않으셨을까.
만세전부터 함께 하였던 그 아버지와의 fellowship이 참 그럽지 않았을까.
이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마치 끊긴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인데.

금요일 낮시간이 지나면서는, 예수께서는 이제 고통을 소리쳐 표현할 힘도 다 없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내 옛 사람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깊이, 아주 깊이… 눈물과 함께 내 마음 속에 담고 싶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5)

요한복음 19:28
“목마르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것은 시편 69편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정말 목이 마르셨다.

우리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하필이면 왜 이런 육체적 고통이었을까? 꼭 이렇게까지 잔인한 처형 방법이어야 했을까?

물론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죄의 consequence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마 십자가 처형보다 더 잔인한 처형법이 그 당시 로마 제국에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 방법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가, 십자가에 달려있는 33살 청년 예수의 몸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때, 정말 내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밝히 드러나면서, 정말 어쩔줄 몰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이제는 죄가 싫은데… 그것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내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기억들.

다른이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왜 그렇게 다루어지기 어려운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랑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왜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에 목매고 있는 것인지.

내 자존심을 꺾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품는 것은 왜 그렇게 힘이드는지. 왜 나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을 그렇게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지.

각종 음란함은 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것인지.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는 것과 같은…

이런 내 안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시는 육체적 고통에 담겨있다.

내가 내 sinful nature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때 마다, 그리고 그것과 타협하고자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처절한 고통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타협하고자 하는 이 죄 의 결과는 예수의 십자가 고통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토록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는, 그것을 토닥거리며 함께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꾸 드러내고, 토설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겨내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더 선명할수록, 죄를 다루는 내 모습이 더 당당해지는 것 같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4)

마태복음 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라고 누가 썼다면,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 첫 구절을 가지고 노래 전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의 맨 끝자락에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대학 때 소위 ‘대동제’라는 곳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풍경도 생각이 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르는 clip으로 선거운동을 했던 것도 기억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노래의 첫 구절은 그 노래 전체를 떠올리게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노래와 얽혀있는 여러가지 사건, 사상,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구절은 시편 22편의 첫 구절이다.

시편 22편은 그 내용을 읽어보면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는 시편 기자가 절규하는 내용,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내용, 그리고 궁극적으로 승리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예수께서 이 시편의 첫 부분을 인용하셨던 것은, 지금 그 시편 22편의 첫부분 즉 극심한 고통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악(원수)에 대한 궁극적 심판이 곧 있게 될 것과, 예수께서 이루실 승리,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이어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하며… 그리고 궁극적인 악에대한 심판과 승리를 곱씹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는… 어쩌면 이렇게 시편 22편을 곱씹는 것 만큼 좋은 다른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 예수의 외침을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이야기를 하는 등…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이 그리고 있다.

십자가의 예수는… 정말 그렇게 고통스럽게, 외롭게, 그러나 소망을 생각하며 십자가에서 바짝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3)

요한복음 19:26 – 27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마리아를 생각해보면, 정말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0대 소녀일때,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고, 첫 아이를 타지에서 마굿간에서 낳아야 했다.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사생아’라고 생각했고, 평생 마리아는 그 멍에를 지고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일찍, 남편 요셉을 떠나 보내고 과부로 살았고, 그나마 아들이 ‘miracle worker’로 등장하며 요란스럽게 하더니면, 이제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땀흘려 일한 남편이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그날 수수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해 내어 남편과 나누고,
자녀들을 다복하게 낳아 길러서 후손들도 계속 더 보고,
때로는 동네 이웃과 수다도 떨고,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가졌을 10대 소녀의 꿈은, 신적 개입 (divine intervention)으로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시고 돌아가신 이후에 부활하셨지만, 아들로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사실상 이걸로 끝이었을 것이다.

이런데도…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복된 사람인 것일까?
그 삶이, 하나님의 광대한 계획으로 인해 완전히 쑥대밭이 되도록 망가졌는데.

아마 예수께서는 ‘엄마’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물론 이 처절한 고통의 끝에는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고,
그로 인해 온 인류가 소망을 갖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지만…
마리아라는 한 여자의 인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그 고통을 느끼시면서…
그 마리아를 생각하며 많이 우시지 않았을까.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2)

누가복음 23:43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설명할때 잘 사용하는 구절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필사적으로(!!) 사람을 찾아 얻어내시는 모습을 보게된다.

다시 말하면,
그 처절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고통을 통해 얻고자했던 것, 즉 사람을 얻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그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절박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다.

내가 그 진리의 빛을 깨닫지 못하던 때, 나를 바라보시며 그야말로 발을 동동 구르셨을 사랑 많으신 주님…
이제 내가 그 주님을 안다고 이야기하며 살지만, 여전히 그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우리 구주께서는…
내 눈을 바라보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는 말씀을 하고 싶어 애가 타시는데 말이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1)

출장 중에 시간이 없어,
이번 한주 고난 주간에는 예전에 썼던 가상칠언 묵상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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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20여년전,
처음 내가 이 말씀을 가슴으로 읽게 되었을때, 나는 정말 도무지 어쩔수 없는 전율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야말로 통곡을 하듯, 그렇게 큰 소리로 울었다.

불과 며칠전,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께 환호했던 군중이 이제는 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장면.
나는 그 군중 속에서, 얼굴이 새빨개 져서 그 예수를 큰 소리로 조롱하며 비난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예수는, 이 말씀을 하실때, 그 군중속의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당연히 내 주(Lord)가 되셔야하는 창조주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내 허물을 그렇게 자신의 온 몸을 던져 담당해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 그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감수해야했던 하나님쪽에서의 cost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하는 것을 드러낸다.

20여년 전, 기숙사 방에서 혼자 무릎을 꿇었던 이후…
나는 이 말씀을 접할때마다 다시 무릎을 꿇어 흐느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반응도 할수가 없다.

주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내가 성숙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만 못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동역을 하거나, 사역을 하거나, 그냥 함께 생활을 하거나…
함께 하는 그 사람들이 누가 되었건 간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미숙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미숙한 사람들에게 지나친 성숙함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듯 하다.

어떤 사람이 때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을 해서 내어 놓을 때에도,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미숙함을 깊이 감안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면,
내가 함께 비이성적/감정적이 되는 오류를 많은 경우 피할 수 있는 듯 하다.

반대로, 내가 스스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해서 내어 놓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면,
내 미숙함을 나 자신과 상대에게 스스로 인정하고,
미숙함이 또 다른 미숙함을 낳지 않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듯 하다.

또한 내가 스스로 빠지기 쉬운 착각은,
내가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경우,
내 비뚤어진 성숙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고,
내 미숙함을 성숙함으로 착각하여 멈추지 말아야할 성화에의 노력을 그치게 되기도 한다.
내 부족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기도하고,
나의 작은 인격에의 열매를 크게 과장해서 보는 우스꽝 스러운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내가 이땅에 사는 한,
나의 이러한 미숙함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미숙함이…
계속 나를 힘들게 할수도 있겠지만,
날마다 조금씩, 내 안에서 이 모든 미숙함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넉넉함이 성령 안에서 키워지면 하는 바람이 크다.

세상의 많은 미숙함들을,
내 삶으로 감당하여 지고 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지역교회

7~8년 전애 쓴글.
그후에 지금 나는 개척교회에 참여해서 다니고 있지만,
막상 이런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같은 교회 사람들과 나눌 기회는 없다. 좀 안타깝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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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달동안,
‘지역교회’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현재까지 정리한… 나름대로의 ‘지역교회론’을 풀자면 다음과 같다.

지역교회는 다음의 두가지만 만족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첫번째는,
우주적교회/보편적교회 (Universal Church, Catholic Church)의 일부로서 지역교회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는, 사도의 전통에 따른 신앙고백, 선교적 사명 같은 의미들이 당연히 포함되게 되거니와…
또한 지역교회 = 교회로 일컬어지고 있는 현대의 심각한 왜곡을 피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두번째는,
‘가족’이 되는 구성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 결혼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혼인이라는 언약으로 엮어진 가족/부부는,
인간으로서 추구할수 있는 모든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처한 상황 속에서 제한된 가치에 더 무게를 두게된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한 가치도, 가족/부부라는 관계보다 더 우선할수는 없다.

함께 ‘지역교회’를 구성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주적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넓은 틀 안에서, 내가 저 사람이라면 함께 살아보겠다… 내가 저런 그룹의 사람들이라면 함께 살아보겠다… 라고 결심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새로 지역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도 그렇게 ‘한몸’이 될 것으로 헌신해야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기존의 지체들도, 그렇게 새로 함께하는 그 사람과 이제는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하는 결정이라면… 그것이 우주적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머물러있던 가치를 포기할수도 있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이 ‘선교적 교회’가 되었건, ‘성경공부 많이 하는 교회’가 되었건, ‘새벽기도 매일 하는 교회’가 되었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소위 교회의 비전에 동의하여 함께 지역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본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함께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지역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동기이자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신학이 신앙을 설명할 수 없을 때

나는 매우 자주,
‘건강한 신학’을 가진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답답함 혹은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에 대부분 동의하기도 하고,
그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도 공감하는데…
그분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어떤 신앙의 개념들을 나누는 단계에 가면,
더 이상 대화가 쉽지 않음을 느끼곤 한다.

그러면,
그런 분들과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저 신학적 공감에 대한 것 뿐이다.

그런데,
어떤 분과는, 심지어는 구체적인 신학적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깊이 있는 신앙의 대화가 가능하다.
그분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은혜, 죄, 하나님 나라, 사랑, 세상 등등에 대하여 정말 가슴과 가슴을 오가는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신학이 신앙을 설명해 내는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너무 자주…
신앙인들과, 동역자들과, 교회 식구들과, 신학적 대화만을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