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관하여 (8)

성혁아,

최근 네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같은 교회를 다니며 성장하던 시절의 너로만 너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네가 늘 그저 어린아이와 같기만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견디어 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난 참 네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너희 아버지가 예전에 그렇게도 판사가 되고 싶어 하셨는데, 정말 억울하게 판사가 될 기회를 놓쳐 개인 변호사로 개업하신 후 늘 그때 판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을 가지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네가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는 네가 정확하게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매우 억울하게 판사 임용 직전에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도 엉뚱한 오해에 연루되어서.)
게다가 그런 상황 속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법조인의 세계를 잘 아시기 때문에 지금 네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더욱 많이 분개하고 계시다는 얘기도 들었다. 너를 통해 네 아버지께서는 대리만족도 많이 느끼고 계셨을텐데 말이야.

나는 소위 ‘가계에 흐르는 저주’ 뭐 그런 것은 전혀 믿지 않는 단다. 그런 argument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미신에 가까운 것이지.
그러나 나는 모든 가족에는 그 가족이 짊어지고 대대로 물려주고 있는 악습, 잘못된 가풍, 가치관 등이 있다고 생각해.

혹시, 45년여 전에 너희 아버지에게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네가 교회 소그룹이 끝난 후 친교실 구석에 앉아 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분노와 보상심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때, 나라도 그렇게 억울했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만일 그런 억울한 일들을 보상받는 방법이, 나 대신 자녀가 못다이룬 꿈을 이루는 것이라면 너무 shallow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가지려는 꿈, 더 성취하려는 꿈은 자꾸만 커지게 마련이고, 대를 이어가면서 네 가족 안에서 계속해서 못다이룬 꿈을 그 자녀에게 이루게 하는 것이 이어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성취, 명예, 성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풍에는 여러가지 순기능이 있지만, 그것에 따른 역기능이 역시 매우 크니까… 만일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는 일이 있으려면 누군가는 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할텐데 말이야…
대를 이어가면서 도무지 그것을 끊을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안타까워 하고 계신데 말이야.., 만일 하나님께서 드디어 그 엄청난 일을 이룰 한 사람을 어떤 가문에서 발견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해 어떤 일들을 하실까?

엄청난 사랑을 쏟아 부으시고, 모든 관심을 쏟으시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영향력을 받게 하시고, 훌륭한 훈련과 교욱도 공급하셔서… 정말 대를 이어온 그 폐습을 끊어 낼 수 있는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시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중에 그 일을 이룬 사람의 마음에, 성공와 명예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JOY를 허락하시지 않을까?

개인의 성취와 영예가 겨우 당대에 그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어떤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만들어 가시는 선한 영향력은 개인의 수준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의 시간 scale을 넘어…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시원한 생수와 같은 것이 되지 않니.

선교사로 나가 있는 네 형과 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있는데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네가 해볼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하나님께서는 널 그렇게 대단하게 보신다는 말이 아닐까. 너라면 이 일을 할 수 있어… 너라면 겨우 네 개인의 성공과 영예와 성취, 그리고 기껏해야 네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수준의 그런 삶의 scale을 벗어나서 훨씬 더 넓고 큰 scale의 삶을 살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네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너를 위해 기도할때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때는 무겁고 힘든 마음이다가도 조금만 기도를 하면서 그분의 마음에 함께 마음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너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너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기대로 마음이 벅차진단다.

성혁아,
신앙의 성숙이란,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높여가는 과정이란다.
신앙의 성숙이 깊어지면 깊어 질수록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것이지.
나는, 하나님께서 너를 그 심오하고도 풍성한 세계로 이끌고 계심을 본단다.

넌 잘 해낼꺼야. I’m truly proud of you!

with Peace of Jesus,
승호형이

고난에 관하여 (7)

때로 고난의 기간은 짧을수 있지만,
자주 고난을 내면에서 process 하는 기간은 매우 길수도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얻어진 열매가 무엇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벼운 행동이 아닐까 싶다.

마치 오래 뼈를 고와 곰탕을 끓여내는 과정과 같이,
좋은 한약을 오래 달이는 과정과 같이,
하나님께서 삶에 허락하신 어려움을 깊이 곱씹으며 성장과 성숙의 열매로 삼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

때로 그런 과정중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던 선물을 주시기도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 성품의 진국이 오랜 시간에 걸쳐 흘러 나오는 것이다.

고난에 관하여 (6)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 중,
애매한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자주 본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만난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애매한 고난을 깊게 경험한 사람들이고, 그 고난을 매우 건강하게 승화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삶의 현장에서 애매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경우엔,
하나님께서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에게 연속적으로 어려움을 주시는 일들도 보았다.

고난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을 구체화시킨다.
그리고 다른이들의 고난에 대한 말할수 없는 compassion을 갖게한다.

훌륭한 spiritual leader들에게 고난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고난에 관하여 (5)

고난을 겪으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지만,
그 고난을 통해 쓴 뿌리만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증오, 복수심, 모멸감, 패배감만을 갖는 일들을 본다.

물론 많은 경우에는,
맺어져야 할 건강한 열매들과, 지금 언급한 부정적 쓴 뿌리가 섞여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경우는,
부정적 쓴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고난의 열매로 치장하고 포장하는 경우이다.
고난을 통해 자신이 성숙한 것 같이 훗날 이야기 하지만 막상 성숙했다기 보다는 쓴뿌리만을 마음 속에 갖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겪는 중에,
고난을 다 겪고 난 후에,
건강한 조언과 가이드를 받으며 그 일들을 건강하게 곱씹을 기회가 있다면 이런 일들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고난에 관하여 (4)

어제 글에서 세종류의 고난에 관하여 언급했다.

첫번째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이다.
두번째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당하는 박해에 의한 고난이다.
세번째는, 억울하게 당하는, 피해자로서의 고난이다.

그런데,
가끔 고난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이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내용에 관하여 전혀 잘못 이해하고 대응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잘못인데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받는 박해라던가,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가장 흔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고난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묵상하지 않아 잘못된 진단을 하게 되고,
결국 그 고난을 통해 얻어져야할 귀한 열매들을 놓치게 되는 일들을 보곤 한다.

고난을 겪으며,
그 일이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고난에 관하여 (3)

고난에는 세종류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번째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이다.
두번째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당하는 박해에 의한 고난이다.
세번째는, 억울하게 당하는, 피해자로서의 고난이다.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을 겪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심으로 잘못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기회를 주신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당하는 박해에 의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멋진 고난이다.
이 고난의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세번째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처한 상황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신다는 중요한 sign이 된다.
성공이나 명예나 부 권력보다 그 사람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그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내 잘못은 없었나 하는 것을 돌아보게 되지만… (또한 돌아보아야 하고)
일차적으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마치 하늘 문을 여시고 폭포수를 그 사람의 머리에 쏟아붇는 것 같이 부으신다. 때로 그 고난의 가운데에 있는 경우엔 그 사랑을 fully appreciate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객관화시켜서 보면 – 보통 시간이 지나면 객관화가 가능하게 된다. – 그 사랑의 하나님이 전체 상황의 배경임을 볼수 있다.

첫번째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감사한다. 그 사람의 성숙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두번째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감격한다. 그 사람의 헌신으로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세번째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흥분한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당신의 사람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고난에 관하여 (2)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씀 안에서 섬기는 일을 하다보면,
정말 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런데,
삶의 어떤 영역에서 자신의 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을 멈추어버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속에 가지는 안타까움은 말로 다 할수 없다.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그것을 놓는다면 정말 자유로와질텐데,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나갈 수 있을텐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도무지 저런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지 안타까울때가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포기하신게 아닌가 하는 답답함마저 들기도 한다.
(물론 나 자신을 보면서도 그런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런의미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당신의 자녀에게 그분께서 주시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할수 없는 사랑의 표현인듯 하다.

나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애매한 고난 당하는 것을 보면,
특히 그 사람의 성숙의 초기단계에서 그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한편 마음속으로 아파하면서도, 한편 마음 속에 기대를 갖는다.

아!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말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시는구나.

고난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고난에 관하여 (1)

막 태어난 어린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상한 돌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막 어린 그리스도인을 벗어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애정은 그 이전 단계에 경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깊다.

뿌리깊은 내면의 문제들을 다루시기 위해,
삶의 전 영역을 그분의 선하심 앞에 아름답게 정렬시키기 위해,
그 과정에서 베푸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shake-up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최근,
내가 사랑하는 어떤이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마음을 면도날로 도려내는 것과 같이 아프지만…
기도하면서 마음에 주시는 잔잔히 흐르는 평안을 발견한다.

나름대로 며칠간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고난에 관한 단상들을 몇번에 나누어 적어보려 한다.

New Year’s Resolution

2005년 1월에,
New Year’s Resolution을 디모데후서 2장 3-7절의 말씀으로 삼았었다.

내 삶의 여러 자세들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내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부터 4년이 지난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지난 4년동안 참 많이 나아졌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진실되게 그 말씀을 대하면,
정말 나같은 사람도 달라질 수 있는 듯 하다.

올해 new year’s resolution은,
Obedience로 정했다.

삶의 여러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다른 이들을 통해 얻게되는 지혜에 나 자신을 낮추어 순종하는 것이다.

가끔 내 자신의 모습을 내가 보면,
마치 하나님까지도 내 사역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같은 망극함이 자주 배어나오곤 한다.

성실함에대하여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는 일들에 한번 더 집중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