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 성경공부 때문이다!?

최근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이처럼 공격적인 선언으로 가득차 있는 이런 복음서를 읽으면서,

어떻게 도대체 멜랑콜리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정만화 같은… 그런 기독교를 진짜라고 믿을 수가 있는 걸까?

그건…

활활타는 용광로 앞에서 작은 주전자를 들고 차 한잔 마실 물을 끓여보겠다고 하는 것,

나이아가라폭포가 쏟아지고 있는데, 작은 생수병 하나 들고, ‘생수’ 받아가겠다고 나서는 것,

3000년 묵은 키가 100미터가 되는 큰 나무를 보고, 그걸 분재해서 집에 키우고 싶다고 하는 것 보다도 더 터무니 없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뭐 대단히 긴 세월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늘 내가 ‘순정만화’식의 기독교 메시지만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그래도 거칠고 투박하고, 심지어는 신학적으로 약간 편향이 있었을 망정,

‘선포’, 혹은 ‘선언’ 이라고 번역하는 ‘케리그마’가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무엇이 현대 기독교를 이처럼 천박하게 만들었을까?

최근 내가 고민하면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소그룹 성경공부’이다.

뭐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는 소그룹 성경공부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난 20여년을 보내왔다.

늘 소그룹 성경공부를 하며, 인도하며 살았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는,

‘선포’의 장대한 서사시와 같은 복음을,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와 같은 scale로 전락시켜 버렸고,

복음의 사유화 (privatization)을 가속화 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신학적으로 많이 부족한 인도자가,

그저 좋은 성경공부 분위기를 만들려면…

우리끼리 서로 힘이 되는, 따뜻한 이야기,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이야기…

이런 것에 치중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결국 위에서 기술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 아닐까.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나누고,

‘말씀’을 배우면서…

삶과 사랑을 나눈다고 이야기하는 소그룹 성경공부가… 사실은…

말씀을 말씀답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shallow한 자기 생각을 나누고,

말씀을 배우기 보다는 말씀을 사유화하는 것을 배우고,

그래서 궁극적인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딱딱 거리는 어떤 사람을 대하면서

새 회사에 온 후,

아주 다른 일들을 참 많이 한다.

(나는 정말 일 복이 터졌다. 얼마나 일복이 터졌나 하는건 언제 이 블로그에서 시리즈로 한번 다루어볼까 한다. ㅋㅋ)

그중 하나는,

내 office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가서 실험을 좀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곳의 lab manager가 아주 딱딱 거리고 나를 힘들게 했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네가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가 S***ford 다닐때 실험실에서 다 해본거다…

음…

이거 참…. 일하기 막막하네…

그러다 최근, 이 사람이 나랑 linked in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렇게 연결된 다음날, 이 사람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주 나긋나긋 싹싹…

몇가지 가능성,

1. 내가 너무 어려보여서 만만하게 봤는데, linkedin을 보니, 나이가 좀 있어서… 그렇게 막대하지 않기로 했다.

2. 내가 뭐 그냥 별볼일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linkedin을 보니, 나름대로 학벌과 경력이 괜찮아 막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음…

뭐 두가지 다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결국 내용은 이거다.

나는 실제로 대하면 별볼일 없는데…

resume 상으로는 profile이 훨씬 더 좋다.

음….

resume profile로 밀어붙여 돈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resume profile에도 불구하고 일 열심히 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이렇게 일복이 터져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지만…

아직도 나는 professionally 많이 부족한걸까.

하나님 나라가 선포됨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느끼는건,

정말 이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라는 개념의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에 대한 언급이 참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지난주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함께 하는 사람들과 좀 나눈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차원’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이해하면 도움이 참 많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3차원에서 살고 있고, 그런 ‘공간’은 ‘시간’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곤 하는데…

사실 물리학적 개념으로는 그렇지 않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시공’ 혹은 Space-time 이라는 개념으로 서로 엮여 있다. 그 ‘시공’이라는 것이 중력 부근에서는 휘기도 한다는게 일반 상대성 이론의 내용이다.

뭐… 갑자기 엉뚱하게 물리학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서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위치가 바뀐다.

보통 우리 사람은, 그 사람의 위치가 시간에 따라 바뀐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지만…

‘시간’이라는 축을 아예 하나의 축으로 놓고 전체 frame을 이해하자면, 시간에 따라서 어떤 위치를 지나온 그 사람의 모든 궤적 자체가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t=t0에 x0 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t=t1에 x1 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t=t2에 x2 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모두를 다 포함해야 시간축을 따라서 존재하는 그 사람을 다 기술해 내는 것이다.

시간축에 대해서 ‘초월’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time-slice 밖에 볼 수 없지만, 시간축에 대해서 ‘초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모든 time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time-sliced description이 아니라, 전 시간적 description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고, 

(가령,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와 같은…)

어떤 경우에는, 아직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실행/현실화 가능한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신다.

(가령, 아무것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는 것과 같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라 라는 말씀을 제대로 지키면서 이 현실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이게… 사실상 불가능한건데, 시간축을 초월해서 성경을 읽어내면 이게 가능해지는 거라고나 할까.

마태복음을 읽었던 마태복음의 일차적 독자들은, 

산상수훈과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이제는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의 시대가 열렸으니,

이제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거구나…

하면서, ‘지금’ ‘여기서’ 지켜야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코드로 이것을 받아들였을 것 같다.

3.

구약에서 나타난 율법 역시, time-sliced description/prescription 이라기 보다는, 초시간적 기술이자 명령인 것 같다. 

이것 역시, 현실적으로 지킬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홍해바다를 가르고 우리를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으니, 이제는 그렇게 살아야하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4. 

따라서, 그런 ‘구약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유대인 독자들은,

산상수훈을 읽으며 / 들으며…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이 훨씬 적지 않았을까.

이미 그런 생각의 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5.

가령,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을 우리가 읽으면서는…

그래서,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우리가 용서 받는거야? 그러면 이거 이신칭의랑은 어떻게 되는거야?

이런 고민을 하지만,

이걸 시간초월적 명령으로 받으면… 언젠가는 죄의 용서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새 시대가 완성되는 날이 오는데… 지금 바로 여기서 그 시대가 열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야해! 

이렇게 이해가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을 포함해서…) 복음서… 더 나아가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코드는,

지금 바로 지키면서 살도록 요청하는 명령이지,

그걸 통해서… 이신칭의를 깨닫게 하도록 도움을 주는 그련 메타포가 아니다.

6.

예수님께서는,

시간 이라는 차원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턱~ 하고 우리에게 던져 주시면서,

자 이제 이런 시대가 열렸고, 열리고 있고, 열릴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나라의 파라독스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시간 초월적 선언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쉬워지는 게 아닌가 싶다.

…..

뭐 이런 식의 이야기를 성경공부 시간에 했더니만,

목사님께서…

비공돌이들에게는 그런 비유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셨다. ㅋㅋ

나는 이렇게 생각하니까, 머리에 팍팍 들어오는데 말이야… ㅎㅎ

상처 많은(?) 개

우리가 개(하이디)를 키우기 시작한지 벌써 4-5개월 정도가 지났다.

이 개를 입양한 쉘터의 안내에 따르면, 하이디를 길에서 발견했을 때, 도대체 무슨 종류의 개 인지, 무슨 색깔의 개인지 하는 것 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고 한다.

무슨 험한 세월을 살았는지, 이 아이는 앞니가 거의 다 없다.

그래서 보통 개들이 좋아하는 “뼈다귀” 같은 것을 하이디는 즐기지 못한다.

이가 좋지 않아서, 먹이가 조금만 크면 잘 못먹는다.

처음 왔을 때에는, 정말 잔뜩 긴장이 되어 있었고, 도무지 친한척을 잘 하지 않았다.

먹을것을 줘도 극도로 조심하고, 잘 다가오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는 하이디는 그냥 많이 얌전하고 부끄러움 많은 개 인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하이디는 우리가 많이 편해졌는지, 우리들에게 다가와서 놀아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먹을 것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장 와서… ‘놀자’고 꼬리를 흔들며 아침 인사를 한다. 약간 기분이 좋으면 집 안에서도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흥분을 표현한다.

민우가 소파에 누우면, 바로 민우 품에 쏙 들어가서 눕는다.

험한 삶을 살면서,

몸과 마음에 상처가 많았던 하이디가,

이제 민우 옆에 누워서 민우에게 떼도 쓰게된걸 보며…

참 많이 감사했다.

그러면서도,

아… 사람도 이렇게 몇달만 사랑을 주면, 예전의 상처를 씻고 다시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신선한 예배

어제는,

산호세 CRC (미국교회)와 함께 ‘공동예배'(?)를 드렸다.

하나의 씨앗교회는 CRC (Christian Reformed Church) 라는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 동네의 CRC 미국 교회가 우리를 host해서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 목사님과 우리 목사님이 한편의 설교를 반반씩 나누어서 했고,

그 교회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 찬송가도 한절은 한국말로 불렀다. ^^

예배도 좋았고, 설교도 좋았고…

CRC는 화란의 개혁교회 사람들이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만든 교단이란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개혁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라는 범주에 넣는 것을 불편해 한다고.

복음주의냐 아니냐라는 구분 자체가 자신의 신학적 identity와는 다소 맞지 않는 다고 이야기한단다.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가의 선곡이나, liturgy의 흐름이나, 그 교회의 30대 젊은 목사의 설교, 또 그분과의 짧은 대화 등등을 통해 받은 느낌은…

음… 이거 신선한데? 뭐 그런 느낌이랄까.

그 젊은 목사님은 Fuller 출신이라고 하니, 

뭐 복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긴 하겠으나…

복음주의가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지는 요즘,

내가 불편하지 않는 non-evalgelical의 신앙의 단면은 본것은 아닐까 싶어,

잠시 반가웠다.

(뭐 자세한건 더 공부해봐야 하겠지만.)

복음서에 빠지다?

예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은… 뭐 건성이지만 좀 공부해본 적이 있었는데,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차근차근 공부해본적이 없었다.

특히 나는 요한복음이 요즘은 많이 땡기는 모드여서, 요한복음이 그리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강하던 차였다.

최근 교회에서,

주일에는 요한복음 강해가 계속되고 있고,

금요일 성경공부에는 마태복음이 계속되고 있는데…

허억… 이거 참 대박이다.

요한복음 설교는, 

아… 설교자와 그 설교를 듣는 청중을 인격적으로 알면서 설교를 듣는 다는것이 이런 장점이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을 깊이 경험하며 듣고 있는 중이고,

마태복음 성경공부는,

만일 내가 읽고 있는 방식대로 이 마태복음을 읽는 것이 맞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접하는 99%의 기독교는 다 가짜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강펀치가 담겨있다고 느껴진다.

이 정도를 가지고,

복음서에 빠져있다고 이야기하기엔 택도 없지만…

그래도 새해의 첫달을 복음서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건 참 큰 blessing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새해 QT 본문도 마태복음…)

그러나 아직 잘 풀리지 않은 것들은,

– 내가 보기에, 요한복음의 기독교와 공관복음의 기독교는… 너무나도 많이 달라서, 과연 이것이 같은 종교를 다루는 이야기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인 것 같아 보인다. 과연 이것이 어떤 통합된 view로 제대로 통합될 수 있는 걸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에서의 통합도 중요하고, 또한 내 자신 안에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되는 통합도 중요할 것이고…

– 소위 ‘교리’ 혹은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으면, 너무 복창 터지게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그 ‘바운더리’에 얽매이지 않고(?) 복음서를 읽으면 이게 3D 영화와 같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는 중요한 기둥은 몇가지 ‘교리’인것 같다. 

도대체 조직신학의 적절한 role은 무엇일까?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인가,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의 종교인가?

– 예전에 프란시스 쉐퍼가, 성경의 권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성경의 오류를 조금이라도 인정하기 시작하면 slippery slope 이 되어, 결국 자유주의로 추락(?)하게 되고, 결국은 기독교의 본질은 버리게 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걸 알프스 산 꼭대기의 물 한방울이 약간의 차이에 따라 지중해로, 혹은 대서양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비유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요즘 가만히 보면… 어떤 경우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의 ‘심장’을 더 잘 지켜내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은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강조하고 부활이 진짜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있는 반면,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부활의 의미에 대해 더 많은 고찰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가 좀 만족스럽지 못하다… 쩝.)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지 않고,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읽어내되, 그것이 교리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내 신앙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심장’을 제대로 느끼는 방식으로 나와 공동체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경험을 하고 싶은데… 여전히 나는 갈 길이 먼 것 같이 느껴진다.

– 그래서, 사실 우리 목사님과 교인들이 불편해할만한 질문들을 자꾸 던져보는 중이다. ^^

가령,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걸까. 예수님이 동정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정말 기독교는 무너지나?

성경은 정말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는 걸까? 삼위일체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셔야 하나? 그냥 인간으로서 메시아의 role을 하신 것이라면 성경 narrative에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는 걸까?

뭐… 이런 것들에 대해서, 주일학교식의 해답은 물론 있다. ^^

나도 뭐 그런 성경공부는 다 열심히 했고, 수 없이 인도도 해 보았고.

그런데… 3D로 읽어내는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듣고 싶다고나 할까…

솔직히 내가,복음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복음서에 좀 더 빠져보고 싶긴 하다. ㅎㅎ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

‘리더십’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우리 교회 목사님께서(^^) 이 책을 추천해 주셨다.


읽고 있는데…


아마 지난 5년간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좋은 책중 하나로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아, 이런건 나라면 좀 다르게 썼을 것 같은데… 싶은 부분도 없는건 아니지만,

실제 ‘리더’로 살아온 맥도날드 목사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과 같은 책이다.

아주 많이 감탄을 하면서 읽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 책은…

리더로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더 깊은 영감을 주는 책이라기 보다는,

리더로 지낸 경험이 어느정도 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마,

대학생때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그냥 맹숭맹숭 읽지 않았을까… 싶다.

Leaving the Big A – 외전

가만 생각해보니, 한가지 빠진 것이 있어서… ^^

Apple에서는,

Engineer들이 보통 NPI (New Product Introduction)이라는 task를 담당한다.

향후 2년 정도 이내에 시장에 나와야 하는 것을 개발하는 일이다.

Proof of Concept – Proto- EVT (Engineering Verification Test) – DVT (Development Verification Test) – PVT (Product Verification Test) 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제품이 나오게 된다.

한편,

GSM (Global Supply Manager)라는 사람들은, 소위 Supply chain 혹은 vendor들을 다루는 역할을 한다..

이 사람들은 Vendor들과 이야기하며 cost를 계산해서 협상하고, 때로는 새로운 vendor를 개발하는 일을 일부 담당하기도 한다.

조금 단순하게 설명하면,

Engineering 팀은 기술, GSM은 돈을 더 다루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Apple에서 vendor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늘 듣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Apple이 예전같지 않아요”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예전에는 새로운 기술과 흥미로는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vendor들과 함께 개발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engineer들과 적극적으로 일해서 기술을 개발하면 GSM이 support하는 구조였단다.

그런데, 지금은…

engineer들은 고압적으로… 이런 기술 개발해야돼. 언제까지 해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쥐어 짜고,

GSM은 그거 반값으로 낮춰… 이렇게 하면서 쥐어짜고…

도무지 flexibility도 없고, 함께 일하는 재미가 없다고.

Apple이 훨씬 더 작을 때는,

함께 일한다는 느낌이 많았는데…

지금은 정말 Apple의 명령만을 따르도록 요구받는다고…

 

큰 회사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수양회 설교를 마치고 (7) – 마지막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이야기했던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설교란, 

(진리를 설명해주거나 설득하는 작업이 아니라.)

진리가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작업이다. (To make truth real) 

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전문 설교가도 아니고,

설교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늘 이런식의 설교나 message를 하고나면,

정말 나는 이 작업을 통해서 진리가 현실이 되도록 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정말 자신이 없다.

내가 이렇게 하는 작업이, 과연 어떤 사람들에게… Truth가 Real이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인지.


이번 수양회 설교를 돌아보면서,

그리고 부족한 나를 돌아보면서,

너무 쉽게 이런거 하겠다고 수락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

Leaving the Big A (12) – 마지막

마지막으로,

내가 Apple을 떠나면서, 그리고 이 시리즈의 글을 쓰면서, 가장 불편한 것은 이것이었다.

결국 내가 Apple을 떠난 것은,

대단한 신앙적인 결심이나, 의를 추구하는 가치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이 많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있는 어떤 순간에는,

아… 내가 꽤 큰 폭의 paycut을 감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에서 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뭐 다행히도…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먼저 나를 접촉해서 hire 하는 과정에서, 나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할 수 있었다.)

옛날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식이나 가족을 위해서 여러가지 수모를 견디어가며 자신의 꿈을 포기해가며 그렇게 돈을 버는 일이 흔했는데…

아니, 뭐 굳이 우리 부모님 세대뿐 아니라…

지금 내 세대 아니, 나보다 아래 연배의 후배들도… 이 직장 때려쳐 말아… 그런 생각 하면서 나를 희생해서 우리 가족을, 내 아이를… 뭐 그런 생각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데….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기꺼이 희생하기로 결심할 수 없었을까?

어쩌면 나는 ‘복에 겨워’ 다른 회사에서 오라는데도 있어서… 

그 회사가 월급 더 주고 데려가는 상황에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내 결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참… 할 말이 없다.

막막하기 까지 하다.

그리고… 많이 부끄럽다.

이 시리즈의 글을 이렇게 쓴 것은,

어떤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도, 어떤 회사를 고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결국… 이렇게 부끄러운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