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안 안경

나는 참 체력이 좋았다.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한주에 30마일씩 뛰었고, (하루에 6마일씩, 일주일에 다섯번 정도)

늘 에너지가 넘쳤다.

하루에 다섯시간 조금 더 자는 수준으로 살면서도 전혀 피곤한줄 물랐다.

지금 우리 동네 와 있는 내 고등학교-대학-대학원 동창은,

대학때 나를 기억하기로…

그냥 가만히 걸어가는 길도 그냥 걸어가지 않고, 혼자서 뛰기도 하고, 괜히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다녔다고 한다. -.-;

그런데,

요즘은 정말 그렇지 못하다.

뭐 워낙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한주에 10-15마일 뛰면 잘 뛰는 거고,

잠도 6-7시간은 자 주어야 하루를 버틴다.

(나이가 들면 잠을 덜 자게 되는거 아니던가… -.-;)

하루 이틀 무리하면 그 여파도 오래가고,

이제 잠을 줄여서 뭘 한다거나, 몸을 혹사해서 일이 되게하는 것은 잘 안먹히는 것 같다.

—–

두주 전,

‘노안 안경’을 하나 맞췄다.

예전식으로 하면 Bi-focal 렌즈라고 할 수 있는데…

옛날처럼 아래쪽에 조그만 돗보기가 달려있는 식은 아니다. ^^

렌즈 위쪽은 먼 곳을 볼 수 있고,

아래쪽은 가까운 곳을 볼 수 있도록 된 렌즈이다.

최근 몇달간은, 

안경을 쓰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보는 일이 힘들어서,

집에서는 아예 안경을 벗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근시 Diopter가 5가 조금 안되는 수준으로, 아주 눈이 많이 나쁜 편은 아니다. 그냥 안과 검사표에서 0.1이 잘 안보이는 수준…)

그런데,

이 ‘노안 안경’을 쓰니까…

허억… 진짜 좋다!

한 안경을 쓰고 먼곳과 가까운 곳을 다 볼 수 있다.

물론 오랫동안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을 할때에는 reading glass를 쓰거나 아예 안경을 벗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웬만한 생활은 한 안경을 쓰고 계속 지낼 수 있으니… 이거 참 짱이다.

—–

나이가 들어가며,

내가 예전과 같이 살 수 없게 됨을 발견해 나가는 일은,

한편 frustrating 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육체의 힘을 의지하는 부분을 줄여 나가면서…

(뭐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계속 내 육체를 의지하는 portion은 줄어들어가지 않겠는가!)

팔팔하지 않게 사는 훈련을 해나가는 일이 내게 중요한 과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몸에 젊은 에너지가 넘칠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을 경험해나가는 일이 참 풍성하게 남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더 연배가 높은 분들이 보기엔,

그저 한참 나이도 어린 것이… 라고 생각할만한 생각이겠지만서두… ㅎㅎ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 하는 일

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엔지니어가 되었다.

나는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산현장을 주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론가, 전략가 타잎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론가 혹은 전략가의 역할을 해본적이 거의 없다.

나는 이해력, 판단력이 좋고, 창의력과 암기력이 부족하다. 그런데 지금은 창의력과 암기력이 많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은 멀티태스킹이 일상인 삶을 살고 있다.

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고 detail에 약하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가지 detail을 챙기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passionate하게 살고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은 passionate하지 않게 살고 일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대학교 시절에, 늘 음악을 듣고 살았다. 클래식 음악, 가요, 영화 음악 등등… 그런데 지금은 거의 음악을 즐길 시간과 여유가 없다.

노래하는걸 좋아했고, 연극을 즐겼다. 그러나 노래해본적이 참 오래 되었고, 연극은…. 더더욱….

내가 참 잘하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은 모두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내게 주어졌다.

내가 30대를 다 바친(?) 코스타를 하면서도, 한번도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사역을 해본적이 없었다. 

늘 그저 빵꾸가 난 것을 메우며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 코스타를 섬겼다.

교회에서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여건은 거의 잘 주어지지 않았다.

하기 불편하고, 하려면 많이 노력해야하고, 신경 많이쓰게되는 그런 일들… 주로 빵꾸가 난 일들만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그런 일들을 잘하고 좋아하는 줄 안다. -.-;

그냥 다른 사람이 안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게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 허락해주시지 않는 것 같다 

잠깐 그런 기회를 주셨다가도 금방 빼앗아 가 버리신다.

언젠가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에 올인하며 살 수 있으려니 하는 꿈을 가졌으나,

이제는 그런 꿈을 거의 그냥 포기했다.

세상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그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 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값지다.

어버이날

민우에게 가끔 물어본다.

‘민우는 엄마가 왜 좋아?’
그러면 민우는 ‘엄마니까’ 라고 대답한다.
예전에는,
아… 부모님의 은혜가 크시고…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주셨고, 희생하셨고…
그런 생각을 하며 가슴이 뭉클하곤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저 부모님은 ‘아빠, 엄마’ 이니까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분들이 얼마나 완벽한가, 어떤 인격을 가졌는가 하는 것 이전에 그저 아빠 엄마이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와는 35살 차이가 나고, 어머니와는 28살 차이가 난다. 

35년 전, 내가 10살때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이셨고,

28년 전, 내가 17살때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이셨다.

내가 10살, 17살때 보았던 아버지 어머니는 정말 많이 많이 많이 많이 어른이었다. (뭐 당연하지만. ㅎㅎ)

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넘사벽’이 있었다.

이제 내가 지금의 나이가 되고보니,

아… 아버지 어머니께서 지금 내 나이때 이런 생각과 고민을 하셨겠구나.

나는 그걸 정말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찡~ 해온다.

이제는 80대, 70대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께서 지금 하고 계신 생각과 고민을 지금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마 내가 그 나이가 되어서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때 또 마음이 찡~ 해지겠지.

이 땅에서 살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해하는 아들이 되는 것은 정말 포기했다.

그저 아빠니까, 엄마니까 그분들을 좋아하는 그런 아들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사실 나는 10살 남짓부터 아빠 엄마가 아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와서… 아빠 엄마라는 표현이 영 낮설다. ㅎㅎ)

내가 좋아하는 분들을 마음에 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기도를 해본다.

말씀에 사람이 오지 않을 때

말씀에 사람이 다가오지 않을때,

말씀은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가, 말씀이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이건,

복음과 말씀의 상황화에 대한 질문이다.

나 역시도 이 문제로 계속 swing을 해왔다.

한때는,

사람들이 말씀에 다가오지 않는 이유뇬,

그들이 죄인이고, 말씀이 말씀답게 선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가,

또 금방,

그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기준을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한쪽의 강한 주장에만 힘을 실어주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두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해야할때는,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시편 1편

시편 1편을 보면, 순 거짓말이다. -.-;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않지 않고,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는 일 마다 잘 된단다.

그렇지만 악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고.

세상을 보면 그런가?

오히려 세상은 악인이 승리하지 않은가.

악인이 의인을 누르는 세상 아닌가.

순 거짓말…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시편 1편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해서, 오랜 세월을 통해 애송했던 시 일테고,

이 사람들도 이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을 조금만이라도 안다면.

그.러.나.

악인의 죄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율법을 묵상하면…

그런 삶의 자세를 취하면…

그런 사람이 되면…

이런 의인이 길이 사는 길이고, 악인의 길이 죽는 길이라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아닐까.

오랜 세월을 거쳐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편 1편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으며,

아.. 그래… 세상이 그렇게 악인이 승리하는 것 같아 보여도,

이렇게 눈이 열려 진리를 알게 되면… 그럼 이게 보이는 거구나…

그렇게 깨달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수장되고,

거짓된 어른/리더들은 자기 위치만을 생각하고,

돈을 벌기 위해 규칙을 어기는,

이런 더러운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선언하고, 예배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5)

마르슬라브 볼프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서… 소위 ‘인종청소’가 이루어진 지역에서 자란 사람이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했던 그 상황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 상황에서 화해, 용서는 십자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볼프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피해자의 아픔을 품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의 죄까지도 resolve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누가 선이고 악이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정도로… 총체적으로 망가진 세상 속에서,

결국 그 사람들을 다시 구속해내고 회복해내고 화해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것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십자가 해석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approach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까?

나는 이런 도식을,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 성급하게 적용하는 것은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1. 이 상황에서 일어나는 내 안의 분노가 ‘공의로운’ 것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고,

2.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해 깊은 사랑과 관심을 보이고,

3. 이 아픔을 통해 드러난 ‘백성’들의 아픔과 눈물에 공감하며,

4. 깨어진 system이나 사람의 문제들을 잘 짚어내면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되,

5. 재를 뒤집어 쓰고, 시대의 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써 회개하는 일들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들은, 모두 중요한 덕목들이고,

이것들 가운데 한두가지만 했다고 해서 의인이 된 것 처럼 나대는 것은 결국 자신을 파괴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떤 특정한 집단이 거의 독접하다 시피 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디에서도 비슷한 voice를 듣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썼지만,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전문가적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4)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하는 것에 대한 아주 적극적이고 활발한 discussion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상황에서 신앙을 개인적인것으로 가두어버리고자 하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Having said that…

20-30대에는, 선과 악의 기준이,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선의 편에 서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그 반대편에 있는 악을 define하고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선과 악의 기준이 나를 가르고 있음을 본다.

돈을 더 벌기 위해 규정을 어기고 무리하게 배를 운영한 사람들,

허가되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허가를 내어준 사람들,

리더로서 책임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만 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

책임지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움직인 무능한 사람들,

아이들을 살리지 않고 배를 포기한 어른들…

등등이 정말 악한 모습이고 그것에 분노해야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람들과의 일종의 ‘연대의식’을 가지고 재를 뒤집어 쓰는 모습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규칙을 속여서 이익을 취하는 모습.. 바로 내 모습이 아닌가.

책임을 피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모습… 바로 내 모습이다.

아이들이 죽더라도 나만 살면 된다는 어른들의 욕심이 지금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있지 않은가.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한국의 남북나눔운동에서, 소위 ‘다니엘 기도’라는 것을 design해서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남북 상황의 깨어짐을 만들고 있는 죄의 모습이, 

바로 나의 죄, 우리의 죄라고 인정하고 기도하라고 촉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렇게 기도하던 청년들은,

신사참배가, 독재정권에 협력한 것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우리’의 죄라고, 좀 더 좁혀서는 ‘내’ 죄라고 고백하며 눈물흘려 기도했다.

그리고는 인간 띠 잇기를 하면서 우리의 개인적 신앙의 공적인 표현을 해내었다.

사회적 악을 향한 공분,

이 사건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하고, 모두 해야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또 한가지 일은,

재를 뒤집어 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직…

그렇게 하자고 이야기하는 voice를 듣지 못하고 있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3)

돌이켜보면, 내가 어릴때는 사람들이 싸우고 욕하는 모습을 늘 거리에서 많이 봤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시절은 결국 70년대 초반이니까, 

전쟁 후 20년이 지났지만 그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세상이었다.

삶을 찍어 누르는 가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그것에 눌린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에게 눈을 부라리며 싸우고 했던 것이었겠지.

나는,

이번에 이 사고를 접하고 사람들이 보이는 분노에 찬 반응들이,

마치 그런 것 같아 보였다.

삶 속에서 마음이 척박해져서…

그야말로 독기를 품고 증오를 표현하는…

아,

사람들이 정말 많이 힘들구나.

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많이. 많이… 눌려 있구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이후, 지긋지긋한 가난을 겪어내던 시절,

복음은 그들이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도무지 견디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들이, 예배당 찬 마루바닥에 앉아서 ‘천국복음’을 듣고 눈물로 기도하며 세상을 이겨나갔다.

지금 이 시대에,

이 아픈 사람들에게 복음이 정말 소망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위로를 공급해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인, 공적인 복음의 영역에 대한 강조도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개인적 신앙을 강조해야할 보수 기독교는 개인적 정죄만을 남발하고 있고,

공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진보 기독교는 사회적 정죄만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개인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보수 기독교가, 이 땅을 초월해내는 신령한 믿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개인적 믿음에 대한 강조를 하고,

공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진보 기독교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한 강조를 해야 하지 않나.

이렇게 많이 아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이 마음이 상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주는 생기가 공급되는 간절한 소망이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