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벌어 먹고 살기 (5)

어떤 모델이 얼마나 좋은 모델이냐 하는 것은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그 모델이 얼마나 많은 경우에 적용되느냐 하는 것이다.

변혁을 위한 직장생활이라는 모델을 그런 기준으로 한번 보자.

변혁을 위한 직장생활이라는 모델은,
엘리트, 금수저 등에는 잘 맞는다.
아니 이 사람들은 변혁모델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이야기할수도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 능력이 없어서 맨날 구박받는 사람은 어떨까?
직장에서 짤린 사람은?
남들이 잘나가는 회사에 다닐때 나는 빌빌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변혁의 힘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 된다고?
그 일에 충실한 능력 조차 없는데?

신앙을 생각할때,
그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야하는 목표/성취를 설정해 놓으면 결국 이런 한계에 부딛힐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의 본질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과정’의 중요함이다.

가령, 우리는 구직을 할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직장을 잘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신앙의 본질의 입장에서 보아서, 구직을 할때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직의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래서 잘 풀릴때도 있고, 그래서 잘 안풀릴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구직의 열매가 직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신앙의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그분 말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 역시 그렇다.
때로는 죽어라고 힘들고, 때로는 열나는 일도 있고, 가끔은 의로운 일도 하고, 어떤때는 승진을 하기도 하고, 일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변혁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은 신뢰하고, 직장을 돈버는 소중한 수단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변혁의 모델보다는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모델이라고 보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4)

개혁주의/변혁주의적 관점에서 직업을 바라보는 또 다른 문제점은,
세속주의/혼합주의에 오염될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들어간 새내기 직장인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때로는 C&C man (Copy and Coffee man – 복사기 돌리고 커피 뽑아서 돌리는) 정도에 만족해야할때도 있다.

세상은 변혁시켜야하겠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보내신 사명은 이루어야 하겠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럼 어떻게 되느냐?
승진(!) 이 목표가 된다.
그래야 뭔가를 할 수 있게 때문이다.
변혁이 목표이기 때문에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것이다.
고지를 점령해서 영향력을 키워야지.

그런데 이게…
2년, 3년, 5년, 10년, 그렇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뛰다보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역량은 고지를 점령하는데 집중되게 되고,
고지 점령의 원래 목적인 변혁의 꿈은 점점 희미해진다.

이것이 변혁주의자들이 걸어가는 매우 typical한 변절의 모습이다.

내가 80년대 대학을 다닐때
그렇게 세상을 변혁시키는 기독교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변혁을 위해 고지를 점령해야 했고,
그러면서 결국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변절해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변혁의 모델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시대의 상황이나 어떤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매우 적절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하기 매우 어려운, 어쩌면 위험하기까지 한 모델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3)

“세상을 변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고 이야기하는 개혁주의적 변혁주의 세계관은 이원론을 극복해내는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종교적이지 않은 일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세계 속에서 매우 가치있다는 주장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깃발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가져다준 부작용 역시 대단히 많다고 생각한다.

우선,
전반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 좀 더 좁게는 직업활동의 가치와 의미가 ‘대단한 것’이라고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직업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 자체가 영광이 되게 하라” 고 설교하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실제로 생존경쟁의 현장인 세상과 맞닥뜨리면서 내가 작아지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공부 잘 해서, 대기업에 취직한 그리스도인 말단 직원이,
그 거대한 대기업의 체제 속에서 도대체 뭘 하면 그 대기업이 변한단 말인가!
세상은 변혁시키라는 구호에 취해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에 접하면 금방, 이거 뭐야…. 과연 이렇게 사는게 의미가 있는 걸까. 악한 체제, 혹은 marginally 선한 체제 속에서 부품이 되어버리고 있는데… 내가 학생때 꾸웠던 원대한 꿈은 어떻게 되는거란 말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여 잘 쓰임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면, 직장을 변혁시키지 못하는 좌절 속에서,
어떤 사람은 ‘뭔가 더 새로운 꿈을 찾아서’ 직장을 때려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좆아서’ 목회자나 기독교 관련 직종을 잡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학생때 가졌던 꿈은 이게 아닌데’ 하며 그저 낙망해 있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게 세상 사는 거 아닌가.
한 개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거 말이다.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다.
이런 식의 ego-centric한 생각을 연료로하여, 변혁적 세계관의 불을 붙여 놓으니 처음엔 당연히 잘 타기는 하는데… 그 불길이 오래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타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독가스가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직장생활,
그렇게 대단한거 아니다.
그저 밥 벌어먹고 사는 거다.
그걸로 세상 못 바꾼다. 못 바꿔도 된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좀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건 아닌가 싶다.

요한복음

1.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어떤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나와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나는 이성적으로 성경공부하고 책 읽고 그러는걸 더 좋아하는 반면, 그 형은 신비체험이 많고, 환상을 보고, 귀신을 쫓고 그런걸 하는 형이었다. 그렇지만 20대 초반의 내게 그 형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형이 어느날 뜬금없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적이 있다.
“너는 요한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의미를 그때 잘 이해하지 못했다.

2.
N T Wright이 요한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요한복음은 내 아내와 같습니다. 나는 요한복음도, 내 아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요한복음에 대한 N T Wright의 이 말을 완전 공감한다. ^^

3.
요한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다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록 불친절(?)하다.
뭐 좀 논리적 흐름을 따라 노력하다 보면 그게 뚝 끊기고 그냥 선언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서술적이고 논리적이기 보다는 선언적이고 직관적인 책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더 어려운 것 같다.

4.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직관적인 성격 때문에 다른 책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훨씬 더 통시적이고, 초월적이다.
나는 그래서 요한복음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훨씬 더 잘 맞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선언적이고 직관적이고 통시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잘 활용한다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요한복음의 그 선언적, 직관적, 통시적, 초월적 성격을 잘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리 많이 만나지 못한다.
그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연구를 좀 더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만 몇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

5.
새해들어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묵상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매일성경 본문으로 QT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요한복음을 보면서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요한복음이 애가(lamentation)으로 읽힌다.
요한복음 1장에, 왕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이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 theme이 요한복음에 계속 반복되고 있다.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sign을 중심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고, “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들을 중심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적어도 나는 이번에 요한복음이 애가로 읽힌다.

6.
예전에 그 형이 내게 ‘요한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 형이 내게 이야기 했던 것은, 요한복음에 조금 더 강조해서 나와 있는 ‘주님을 사랑함’에 대한 측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meta narrative도 물론 좋고, 조직신학적 분석도 물론 좋은데…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core 가운데 하나는 주님이 나를/우리를/세상을 그냥 사랑하셨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내가 정말 깊은 곳에서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는 것 같다.

7.
사랑의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좋아하면서도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해되지 않는 요한복음을 사랑하며 묵상하는 내 모습도 역시 역설적이다.

또, 평신도 설교

어제는 은규 형제가 설교를 했다.
평신도 신학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내용이었다.

어제 설교의 첫 부분은,
사실 내가 언제 기회가 되면 이 블로그에서 좀 썰을 더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던 내용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inner being의 voice에 충실하는 것이 참되다는 낭만주의적 현대의 자아 인식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은규 형제가 한번 질렀으니, 나도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어서 한번 follow-up을 이 블로그에서 해봐야겠다.

그리고 또한 인상적이 었던 것은,
N T Wright의 신학을 가지고 Ego-centric한 현대의 culture를 완전 까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N T Wright의 신학이 그런식으로 Ego-centricity를 직접적으로 깐다고 연결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그걸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어가며 멋지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정우 형제나 은규 형제 같은 사람들이 물론 참 똑똑하고 신실하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조금만 교회가 불필요한 장벽들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목회자들로부터 나오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들이 평신도의 입을 통해서 멋지게 나오는 일들이 더 많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다들 돈 벌고, 애 키우고… 빡빡하게 살면서… 설교 한번 준비한다는게 그리 쉽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빡빡하게 사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만 가능한 진주들이 이렇게 나오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관심있는 분들, ‘하나의 씨앗교회’ podcast에서 지난 주일 설교를 들어보시라! ^^

밥 벌어 먹고 살기 (2)

나는 교회에서 흔히 쓰는 ‘비전’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대부분 그 ‘비전’이라는 말이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덧입히고 싶을때 쓰여지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하나님 안에서 기독 정치가가 될 비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거의 100%는 그냥 정치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잘나가는 정치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꾸는 것이 정죄받을 일도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비전’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것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새성전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라고 목사가 이야기할때, 그것은 그냥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짓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슨 개뿔.

나는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직장/직업에서의 욕망을 이런식으로 포장하기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비전, 뭐 그런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뭔가 의미있는 직장생활을 하고자 하는 욕심, 직업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바람 등등을…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거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라거나,
직업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이런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일이 대단히 흔하다.

아니 그냥…
나는 직장에서 승진하고 싶다.
나는 월급을 더 받는 직장에 가고 싶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회사 다녀보고 싶다.
이렇게 좀 딱 까놓고 얘기를 못하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세상적’이라고 욕을 먹을까봐?
그런 바람을 갖는 것은 영적이지 못해서?

이렇게 꼬여버린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언어구조 때문에,
자신의 야망과 하나님의 뜻이 구별 불가능하게 되어버리고,
혼합주의와 세속주의가 기독교 안에 더 강력하게 침투해 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냥 좀 쉽게 생각해보자.
직장은 그것을 통해 돈 벌어서 그걸로 먹고 살기 위해 다니는 것 아닌가?

밥 벌어 먹고 살기 (1)

1.
얼마전에 한 후배와 전화 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하는 중에 직장 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하나님의 뜻이니 비전이니 하고 이야기하는 후배에게, 직장이란 밥벅어 먹으라고 있는 거야… 라고 애기해 주었다. 그 후배는 약간 벙찐 분위기였다. 이 형에 타락한 걸까.

2.
최근에 이 블로그 독자중 한분과 꽤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은 직장을 옮기는 것과 관련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내게 그 고민을 나누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분에게도, 직장을 찾을때는 밥먹고 살기에 좋은 곳을 찾으라는 내용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3.
최근에 또 이 블로그의 다른 독자가 밥벌어먹고 살기위해 직장 다니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떻게 연관이 되느냐고 언급을 해 주셨다.
그리고 그런 내용으로 글을 좀 쓰라고 요청도 했다.

4.
우리 교회 목사님이 facebook에 루터의 Two Kingdoms 이론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그게 우리에게 relavant해 보인다는 포스팅을 하셨다. 나는 facebook에 뭐 들어가서 내 생각과 마음을 쓸만큼 부지런하질 않은데도, 나는 화들짝 흥분해서 목사님의 포스팅에 열렬한(?) comment를 날렸다.

5.
앞으로 몇번에 걸쳐서, 직장은 밥벌어먹기 위해 다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기독교 셰계관, 그런거 개나 줘버려… 뭐 그런거 당연히 아니고, 직장을 밥벌어 먹기 위해 다니는 곳으로 생각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

Voting is over-rated

내가 좋아하는 pacifist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Voting is over-rated”

민주주의에서 투표가 가지는 의미는, 그 과정을 통해서 대화를 하도록 enforce하는 것이다.
그러나 50.1:49.9의 투표결과에 의해서 49.9 의 의견이 묵살되는 것은 옳지 않다.

최근 Trump가 친 여러개 사고 가운데 제일 큰것은 immigration ban이다.
미국 곳곳에서 시위를 하고, 반대 성명을 내고 난리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것은, 여론조사를 보면 대체적으로 Trump의 이 executive order를 지지하는 쪽이 높게 나온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이 이길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되는 것이 안전할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Trump를 지지한 사람들이나,
박근혜-이명박에 투표한 사람들…
정말 어쩌면 좋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