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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Radical

Radical하다는 것을 급진적이라고 번역하곤 하는데,
webster 사전을 찾아보면

1 : of, relating to, or proceeding from a root: (근본적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2 : of or relating to the origin : (이건 근원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 같고)

3
a : very different from the usual or traditional : extreme
b : favoring extreme changes in existing views, habits, conditions, or institutions
c : associated with political views, practices, and policies of extreme change
d : advocating extreme measures to retain or restore a political state of affairs
(이게 급진적이라는 뜻일 것 같다.)

결국 Radical하다는 것은 근본적인, 근원적인 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어근을 생각해보더라도 Rad 라는 건 root과 연관이 있는 말이다.

신앙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은 것은,
그 신앙이 충분히 근원적이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세상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맞서는 신앙을 갖지 못하는 것은,
전략이 부족하거나 용기가 부족하거나 성품이 그렇지 못하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참으로 그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근원적/근본적 신앙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가장 clear한 예는 순교자들이다.

나는 Silicon Valley 같은 상황에서,
순교자의 신앙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relavant하다고 생각한다.

주말에 읽은 책 – The Benedict Option

이번 long weekend에는 작정을 하고 쉬었다. ^^

그러면서 책 한권을 거의 다 읽었는데, (한 85%쯤 읽었다. 막판에 좀 힘이 달려서 확~ 끝내버리지 못했다. -.-;)
The Benedict Option 이라는 책이었다.

American Conservative의 editor인 Rod Dreher 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Dreher는 미국의 religious conservative 이다. 동성애 등에 대해서 나와는 다른 관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관에 대해서도 좀 다른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Dreher의 분석에 격하게 공감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지금 미국 사회는 너무 심하게 비기독교적이 되어버려서, 그 문화로부터 전략적 철수 (strategic withdrawl)을 하지 않고는 기독교가 기독교로서 살아남는것 자체가 힘들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그 속에서 영성을 지키고 사는 것, 자녀를 키우는 것,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 커리어를 갖는 것,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것 등등에 대해 꽤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나는 당연히 그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약간 껄끄럽게 읽은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완전 속 시원~ 했다!

나는 이런게 정말 급진적 보수 신앙이구나… 싶었다.
신앙의 색깔이 보수적이든 개방적이든지 간에, 급진적인 면을 잃어버린다면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 같다.

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세상 문화로부터 독배를 받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좀 위험하게 세상 속에서 싸우면서 살아가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치명적인 독배를 마신다고 생각한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Therapeutic moralistic deism의 신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독을 허용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박해 하에서 사자밥이 되어가고 있는 순교자를 바라보면서,
착하고 순한 얼굴을 하고 두 손을 앞으로 뺀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부른다고 생각해보라.
나는 현대교회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리고 나는 그 교회문화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고 말이다.

옛날에 했던 게임들

삼국지, 수호지, Civilization, 대항해시대, Sim City, Ultima…
나는 이런 종류의 게임을 좋아했었다. 대학때 시간이 나면 이거 하느라 밤을 샌적도 있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Civilization은 요즘까지도 계속 새로운 버전이 나오는 듯.

수호지 같은 게임은 거의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play할 수 있는 게임이어서,
얼마전까지만해도 좀 잡념을 없애면서 있고 싶을때 한번씩 play 하기도 했었다.
대개는 그렇게 게임을 play 하면서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설교를 듣고나면 생각과 마음이 가벼워지곤 했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최근에 나온 게임은 사서 할 엄두도 안나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는 거다.
새로운 게임을 배우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그런것을 보면 내가 그런 게임을 했던 것은,
적어도 게임 자체를 즐겼다기 보다는 게임을 하면서 음악을 듣거나 설교나 강의를 듣는 그것 자체를 즐겼던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번 long weekend에는,
옛날 게임 하나를 download 받아서 한번 play 해보고 싶기도 하다. 시간이 될른지… ^^

스스로에게 물어보다

배가 뽈록 나온 사람이 fitness program을 광고하는 것은 우스꽝 스러운 일이다.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영어 회화책을 광고할수는 없는 일이다.
여자가 수염깎는 전기 면도기를 들고, 써보니 좋더라 라고 이야기하면 그냥 피식~ 할 뿐이다. (남자가 생리대를 들고 써보니 좋더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겠고… ㅎㅎ)

내가 복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얼마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복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 차원이 있겠다.
– 풍부한 지혜를 동반한 지식
– 가슴 뜨거운 감격
– 변화된 인격과 인품
– 세상을 보는 다른 눈 (세계관) 등등…

이중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사역자’라고 자처하며 뭔가 나서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참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시대에는,
정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참된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따져보지 않아도 될만큼 사역자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충만할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어떤 사역자가 하고 있는 것이, 그 사람의 개인기인지, 그렇지 않으면 복음의 힘인지 분간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나는 물론 전임사역자도 아니고, 그렇게 될 생각도 없지만…
나 스스로를 생각하며 자주 묻는다.
이렇게까지 엉터리로 믿고 있는데… 과연 내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내가 만난 (내가 보기에) 진실된 크리스천 중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서 회의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내가 본 (내가 보기에) 거짓된 크리스천 중에서는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이러니컬하다.

(그렇다고 내가 진실된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

참 좋은 대화

요즘 교회의 한 동생이 내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다. ^^
회사가 가까이에 있어서 점심에 불쑥 와서 점심을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깊어질때,
그 목마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깊은 목마름과 함께 깊은 외로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럴때 그 목마름을 share하고 있는 사람과 30분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마음이 많이 풀어지는 경험을 한다.

어제는 내게,
나와는 다른 시각에서 볼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였고,
나에 대해서 지적도 해 주었다.
참 좋았다.

감사한 일이다.

하이디

하이디는 우리집 개 이름이다.
쉘터에서 입양을 해 왔는데, 데리고 왔을때부터 아래 앞쪽 이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여러가지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주인인 우리와도 완전히 친해지는데 1년이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특히 남자들에게 abuse를 많이 당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집에서 특히 나와 친해지는 것은 더 어렵고 오래 걸렸다. 어쩌나 모르는 남자가 오면 많이 긴장하고 짖는다.

지난달, 하이디 목욕을 시키고 쓰다듬다보니 배부분에 종기같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뭔지 몰라서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두주 지나도 그게 없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유선암(mammary cancer)이란다.

얘기 나이가 벌써 12살~13살 정도 되었으니 꽤 나이가 먹었는데,
게다가 신장도 좀 좋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유선암 이라니.

지난 금요일, 그 유선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꽤 큰 덩어리를 잘라내었다고 한다. 종양이 있는 곳 말고 떨어진곳 까지 다 잘라 도려냈다고.

지난 주말,
하이디는 밤에 잠을 자지못하고 끙끙 거리며 힘들어 했다.
지금도 아직 항생제와 진통제를 계속 먹고 있다.

다행인건 어제부터는 계단도 어느정도 오르내리고, 그래서 밖에 나가서 대소변을 보는 가벼운 산책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아직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계속 약가운에 헤롱헤롱하기도 하고,
가끔은 cranky해지기도 한다.

하이디가 유선암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때,
얘 나이도 있고 하니… 어쩌면 이게 마지막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수술을 받고 회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아직은 우리 곁에 몇년 더 있어줄수 있는 건가 싶어 감사하다.

My Favorite Preacher

어제는 교회에서 정우형제가 또 설교를 했다.
One of my favorite preachers. 🙂

초반에는 주로 N T Wright의 신학을 가지고 골로새서 1장의 본문 일부를 풀어주었고,
후반에는 주로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점을 자신을 열어 보여주면서 이야기해 주었다.

우선,
힘들게 직장생활하면서, (그것도 부부가 다 많이 바쁜)
그 와중에 아이 둘을 키우면서,
교회에서 여러가지로 섬기면서….
이런 신학적 지식과 통찰을 가질수 있도록 따로 공부했다는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웬만한 목회자들이나 신학생과 대화를 나누어도,
이 정도로 N T Wright의 신학을 정말 잘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본업이 아닌데 그 신학을 이해한 후에, 그것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해 낼 정도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떤 사람의 신학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도구로 하여 본문을 다르게 ‘fresh’하게 보면 참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많이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신학을 그저 달달 외는 수준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신학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본문해석에 적용할 줄 안다는 의미이다.
마치 수학 공식을 외는것만으로는 그 공식을 적용해서 방정식을 풀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N T Wright만 그런건 당연히 아니지만, 특히 내게는 N T Wright의 신학이 많이 그랬다.

그리고 또한….
정우형제의 신학적 고민에는 자신이 맞닥들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의 고단함이 녹아 있었다.
superficial하거나 그저 지적 유희의 신학적 argument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고민으로부터 그 내용이 나왔다.

그러기에 깊은 절박함과 목마름이 느껴졌고,
부드러운 어투와 음성 뒤에는 처절함이나 비장함도 느껴졌다.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하는 설교가 아니라,
들은 후에 마음을 더 묵직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설교였다.

나는 이렇게 가끔 우리교회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하는 설교가 참 좋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동지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정우형제랑 마주보고 앉아서 신앙 이야기를 나누어본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네. 한 교회에 다니면서도…

커피

나는 커피를 참 좋아한다.

커피를 처음 마시기 시작한건 중학교때였다. 보통 시험기간에 잠을 깨우는 약으로 커피를 마셨다.
인스탄트 커피에 프리마를 넣고 설탕을 넣은 다방커피였다. ^^

고등학교때는 시험기간이 아닐때도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잠을 적게자고 공부하는게 장땡이라고 생각해서 평소에도 4시간 남짓 잘까말까 하면서 살았다.
가끔은 잠깨는 약으로 커피믹스를 들고다니며 먹기도 했었다.

대학교때는 자판기 커피를 정기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루틴이 되진 않았었다.

아침 커피가 루틴이 된건 생각해보면 미국에 와서였다.
아침에 학교 식당에서 간단하게 사먹으면서, 혹은 집에서 토스트를 간단하게 먹으면서 커피를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대학원 다닐땐 완전 커피 중독이 되었었다.
Large coffee를 하루에 3-4잔씩 마셨다.
그러다가 위염에 걸려 고생하기 시작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그래서 가끔 위염 때문에 커피를 끊는 기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40대 중반이 넘어서면서는 몸이 카페인에 많이 민감해졌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 그날 밤에는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다른 여러 증상들 (바로 크고작은(?) 변을 보게 된다거나 하는 ㅋㅋ)도 나타났다.
그래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커피를 즐기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를 가지고 맛을 내는 여러가지 기호식품들도 좋아한다. (커피 음료, 커피 아이스크림, 커피 사탕 등등)

요즘은 가능하면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어쩌다 아침에 커피를 질러버리는 날에는… 그 커피향이 참 반갑고 좋다.

그것을 마음껏 즐길 수 없게 되어서야 비로소 커피를 더 깊이 음미할수 있게 된 듯 하다.

울고, 울고, 또 울고…

웬만하면 이 블로그에서 내 정치적 의견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어제 저녁을 먹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518 기념식을 봤다.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희생자의 가족들의 얼굴이 비추어질때 울었고,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울었고,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울었고,
대통령이 벌겋게 된 눈으로 유가족을 포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었고,
무엇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광주 사람들의 얼굴이 비추어질때 울었다.

그러나 한편,
나는 이 기념식이 ‘적폐세력’에게 크게 한방 먹이는 것이 되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이 기념식이 ‘이념적’이라고 느껴기지 보다는 ‘감성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으냐 하는 논쟁을 하기 보다 눈물과 감동이 있었다는 것이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이 노무현보다 더 똑똑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 집권 세력이 이제는 더 현명해져서 작전을 더 잘 짜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여러가지로 진짜 잘한다.
적폐자유당이 거의 멘붕 올 수준으로 잘한다.
더 이렇게 해야할 일이 많은데… 더 계속 잘 하길…

스승과 코치

대개는 한 주제로 긴 글을 쓸때는 처음부터 아예 시리즈로 쓰곤 하는데,
이번엔 이렇게 쓰게 되었다.
아마도 요즘 깊이있는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하고 살고 있어 생각이 잘 정리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여기에서 쓰고 있는 ‘스승’이라는 terminology를 설명하기 위해서 ‘코치’와 대비시켜서 생각해보자.
코치는 대개 어떤 가치나 인격 등 복합적인 것을 훈련자에게 전달해주고자 하기 보다는 제한된 기술을 습득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물론 코치가 어떤 사람에게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코치의 역할은 아니다.

코치는 많은 경우 훈련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코치가 정해놓은 수준에 도달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제자 자신이 그 한계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나는 코치가 스승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role이 다를뿐.

그러나, 코치가 스스로 스승인체 하거나,
스승이 자신이 코치라고 착각하면 그건 문제다.

교회나 선교단체나 성경공부 모임 등에서…
하고 있는 일은 딱 코치인데, 그것이 스승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리더들, 목회자들을 많이 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