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3)

그런의미에서,
이런 왜곡된 욕망의 긍정은 좀 투명해질 필요가 있다.

뽀대나는 직장에 다니고 싶은 욕망이 있을때,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뭔가 쑥쓰러워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 라던가,
비전을 주시옵소서… 기도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나는 무슨 무슨 회사에 가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고 싶다.
나는 얼굴이 예쁜 남편/아내를 맞아 결혼하고 싶다.

이렇게 솔직하게 욕망은 욕망을 제대로 설명하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치 숭고한 목표라도 되는양 사탕발림을 하는 것은 상당히 역겹다. -.-;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 자체를 추구하는 것을 너무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한다면,
그냥 그 사람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자신과 주변 사람이 그대로 보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욕망 자체를 모두 긍정하라는 뜻을 결코 아니다.
요히려 여러가지 욕망들 가운데 대부분은 왜곡되고 어그러진 욕망이고, 따라서 죄의 component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한다.

다만,
그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더럽고 오염된 욕망의 바다에 빠져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2)

교회에서 흔히 ‘기도제목을 나눈다’는 표현을 한다.
난 이 표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기도를 요청한다, 내가 기도하는 내용을 나눈다 등등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표현일텐데 말이다.

하여간, 각설하고…

그렇게 교회에서 ‘기도제목을 나눈’ 리스트를 쭉 보면…
결국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에 적절하지 않을 경우, 그 상황이 바뀌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것들이다.

병이 낫기를 바란다거나,
좋은 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좋은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잘 크거나….

아, 물론,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걸 그냥 내가 이걸 하고 싶다… 이렇게 저렴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주님을 뜻을 알기 원한다거나,
비전을 세우고 싶다거나,
인도하심을 구한다거나…

이런 대단히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런 것일까?
내 욕망을 추구하여 이루는 것일까?
그걸 좀 적나라하게 추구하는 신앙을 오히려 기복신앙이다, 번영신학이다 해서 비난하고 비웃지 않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욕망은 대단한 것이고,
그 욕망 자체를 종교적 언어로 정당화해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나 기도를 통해서, 곡조로 부르는 찬양을 통해서 모두 욕망의 추구, 욕망의 성취는 반복해서 강조되고, 조장되고, 설명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1)

몇년전에 ‘욕망해도 괜찮아’ 라는 책을 읽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내게 아주 깊이 공명이 있었다.
당연히 그 책은 내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두식 교수가 그 책을 썼던 이유를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대로 정리하자면…

욕망을 규범적 자세로 억누르기만하면 그것이 왜곡되기 때문에, 그 욕망에 대해서 투명하고 정직해지자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완전 동의한다.

그 책에서 구체적으로 들어있는 어떤 예(anecdote)들은 내가 일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책에서 김두식 교수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을 아주 많이 공감하고, 지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욕망에 대해서 정직해지자는 것과,
그 욕망을 그대로 추구하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김두식 교수도 모든 욕망을 그 자체로 모두 긍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왜 갑자기 이 책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앞으로 몇번에 걸쳐서 이 욕망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 이야기를 써 가면서, 내 관점이 그저 딱딱하고 고루한 18세기 청교도 윤리적 관점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기 때문이다. ^^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11)

나는 하나님 나라 신학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를 꿰뚫는 어쩌면 가장 확실하고도 중요한 theme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내 말이 옳다고 해서, 저쪽의 말이 반드시 틀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 매우 convincing하고 relavant하다고 해서,
십자가 신학이 그것의 subset이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도 말고,
십자가 신학이 치우쳤다고 치부해버리지도 말고,
내 주장이 저쪽보다 우월하다고 너무 쉽게 자만하지 말고…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내 말이 옳다고 해서, 저쪽의 말이 반드시 틀릴 필요는 없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10)

앞에서 조금 언급한 것과 다소 겹칠 수는 있겠으나…

나는 기독론이 결여된 하나님 나라 신학은 자칫 비인격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죄를 극복해야할 현상으로 본다거나,
하나님을 의의 화신정도로 이해한다거나,
예수께서 하신 일이 통치를 선포하는 것이라는 강조에서는 기독교의 인격성이 빠지기 쉽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
예수께서 마지막까지도 그 사랑을 놓지 않고 고통을 감내하셨다는 것,
내 안에 있는 죄를 개인적으로 아파하고 그것과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에 대한 중요성,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으로서의 헌신…
등등이 자칫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서 결여된 것 같아 보일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의 어떤 사람들의 신앙에는,
따뜻함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 나라 신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에 중심을 둔 신학 전개이다.

별로 학문적으로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그리고 나는 학문적으로 깊이 고민해볼 역량이 없기도 하다 ^^) 내가 보기에…
현대 하나님 나라 신학이 꽤 많이 갖추어진 형태로 정리된 것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전에 주로 자유주의진영과 진보진영쪽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리고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사실상 종말론에 아주 방점을 두고 있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 진영에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고 할때도, 예수를 Apocalyiptic prophet이나 개혁자 정도로 그리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나라 신학의 무게중심은 종말론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 십자가 신학의 무게중심은 당연히 기독론에 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 십자가 신학을 포함하는 더 큰 개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종말론이 기독론을 포함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기독론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져야하는 상황 속에서… 무리하게 종말론적 관점을 끄집어 내어 억지로 해석/적용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8)

어린이 동화를 들려주고 그것의 교훈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단편소설이 되면 그것보다 살짝 더 복잡해지고, 장편소설은 그것보다 더 어려워진다.

어떤 narrative를 한가지의 theme으로 설명해내는 일은, 여러가지 유익이 있다.
그러나 어떤 narrative를 한가지 theme으로 설명하면 자칫 더 복잡하고 다양한 것을 지나치게 축소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환원주의(reductionism)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큰 narrative를 간단한 main theme으로 정리 -> main theme을 가지고 다시 큰 narrative를 해석 -> 어쩌면 main theme이 다 담아낼 수 없었던 detail 자체를 main theme으로 무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함.

성경을 어떤 하나의 theme으로 정리하려고 할때는 이런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지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서는, 십자가 신학 진영을 향해서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 비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서, 자신의 신학적 tool을 가지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볼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우리의 theme은, 너희의 theme보다 더 큰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가 더 큰 개념이다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이성적 교만함은 아닐까.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7)

어떤 것을 깨닫는데에는 때로 어떤 break-through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가령, 1+1=2 라는 것을 이해하는데에는 그런 break-through가 그리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 ‘진리’가 여러 layer로 되어 있거나 기술되어 있는 것 이상의 다른 초월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때로 일차적인 수준에서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필요한것 같이 느껴진다.
(때로는 그것을 ‘철이든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 등등은 흔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더 크고 깊은 깨달음이 필요한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머리에 있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십자가 신학에는 그런 측면이 매우 명확해 보인다.
정말 깊이 있게 죄를 인식하고 깨닫는 것은 일차적인 논리적 이해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순간 정말 그 죄가 나와 세상 전체의 문제라를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하나님나라 신학은 조금 이해되는 방법이 다른것 같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방식의 성경해석,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신학방식이 새로 information으로 들어오면…
그것을 넘어서는 extra layer의 깨달음의 필요가 훨씬 적거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십자가 신학은… 논리 자체는 단순한 반면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 깨달음의 영역이 대단히 크고,
하나님나라 신학은… 논리 자체가 다소 더 복잡한 반면, 일단 이해가 되고 나면 그 이상의 초월적 깨달음의 영역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십자가 신학 진영이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초월성을 도외시하거나 그 접근에 대해 약할 수 있겠다.
십자가 신학(만)을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의 신앙 속에서,
때로 초월성이 현저하게 결여된 것 같아 보이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이상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6)

내 개인의 이야기를 좀 하면…

나는 ‘은혜’라는 개념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성경을 읽다보니 그 은혜라는 개념이 정말 너무나도 놀랍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은혜에 의해서 내 죄가 용서받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감사했다.
그 회심의 기간 동안 정말 매일 한두컵씩의 분량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길을 걷다가도 하나님의 은혜가 기가막히게 감사해서 울곤 했다.

그러나 또한 나는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참 신선하고 놀랍게 다가왔다.
세상 속에서의 새로운 질서가 선언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종과 상전, 부모와 자식, 부부관계등의 언급은 이제 십자가 은혜로 구원얻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나는 87학번이다. 내가 대학교 1학년때는 전두환이 대통령이었다. 대학교 1학년때 87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사회정의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에베소서에서 기술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는 사회 정의에 대한 내 질문과 목마름에 시원한 냉수와 같은 역할을 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아주 엉성한 아이디어를 조금 갖게된 것이었다.

실제로 내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접하고 배웠던 것은 그로부터 다시 몇년 후의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접했을때, 그것은 내개 대단히 혁명적이고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버벅거리고 잘 설명하지 못하던 그 무엇을 정말 속 시원하게 잘 설명했구나…
뭐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 순서가 내게 바뀌었다고 하자.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이 내게 먼저 설명되었고…
나중에 십자가, 죄사함, 보혈 등등이 나중에 설명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했어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첫번째 개념을 접했을때 큰 충격과 감사에 쉽싸이고,
십자가라는 두번째 개념을 접했을때…아… 참 속 시원한 설명이구나… 그렇게 느꼈을까?

아닐것 같다.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은 포괄적이고 중요한 개념이지만,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십가가의 내용을 완전히 설명해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