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8)

부흥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건강하고 거룩한 가치에 동의하도록 하는 ‘대중화’가 중요한 반면,
침체의 시기에는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전문화’가 중요해진다.

이것은 바로 전에 언급한 깊어짐과 연관이 있다.

침체의 시기에는 세상의 영향력이 강력해지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명목적이거나 marginal한 신앙을 갖게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 침체의 시기를 뚫고나갈 힘이 없다.
한편으로는 그 침체의 시기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세상에 속하지는 못하면서 그저 groaning하는 모습에 남아있기 쉽다.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도, 뜨거운 헌신도 없기 때문에 조금 더 힘을 내라, 함께 더 해보자는 식으로 독려해도 움직여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되어버리고 만다.

헌신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침체의 시기에 모두 힘있는 자기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침체의 시기에 닥쳐오는 강력한 세상의 영향력은 정말 견뎌내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성령의 강력하게 일하심이 없는데 그 모든 무게를 개인이 각자의 ‘개인기’로 버티고 뚫고 나가라고 주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심한 폭풍우 속에서 상처를 입는 사람들은 전투의 현장으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많이 돌보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정말 뜨거운 헌신을 잃지 않고, 애통해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부흥의 시기를 지나며 ‘기준’을 형성해온 어떤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침체시기의 부담을 어깨에 지도록 요청해야 할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말도 안되는 그 무게를 지도록 요청해야할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과 그렇게 함께 하지 못하고 내상과 외상을 입어 쓰러져 있는 주변사람들에게 왜 너희는 나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그저 이건 내가 해야할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감당해야한다.

그것은 텅빈 교회안에서 설교를 해야하는 목회자가 될수도 있고,
학생들이 함께하지 않는 캠퍼스의 사역자들이나,
하나님 나라를 믿고 그 가치에 헌신하는 직장인이 될수도 있다.

내가 다른 누구에게 role model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 “message”가 될 수 있을까.
내 성공과 성취, 승리와 기쁨 뿐 아니라,
내 실패와 좌절, 패배와 슬픔 까지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내 삶의 모든 contents가 다른이들에게 “message”가 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내가 말로, 내 얄팍한 passion으로, 섬긴다고 돌아다닌다는 것이 그저 공허한 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정과 직장과 내 개인의 삶이 모두 건강하게 integrate되어 있지 않으면,
더 이상 내 말이 진실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는다.

내 얄팍한 열정이 오히려 다른이들을 파괴하는 무기가 됨을 깨닫는다.
내 신앙의 피상성을 나도 참을 수가 없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7)

양적 팽창의 부흥의 시기에는 공동체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있을때에는 그분의 그 은혜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되도록 해야한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seeker friendly한 모습을 갖추고, 율법주의를 경계하며, 더 깊은 레벨의 헌신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 은혜의 강가로 나오라고 외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헌신하게 하시고, 그 사람들을 보내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깊이를 추구해야하는 침체의 시기에는 공동체의 문턱을 너무 쉽게 낮추는 일을 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깊이를 추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동체에 속하는 것 자체가 큰 ‘헌신’이 되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의 순수함과 헌신을 지켜내는 방법이 될 것이다.
침체의 시기에는 공동체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힘에 비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려는 힘이 매우 강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 있도록’ 노력하는 것 보다는
‘세상이 교회에 들어와 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 안에는 세상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들어오는 사람들(지도자들을 포함해서)이 많이 있게 될 것이므로,
그 세상의 것과 싸우는 일들을 꾸준히 해야한다.

그렇게 싸우는 과정에서 공동체는 순수함을 지켜내면서 깊어질 수 있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6)

이것이 아주 일반적으로 맞아들어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대충 생각하기에
– 부흥의 시기에는 대단한 양적 팽창이 이루어지고
– 침체의 시기에는 그 양적 팽창의 부작용을 해결하고, 다음 양적 팽창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축적된다고 본다.

그것은 사실 많은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이 그렇다.
경기호황과 침체의 사이클이나, 엘니뇨와 라니냐의 사이클도 그렇다.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자각하고 부르짖은 대로 침체의 시기에는 정말 제대로 망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침체의 시기에 많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깊어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5)

부흥의 시기에 대하여 사람들이 갖는 일종의 환상은 그 시절이 완벽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절대로 그럴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시기에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게 하시는 것이긴 하지만 대부흥의 시기에도 교회에 들어오는 소매치기가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침체의 시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력이 있다.
심한 침체의 시기에도 어디엔가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디엔가는 깊고도 싶은 신앙과 신학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는 그래서 크게 보면 cycle로 돌아가는 것이고,
각각의 시기에 다른 역할로 하나님 나라가 지탱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침체의 시기에 해야하는 일은 부흥의 시기를 사모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 침체의 시기에 감당해야하는 일들을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4)

부흥의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꼰대’가
침체의 시기를 지내고 있는 후배들에게 흔히 해주는 말들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상처가 된다.

너희가 헌신이 부족해서 그렇다 라던가…
왜 믿음이 없느냐 라던가…
조금더 노력하면 된다 라던가…

나도 정말 참 많이 듣는 소리다. -.-;
그런데 또한 내가 많이 하는 소리인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깃발만 꽃으면 순식간에 사람이 몇백명씩 모이던 시절에 복음을 전했던 전도자들은,
1000명에게 복음을 전해도 한두사람 들을까 말까하는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침체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역자들에게 참 많이 해야하는 이야기는
‘힘내라’ 라던가
‘더 헌신해라’ 라던가
‘믿음을 가져라’ 라던가
‘용기를 내어라’와 같은 이야기라기 보다는…

‘괜찮아…’ 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괜찮아’라는 말로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러나 괜찮아 라는 말을 충분히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건 그들을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굳이 잘못을 찾자면 부흥의 시기를 지났던 선배들에게 있다.

성급한 자아비판의 오류

나는 자아비판을 즐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매우 성숙한, 자기 성찰을 잘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내가 자아비판을 즐기는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음을 본다.

1. 자기 방어이다.
내가 내 스스로를 비판함으로써 다른이가 나를 비판할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소 치사한 자기방어라고 할 수 있다.

2. 게으름이다.
겸손, 혹은 자기성찰 이라는 건강한 가치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나와 내 주위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내 스스로 건강한 가치를 지킨다는 자긍심도 지키게 되고 스스로의 만족감도 느끼면서 부지런히 나와 내 자신을 살피는 귀찮음도 피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무지이다.
최근 어떤 형과의 대화를 하면서, 내가 그 형에게 내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거짓이 많은지, 나의 manipulative한 성향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작하여 만들어낸 사역의 열매가 많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러자 그 형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그렇게 맺으셨는데… 과연 네 능력으로 심지어는 아주 얄팍한 수준의 사역의 열매라도 맺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 하나님의 일하심을 덮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지금 이 글도 그릇된 자아비판은 아닐지…

참… 벅차다.

잠을 설쳤다.
설잠을 자다가, 전화로 뉴스를 확인하다가 하면서 지난 밤을 보냈다.
한국과 미국 뉴스 app에서 ‘속보’ notification이 계속 울려댔다.

밤에 깨어 생방송 동영상을 보다가 울고,
그러다 깜빡 잠이들고…

이 블로그에 뭔가를 더 쓰기에는 워낙 좋은 생각들과 글들을 많으니 내가 여기에 생각을 적는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 늘상 쓰던 글을 쓸 수는 없어서 이렇게.

몇가지 완전 잡생각
오늘의 많은 detail은, 몇년 뒤 대입시험에 괄호 넣기 문제로 나올 것 같다.

또 한가지 재미 있는 것.
온라인에서 JTBC는 다른 모든 매체를 완전 압도한다!
JTBC 시청자는 6만명 수준인데 반해,
KBS가 1만명 조금 넘고,
나머지는 몇천명 수준.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3)

그런데 지금은 침체의 시기임이 분명하다.

예전에 했던 방식으로 하면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유효기간이 지난 약을 먹는것과 같다.
예전에는 그 약만 먹으면 바로 팍팍 효과가 있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혹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주 희미하다.
심지어는 그 약의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전도를 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공동체는 성장하지 않고, 사람들의 헌신이 그쳤다.
헌금은 줄어들고, 찬양의 소리는 작아지고, 기도는 짧아졌다.

내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사역에서 경험하는 일이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2)

내가 속한 공동체의 경험이나 내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내가 부흥의 시대를 살았다고 이야기할수는 없을 것이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가지 다른 생각들이 있지만….
적어도 내가 부흥의 시기를 거쳤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나는 정말 아주 강력한 복음의 영향력아래 놓이게 되었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그런 경험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게 그저 내가 속한 공동체만의 현상이 아니라 한번도 접점이 없던 다른 공동체에서도 그런 일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말 아주 말도 안되는 논리로 ‘복음을 전하’고 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사방에서 그 복음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선교사로 삶을 드리는 사람도 많았고, 자신의 커리어 선택을 급격하게 변경하는 사람들도 정말 흔했다.
교회 안에서 평생 그 복음을 가지고 살고, 복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살고, 그 복음을 전하면서 살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나는 그때는 그게 그냥 당연한 것인줄 알았다.

정말 기도하고 성경공부하면 복음을 모르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예수를 믿는 것이 당연한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기도하고 헌신해서 어떤 공동체를 시작하면, 그 공동체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단기간에 성장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삶을 정말 제대로 드리고 온전히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option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이지, 그저 듣기만 하면, 제대로 이해만 하면 당연히 줄줄이 믿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경험들이 그러 했으니까. 내 80년대와 90년대의 경험은 정말 그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