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교회 (7)

현대의 교회가 내가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질문들(그리고 그것보다 더 광범위한 더 많은 질문들)에 대해 답이 없다면, 그 답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어야 한다.

나는 아주 기본적으로는, 그 답을 찾는 과정을 아주 길~게 생각하고 접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이 몇년안에 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10~20년, 혹은 그것보다 더 길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의 ambiguity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ambiguity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부는 치열한 신학적 사색과 연구가 있겠지만, 매우 많은 부분은 post-Christendom에 들어가버린 세상과 engage해가며 찾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진리’이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는 아주 구체적인 level에서의 행동강령을 자세히 prescribe해주기보다는 아주 큰 선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 선언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 하는 것을 살면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은 매우 긴 과정이 될 것이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할 것이다.
또 많은 trial-and-error가 있을 수도 있고, 매우 부끄러운 실패를 경험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2019년, 교회 (6)

만일 현대교회가 지금 세상을 해석해낼 수 없다면 배워야한다.
교회가 마치 있지도 않은 해답이 있는 것 같이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흔히 교회에서 설교등을 통해서 “세상에서 믿는대로 살아라”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질문들을 한번 던져보자.

  • 도대체 세상이라는게 뭔가? 세상을 어느정도 긍정해야하나? 세상을 어느정도 거부해야하나? 세상을 변화시키는게 가능한가? 어떤 부분이 변화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변화를 포기해야하는가?
  • 도대체 믿는다는건 뭔가? 믿는건 예수믿고 천당가는 건가? 그게 믿음의 contents라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믿음과 무관한 것이 아닌가?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하는 신념인가, 그렇지 않으면 경계표지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고대문서인 성경본문을 해석해내는 방식은 어떤 것이 적당한가?
  • 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세상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engage해야 하는가? 특히 타종교인이나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 전도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인 적절한가?

언뜻 떠오르는 질문들을 ‘세상’, ‘믿음’, ‘살다’라는 세가지 keyword를 중심으로 던져 보았는데,
현대교회는 이것들에 대해 정말 해답이 없다.
해답이 없다는 것을 좀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겸손해져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