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답을 찾는 강소교회를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선,
매우 헌신된 평신도 그룹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멤버가 모두 다 엄청나게 헌신되어있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치열한 고민과 사색은 그 중에서도 소수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전체가 그런 치열한 사색과 해답찾기가 우리 교회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는 동의가 있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내는 사람들을 더 배워나가려는 방향으로 함께 해야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여기서 헌신된 사람들이라는건, 교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활동보다는 세상에서 살아내는 치열함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헌신된 그룹은 어느정도 post-Christendom era의 신학에 대한 기초적인 학습이 되어있으면 좋다.
스스로 성경을 해석해내는 어느정도의 기초가 있어야 하겠고, 그 해석의 다양성과 입체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shallow한 교조적 해석을 넘어서는 고민이 가능하다.)
그리고 가령 Christopher Wright의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던지, Anabaptist들이 갖는 반체제성(?)과 현대 자본주의와의 긴장 등에 대한 insight가 있다던지,
신자유주의 체제의 한계와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있다던지… 하는 등의 신학적,인문학적 소양이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면 좋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런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context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것으로 여기고 함께 고민해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평신도들이 상황에 함몰되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격려하는일이 중요하지만, 또한 상황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단순화시켜버리는 우를 범하지도 말아야 한다.
계속해서 고민과 나눔을 격려하고 organize하고, 신학적 insight를 제공하는 일을 해야한다.
이런 교회는 아마도 대개는 의도하지 않게 ‘문턱이 높은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사색과 토론과 고민의 깊이가 깊을 가능성이 높고,
헌신의 모습이 radical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위 seeker-friendliness는 그런 의미에서 많이 포기해야할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모델이 작동하려면, 그 공동체안의 radical한 친밀함과 투명함이 필요하다. 서로 자신의 한계를 내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서로 잘못된 모습을 사랑의 마음으로 지적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가령 서로의 수입과 돈 씀씀이를 공개하는 것이 필요할수도 있고, (적어도 동의하는 소수만이라도)
어려운 상황속에서 살리기 어려운 모멘텀을 그런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헌신으로 돌파해내는 것이 가능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