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기억?

어제 무심코 본 어떤 짧은 youtube clip에서 어릴적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어릴때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면이 있나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정말 별로 생각나는게 없다. ㅠㅠ
내 어린시절이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구김없이 자랐고, 우리 부모님은 참 좋은 분이었고, 나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막상 행복한 순간이라고 딱 기억나는 한 장면이 내 기억에 있지는 않다.

허..참…
나는 그래도 나름 행복했던 것 같은데, 그 행복을 딱 담아내는 하나의 그림이 뭔가 잡히질 않는거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일반적으로 어릴적의 기억이 그렇게 분명하게 남아있지 않다.
내 국민학교 친구들, 심지어는 중학교때 친구들도 지금 내가 기억하는 아이들이 10명도 되지 않는다.
뭘 하고 놀았는지 그런 기억도 별로 없다.

이제 나이가 들었지만,
문득 지금 내가 보내는 이 시간 속에서도,
어떤 장면 하나 하나의 행복한 스냅샷을 내 머리 속에 남겨두는 노력을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어떤 순간 순간을 머리속에 사진과 같이 담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일종의 mindfulness의 훈련이라고나 할까…

어머니 팔순

어머니가 팔순 생신을 맞으셨다.
멀리서 그저 영상통화 한통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원래는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한국에 한 3주 만이라도 다녀올까 했는데, (2주 정도는 한국에서 자가 격리중 일하고, 한주 정도 휴가내고)…
지금 같은 시기에 잘못 움직였다가 자칫 아버지 어머니에게 바이러스를 옮기게되지는 않을까 싶어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어머니 마음도 그렇겠지만,
나도 그렇게 많이 우울하다.

Santa Clara County vs. 한국

내가 살고 있는 산타클라라 카운티는 비교적 교육수준도 높고, 소득수준도 높은 편이다.
전반적으로 나름대로 마스크도 잘 쓰고 다니는 것 같고, 특별히 미친짓을 하는 사람들도 없다.
산타클라라 카운티의 인구는 대충 2백만명쯤 된다. 그런데 하루 확진자 숫자는 대충 1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또 약간 범위를 넓혀서 캘리포니아는 인구가 4천만명쯤 된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의 하루 확진자 수는 3000명 수준이다.

지금 민우가 있는 조지아주를 보면,
인구 1천만명쯤 되는데 하루 확진자가 1500명수준.
그중 디캘브 카운티의 인구는 75만명인데, 하루 확진자는 50명 수준

한국은 인구가 5천만명이 조금 넘는다. 하루 확진자는 100명이 조금 안되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100만명당 하루 확진자 수가 75명 수준
산타클라라는 100만명당 하루 확진자 수가 50명 수준
조지아는 100만명당 하루 확진자 수가 150명 수준
디캘브 카운티는 100만명당 하루 확진자 수가 65명 수준
미국 전체로 보면 100만명당 하루 확진자 수가

그런데 한국은 인구 100만명당 하루 확진자 수가 2명 수준!

그런데 한국은 거의 모든 사회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들 회사도 나가고, 외식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이것에 대해 기사나 글들도 읽었고, 방송으로도 접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다 이해가 안된다.
어떻게 그렇게 한국에선 잘 되는 걸까.
정말 놀랍다.

취미생활을 찾아서

너무 취미가 없는 것 같아 취미로 할만한 것을 찾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취미로 가질만한 것들을 좀 생각해봤는데, 뭐 하나 딱이다 싶은게 없어 고민중이다

첫째,
나는 취미생활에 많은 시간을 쓸 자신이 없다.
그건 취미생활 자체에 많은 시간을 쓰는 것도 자신이 없지만, 그걸 배우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도 어렵게 느낀다는 거다.
아마도 한주에 1~2시간 정도가 maximum이 아닐까

둘째,
취미생활에 돈을 많이 쓰고 싶지 않다.
소위 장비를 많이 갖추어야하는 것은 그래서 진입장벽이 내겐 너무 높다.
대충 내가 취미생활에 쓸 수 있는 budget은, 한달 30불 정도?

셋째,
나는 잘 못하는게 진짜 많다.
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운동신경도 꽝이고, 겁도 많다. 일반적으로 예술적 감각이 좋지도 않고.

넷째,
나는 introvert여서 취미생활이 내게 휴식이 되려면 혼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가만 생각해보면,
이 정도쯤 되면
야, 그럴바엔 하지 마! 라고 할만 하다.
그러니 내가 취미가 없지….. ㅠㅠ

복장 터지다

흔히 복창터진다고 쓰는 말은 복장터진다라고 쓰는게 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복창은 남이 한 말을 따라하는 것 (군대같은 곳에서)을 의미하고,
복장은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이야기한다고.

(나도 몰랐다. 어제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ㅠㅠ)

최근에 중국의 어떤 start up 에서 수십만불 정도되는 어떤 물건을 만들어서 들여오는일을 하고 있다.
지난 5월쯤 부터 시작해서 해오고 있는데,
예전같으면 아마 기술적인 검토와 디자인을 하고 물건을 만들어서 우리가 받게되기까지 최대 2달정도면 가능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10월이 다되어가는데도 아직 우리가 그걸 받지 못하고 있다.

정말 거의 모든 단계에서 다 막혀서 힘들다.
중국쪽에서도 여러가지 행정절차들이 더 까다로워져서 더 힘들고, 우리 쪽에서 마찬가지다.

어제는 너무 복장이 터져서 여기저기 이메일도 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도 하면서 이거 빨리 해달라고 엄청 보챘다.

그런데…
어제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편 일이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되지 않는다는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조금 더 slow things down할 수 있는…?

오히려,
이런 상황속에서 일이 빠릿빠릿 되어야 하는 것은,
지금 더 소외되어있고 어려움을 겪고 있고, 좀 다급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 관한 일들이 아닐까.

지금 내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채근해서 일이 빨리 되도록 하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보면,
약자에게 돌아갈 사회적 공동체적 resource를 내게로 끌어와 내 일을 해결하려는
이기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자세는 아니었나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폭력적이진 않더라도,
폭력적 시스템의 일부가되어 일하는 그런 모습이랄까.

나는 좀 살고 봐야지

Cover my ass라는건 내 자신을 보호한다는 의미의 관용어구다.
비속어라고 분류할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뭐 아주 엄청 험악한 말은 아니다.

살다보면 인생에서 맞닥드리는 모든 사안에 대해, 일단 나는 좀 살고보자는 자세로 임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자기 방어는 본능이고 자기방어를 하고자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냥 사사건건 모든 일에 자기방어가 최우선이라면 이건 좀 다른 얘기다.

그렇게 자기방어에만 집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거나 함께 살아가는건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 사람은 자기방어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포기하기 때문이다.

더 고귀한 가치도, 더불어 살아감도, 심지어는 단기간 손해를 통해 장기적인 유익을 얻는 것 조차도, 지금 당장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다 포기해버린다.

나는 좀 살고봐야겠다고 무조건 자신의 엉덩이를 감싸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보며,
아… 내가 나만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는 모습이 저것보다 결코 나아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에 섬뜩하다.

자신의 엉덩이를 감싸고 가리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결국,
그 사람을 위해 내 엉덩이를 내어놓는 것 이외엔 없는 것일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말걸…

민우가 가끔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가 중학교때 필요이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는 거다.
중학교때 그렇게까지 스트레스 많이 받으며 공부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자기는 그때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고.

나는 민우가 중학교때 그렇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는지 몰랐다.
그냥 학교 재미있게 다니고, 잘 지내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민우는 나름대로 그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때도 물론 그랬던 것 같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민우는 아주 어린시절을 MIT 기숙사에서 보냈다.
MIT 부설 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다닐때는 엄마를 따라서 Harvard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빠 친구들은 다 MIT 다니거나 졸업한 사람들이었고, 엄마 친구들도 그랬다.

그야말로 집에서 제일 가까운 학교가 MIT와 Harvard였던 셈이다. 그냥 동네 학교.

적어도 우리는 민우에게 소위 좋은 학교 들어가는게 인생의 최대 목표인것으로 교육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공부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고 많이 이야기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민우는 딱 그렇게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말해서 민우가 고등학교때 화학을 B를 받아왔을때 나는 의아해했다. 아니 왜 얘가 화학같은 과목을 B를 받을 수가 있지? 진심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얘가 뭐 다른 이유가 있나… 많이 고민을 했었다.
민우는 그냥 화학을 재미있어 하지도 않았고, 화학에 재능도 없었던 거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되었었다.

대신 민우는 자유롭게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고, 손을 꼼지락 꼼지락 해서 조그만 물건들을 만들고 하는 것들을 참 즐겨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자기 전공과 관계도 없는데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창의적으로 소설이나 시를 쓰는 것도 즐긴다.

나는 나 같은 사람보다는 민우 같은 사람이 훨씬 더 골고루 잘 갖추어진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민우에게 있어 나 같은 아빠가 있었다는건 일종의 핸디캡이 되어왔던 셈이다.

어제 민우가 보고 싶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는 참 감사했다. 민우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내가 목사가 아니어서…

최근에 온라인으로 한 어떤 소그룹에서,
그 소그룹이 참 좋았고, 내가 했던 이야기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도움을 얻었는지 많이 궁금했다.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는데, 한가지 물어본 질문은 이것이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제가, 만일 목사님이었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그렇게 열심히 듣고 도움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들의 대답은 아주 명확했다.
내가 만일 목사였다면 그렇게 도움을 얻지 못했을 거이라는 거다.
심지어는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소 놀랐다.
아니 왜?
왜 목사가 하는 이야기는 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못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지?

20년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면 2000년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있었으니 그때를 기준으로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

2002년 월드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큰 이벤트였고, 그 월드컵에서 유명해진 축구선수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명인들이다.
2002년의 사건은 지금도 누구나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태어났을때는 한국전쟁이 끝난지 20년이 아직 되지 않았을때였다.
그때 우리 부모님은 만나서 결혼을 하셨고 나와 내 동생들을 낳으신거다.

내가 태어났을때에도 여전히 한국사회는 한국전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때였던 거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시간은 참 빨리 지난다.
10년이나 20년쯤은 그렇게 훌쩍 지난다.

시간이 그렇게 흐른다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복된소식이다.

열심히 해보겠다고…

금년초에 혼자서 나를 돌아보면서 반성하고 결심했던 것이 하나 있다.
적극적으로 내가 어떻게든 소그룹을 만들어서라도 부지런히 성경공부도 하고 강의도 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 그 결심이었다.

그래서, 일년 52주 중에 적어도 절반인 26주는 한주에 하나씩 누가 대상이 되었던지 간에 강의를 하겠다는 것이 내 결심이었다.

금년들어서 38주째를 지나고 있는데…

금년에 이래저래 녹음/녹화한 강의 녹음/영상이 총 27개가 되었다.
그중 4개는 같은 내용을 두번 한것이므로 unique count로는 22개가 되는 셈이다.

요즘 회사일도 스트레스 엄청 받고 있고,
여러가지로 만만치는 않지만 이렇게 하니 내가 좀 숨통이 트인다.

정말…. 당장 내가 좀 살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