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6)

조지 뮬러의 이야기들을 읽으면 완전 놀랍다.
로렌 커닝햄의 책들을 읽어도 그렇다.
그런책들에는 기적적으로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극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아… 하나님은 나를 그런 사람들보더 덜 사랑하시는게 분명해보인다.
나는 기도해도 그런 극적인 기도응답을 별로 경험하지 못한다.
내게있어서 대부분의 기도응답은,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내 생각을 바꾸어서 벌어진 다른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A 라는 직장에 가고 싶어 마구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A라는 직장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거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B라는 직장으로 가게 되었고…
나는 그러는 과정에서 A라는 직장에 가고싶어하던 마음이 누그러지거나 사라져서 결국 괜찮게 해결되는…

….
이렇게 내게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많은 경우 그런거다.
A라는 길이 정말 좋아보이고, 그래서 A를 위해 많이 기도했는데, 결국 그게 안되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상황.
그런데 조지 뮬러나 로렌 커닝햄이나 그렇게 엄청나게 기도하고 응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개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다.
훨씬 더 상황은 절박하고, 훨씬 더 기도의 선한 동기가 명확하고, 훨씬 더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확연한 것이다.

결국 내 기도응답이 그렇게 미지근하게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기도하는 상황과 내 기도의 모습이 그 기도요청이 꼭 들어지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인거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그 상황에서 내 의지와 욕심을 꺾는 것이 더 바람직한 상황인거다.

기도 (5)

점점 철이들고, 신앙도 성숙해져가면서 내가 하는 기도 중에도 꽤 철든 기도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기특한 기도들도 있었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내가하는 기도들에는 별로 응답을 해주시지 않았다.
여태껏 그렇다.

내가 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친구를 위한 기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
교회가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해달라는 기도…
이런 것들도, 정말 내가 기도를 해서 그 응답으로 뭔가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게된 경우가 거의 없다.

아니,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몇가지 가능성이 있겠다.

1. 여전히 내가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은 기도이다.
2. 기도가 사실은 많이 응답이 되었는데 내가 그걸 잘 알아차리지 못한 것 뿐이다.
3. 하나님께서 내 기도는 별로 들어주시지 않는 모양이다.
4. 기도란 원래 그렇게 사람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위의 4가지 중에서 4번의 가능성에 더 많이 주목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일들이 없지는 않으나,
훨씬 더 많은 경우 기도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 요구를 관철시키기위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그것이 잘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걸까…?

기도 (4)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삶에서 그렇게 막~ 필요한 것이 많지 않았다.

우리집이 대단히 부자는 아니었어도, 돈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던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했고, 학교에서 친구도 많았다.
소위 반장선거 같은걸 하면 늘 압도적으로 애들이 나를 지지해줬고,
별로 꿀리는 것 없이 지냈다.

정말 내가 그런 상황에서 달라고 요청했던 것들이 무엇이 있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별로 생각도 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을 테고,
꼭 필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있으면 좋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한편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경험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ego를 높여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도 (3)

나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나는 일반적인 성품이 모범생이니, 어려서부터 교회에 잘 빠지지 않고 다녔다.

어릴때 교회는 참 재미 없었다.
설교는 늘 지루했고, 배우는 내용은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교회에 매주 다녔다.

어릴때 배웠던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로 시작해서는 그 다음부터는 원하는 것을 주루룩~ 리스트로 만들어서 요구하는것이 기도라고 배웠다.
심지어 내가 대학생때였던가… 소위 기도 응답노트라는 것도 만들어서 응답한 기도들을 적는 ‘믿음 좋은’ 친구들도 주변엔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는 그렇게 잘 들어주지 않으셨다.
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들도 별로 그렇게 잘 들어주시지 않았다.

나는 대학교 3학년때쯤 일종의 회심의 경험을 했다. 복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고, 내 삶을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내가 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잘 응답해주시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응답해주시고…
내겐 그런일이 별로 없었다.

기도 (2)

오 할레스비가 그랬던가.
기도해서 구하지 않았는데 소중한 것이 주어지면, 그 주어진 소중한 것은 그 사람에게 독이 된다고.

사람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얻게 되었을때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자연스럽게 돌릴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떤 소중한 것을 얻으면 그것이 자신이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그것으로 인해 더 교만해지고, 그건 그 영혼에게 독이된다.

뭐 이런 식의 논리였던 것 같다.
아, 참 멋진 말인데…

그런의미에서 보면 나는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해야하는 것 같다.
우선, 나는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별로 하지 않는다.
(아, 구하는 기도를 하는데, 내게 무엇을 달라던가 하는 식의 기도를 별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나는 많이 교만하다. -.-;

내가 교만한 것은, 내가 평소에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내 필요를 구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도 (1)

자주는 아니지만, 정말 기도가 필요할때 내가 가는 곳이 집에서 45~50분 정도 떨어져 있다.
약간 뜬금없이 이 동네에 한국사람이 하는 ‘금식 기도원’이 있다.
완전 오순절 스타일의 예배도 드리고… 그러는 곳인데…

정말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낄땐 그곳에 가서 조그만 방 하나를 빌려서 혼자 한 반나절 기도하다가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한지도 몇년이 되었네…)

Redwood가 많이 서 있는 산 속에 정말 허름하게 있는 곳인데,
방에서 기도하다가 잠깐 나와서 산 속에서 산책을 하고, 다시 방에 들어가 기도하고…

돌이켜보면 그렇게 가서 정말 기도를 찐하게 잘했다고 느꼈던 적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어쩌다 한번씩 그렇게 기도를 하다가 기도가 열리는 일이 가끔씩 있다.

예전에 Boston에 있을때는, MIT 66동 건물 지하에 아무도 오지 않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이 내 비상 기도실이었다. ^^
옆에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고 깜깜하고 그런데… 기도해야겠다 싶을때 그곳에 가서 한 10분이라도 기도를 하고나면, 정말 한 10번중 한번정도 기도가 열리는 경험을 했었다.

별로 성공확률(?)이 높지도 않은데, 그렇게 가끔씩 기도가 잘 되었던 장소들을 내 나름대로 나만의 기도장소로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적어도 내게 있어 기도가 그렇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 기도의 거의 대부분은 그냥 쓰레기통에 바로 들어갈만한 기도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기도를 한다고 느껴질때가 있고,
그런 경험이 이 찌질한 내 기도를 그래도 붙들어주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분들은 기도를 하기만 하면 완전 깊게 하시고, 신비로움도 경험하시고… 그런다던데,
나는 그저 이렇게 지지부진한 기도 속에서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찾아가곤 한다.

기뻐하십시오

바울을 보면 좀 그냥 힘들게 느껴질때가 있다.
N T Wright은 바울에대해 아마도 바울이 “High maintenance friend'(손이 많이 가는 친구)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랬을 것 같다.

뭐 하나도 쉽지 않은 그런 사람.

빌립보서에 나와있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좀 그렇다.
기뻐하라는게 명령이 될 수는 있는 건가?

아니, 힘들고 어려운데 거기서 기뻐하라는 것이…

자기가 자기의 신앙으로 어려움에도 기뻐할수 있다는 건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명령을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나.

이와 관련된 몇가지 생각이 있지만 뭐도 하나 만족스럽지 않고,
계속 내겐 매우 풀기 어려운 수학문제가 나와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기쁨이라는 것이… 과연 권유될 수 있는 것인가. 명령할수 있는 것인가.

고통의 시편, 시편의 고통

시편은 나 같이 정서적 깊이가 얕은 사람은 대단히 어려운 성경이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석을 깔끔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렇게 시편을 읽는 것이 어려웠던 것은 내가 이해하는 삶이 너무 shallow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시편을 어렵게 느끼는 것은, 지금 내가 이해하고 있는 삶이 너무 shallow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정말 벽을 마주하고, 두려움과 대면하고, 고통을 겪고, 불안함과 싸워야하는 경험들을 통하지 않고는, 시편이 이야기하는 삶의 지혜를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가슴이 먹먹해서 기도도 잘 되지 않는데….
그래도 기도 밖에는 할 것이 없어 그 먹먹한 가슴으로 기도하겠다고 손을 모아보는 경험.

시편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고통의 시편에 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기도할 뿐이다.

소비생활

나와 우리 가족의 소비생활을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우리는 차도 비싼거 타지 않고, 옷도 여전히 학생때같이 입고 다닌다.
요즘이야 늘 집에 있으니 정말 옷입는 것이 단순하지만,
매일 회사에 갈때도 몸에 걸치는 옷을 다 더하더라도 50불이 넘는일는 거의 없다.
밥 먹는 것도 늘 단순하게 먹고, 저녁에 한국식 식사를 할때도 반찬이 기껏헤야 2개정도 되려나.
비싼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집에 있는 가구는 우리가 대학원생때 쓰던 것들이 여전히 많다.
식탁, 책꽃이, 소파 등등 보스턴에서 살때 싸게 산 가구들을 아직도 쓰고 있다.
비싼 시계나 다른 장신구도 우리는 없고, 집에 값나가는 물건도 따로 없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다소 사치를 하는 것이있다.
그것은 productivity 와 관계된 것들이다. – 주로 컴퓨터, 스마트폰 등등.
나는 집에 회사용 laptop이 두개가 있고, 개인용 laptop이 하나 있다.
회사에서 2년마다 회사용 laptop을 바꾸어주니까 2년마다 그때 제일 최신형의 laptop을 쓴다.
전화는 회사에서 1년마다 새것으로 바꿀 기회를 주기 때문에 거의 매년 가장 최신의 새 전화를 쓴다.

나는 이렇게 회사에서 주는 것으로 새로운 device를 update하지만,
내가 이렇게 하는 탓에 우리 가족들도 대개는 비교적 high end의 최신형 전화를 2년에 한번씩 바꾸는 편이다.

그 외에도, 내가 쓰는 마우스는 자그마치 200불 짜리이고, 여러가지 종류의 wireless earbuds와 headphone들이 있다. 출장용, 운동용, 회의용 등등.

그리고 우리는 대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돈을 더 쓰는 편인 것 같다.
말하자면 돈을주고 시간을 사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바쁠때 저녁을 밖에서 사가지고 들어온다던가, 조금 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약간 더 비싼 물건을 산더거나 하는…

최근엔 사고싶은 몇개의 물건들이 더 생겼다. ㅠㅠ
이런 덕질을 살짝 좀 그만두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