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4)

기독교가 계속해서 거부할만한 것들은 분명히 있다.
폭력, 미움, 죄, 음란함, 탐욕 등등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기독교가 거부하는 것들이아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는 이런것들까지도,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18세기 조선에서 지금과 같은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큰 물의를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 기준등을 적용해 보았을때 피해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다.

이게…
수영복과 같이 비교적 쉬운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더 많은 것들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령,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우파를 지지해야 하는가?

20세기 중반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폭력이 사람들을 억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공산주의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선택 중에서 우파를 지지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삼아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폭력에 대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싸워야하는 우상이, 공산주의의 어그러진 이상주의와 그로인해 비롯된 폭력이라면, 제한적으로 정치적 우파를 지지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에는 어떤까?
지금도 공산주의가 현대세계가 싸우고 있는 주된 우상인가?

그런 완전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지금 현대 세계가 싸워야하는 우상은 오히려 이념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체제 안에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탐욕, 쾌락추구,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폭력성 등등이 싸워야하는 더 큰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정치적 우파가 기독교 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도 잘못된 일이다.

이처럼,
어떠한 우상도 타파하는 기독교가 그 기독교적 생명력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대상은 고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떤시대에는 공산주의의 폭력이었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그것이 자본주의의 폭력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