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1)

지난 토요일,
한국에서 방송된 518 기념식을 youtube로 몇번이나 다시 보았다.
나도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런데 그 기념식 전후로,
어떤 정치집단은 또 완전 이상한 소리들을 해댄다.

나는 지금 한국의 정치 지형은…
가치를 추구하는 일단의 정치집단과,
이익을 추구하는 일단의 정치집단이 맞붙어있다고 본다.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은, 그 가치를 위해서 젊은 시절에 고문도 당하고, 감옥도 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은, 젊은 시절부터 그저 이익/출세/성공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어떤 가치로 포장하려고 노력을 하긴 하는데,
영 어색하고 이상하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삑싸리를 낸다.

지금 집권세력이라고 해서 모두다 고매한 가치를 가지고 있겠느냐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큰 흐름으로 봐선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5)

지금 이렇게 쓰는 이야기는,
사실 블로그를 하고 있는 내게도 매우 큰 고민거리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독자들만 이 블로그에 정기적으로 들어오신다.

가끔 개인적인 통로나 이 블로그의 댓글등을 통해서 내게 전달되어오는 feedback들은 그냥 다 positive한 것 일색이다.

그게 어디 블로그 뿐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들,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내 주장, 내가 하는 가치판단들…
이것들에 대해 건강한 반론을 듣는 일은 정말 아주 드물다.

아, 물론 아주 무논리의 억지주장으로 내게 악악하는 사람들을 만날때가 없지는 않다. ^^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내 약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내 audience에 익숙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가끔 이 블로그에 쓰는 대로, 내가 갖고 있는 ‘외로움’은 바로 그런 고민과 맥이 닿아있는 듯 하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4)

그러면 이렇게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져버려 논리의 왜곡을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 생각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정치가가 되었던 종교지도자가 되었던…
그 사람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자기확신으로 인한 확신편향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경계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이 문제를 다루어낼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된다고 본다.

두번째로는,
건강한 비판을 계속 듣는 통로를 열어두어야 한다.
자신에게 하는 긍정적인 반응은 10분의 1로 축소시켜서 들으려 하고, 자신에게 하는 비판적인 반응을 10배로 확대시켜서 들어려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아니, 내가 이 얘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이 얘기를 했더니 은혜를 받더라고…
이건 그 얘기를 계속해도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인식해야 한다.

예전에 A 목사님이라는 분과 어떤 사역을 계속 해야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분은 매우 말씀을 잘 하시고, 옳은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분이셔서 그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분과 함께 사역을 하던 일단의 사람들이 그분이 하시는 어떤 말씀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A 목사님은 그 문제에 대해 내 말이 맞는데 왜그래 하시며 계속 반발만 하셨다.
그 목사님과 그 문제로 대화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그분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으시고, 아주 꼿꼿하게 내가 맞다는 입장을 유지하셨다.
그분과는 대화가 참 어려웠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년 뒤,
그 목사님께서 다른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내가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그때 막 facebook을 시작하셨을 때였다.
그분은…
내가 설교를 할때는 사람들이 다 아멘만 하니, 내가 다 옳은줄만 알았다.
그런데 facebook이라는 광장으로 나가보니, 내게 심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따라다니며 조목조목 따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내가 늘 옳은줄만 알았는데 그런게 아니더라.

나는 facebook을 잘 하지 않지만,
가끔 한번씩 들어가면 그분의 포스팅을 볼때가 있다.
그분은 연세가 더 드셨지만, 그분이 젊었을때보다 훨씬 더 열려있으시고, 유연하시다.

정치인들이 되었건, 목사님들이 되었건,
나는 이 A 목사님과 같은 경험들을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3)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져서 그 audience에게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되면,
그 정치가는, 그 목사님은, 점점 그 환경 속에서 ‘뽕’을 맞게 된다.
자기가 이야기하면 열광적으로 반응하니까,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맞는줄 아는 거다.
그래서 더 독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더 게을러지기도 하고, 더 논리가 무너지게 되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든, 무슨 무논리의 막밀이든,
그것에 긍정적으로 반응 하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종교적 환경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 논리에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이 헌신한 그 종교적 가치에 동의한다는 차원에서 동의하지 않는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앞에서 내가 글을 쓰긴 했지만,
요즘 종교가 되어버린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설사 어떤 정치가가 막말을 하거나 논리가 부족한 말을 하더라도,
그저 내 진영의 사람이니까 하고 그 사람의 엉뚱한 소리에 박수를 치고 열광을 한다.

이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은 그럼 무엇일까?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2)

어떤 목사님이라도,
그 목사님에게 ‘당신의 설교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설교에 대한 비판을 계속해서 경청하면서 매주 설교를 이어가는 목사님들이 있을까?
나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없을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단정적인 말이고, 정말 거의 없을 것 같다.

어떤 목사님이 살짝 뭔가 논리나 주장이 정도에서 어긋난 설교를 좀 하다고 하자.
그럼 그 교회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아마도 삼삼오오 모여서 목사님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조금 할것이다.
그러다가도, 아니 이러면 안되지.. 뭐 그렇게 이야기하는 성실하신 권사님 말씀에 살짝 기가 눌려서, 그래 뭐. 내가 그냥 좀 참고 듣지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짝 벗어난 설교도 어떤 사람들은 좋다고 듣는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목사님에게 가서 꼭 이야기를 한다. 목사님 오늘 설교 참 좋았어요.
그러면 그 목사님은 우쭐해진다. 아 이 설교가 좋았던 거구나.

목사님이 거기서 좀 정신 차려서 살짝 비뚤어진 것을 스스로 좀 바로잡으면 좋은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않고 더 비뚤어지거나 벗어나게 되면…
위에서 이야기한 현상들이 살짝 더 심각하게 일어난다.
그 설교가 불편한 사람들은 살짝 더 불만을 이야기하고,
그 설교를 잘 들은 사람들은 쪼로록 목사님에게 달려가서 설교 참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목사님은 거기서 살짝 더 우쭐해지고.

그러다가 어떤 임계점이 넘으면,
그렇게 불만을 갖던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대해. 설교에 대해 포기한채 교회를 다니거나,
아니면 교회를 아주 옮겨버린다.
그러면 목사님에게 그나마 정직한 feedback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없어져 버리고,
목사님 설교 좋았어요 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이렇게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 목사님만의 audience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중엔 그 목사님이 막말을 하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건,
그저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들만 남게되고,
그럴수록 목사님은 더 우쭐해지고 신이나서 설교를 하게된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1)

요즘 한국의 모 극우정당을 보면 정말 하는 짓이 가관이다.
끊임없이 막말을 해댄다. 좀 말이 심하다… 싶은 정도가 아니고, 입에 담기 어려운 아주 심한 극언을 쏟아내고 있다.
아니, 저러면 정말 저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쌍욕과 극언에 동조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저렇게 하면 자기들이 망한다고 생각을 안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정치 전문가가 아니니,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이렇게 하면 저 정당은 망할 것 같은데… 내가 저 정당 지지자라면 많이 속상할 것 같은데…

인터넷에서 찾아본 글이나 youtube video등을 찾아보면서 적어도 내게 꽤 설득력이 있었던 분석은,
지금 그 정당의 사람들이 극우 youtube를 너무 열심히 보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극우 youtube는 극우의 사람들만이 열심히 보는 매체이니, 거기서는 아주 극언을 하면 인기가 높아지는데, 자꾸 그런 극언들을 열심히 듣다보니 그것에 취해서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고 저렇게 망해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들을 막말이라고 신문기사에서 이야기하길래, 자세히 보니 그것도 극우 웹사이트에서 통용되는 말이라고.

지금 이 극우정당이 하는 이 일들이, 그들에게 정말 독이 될른지 잘은 모르겠는데,
(내 생각으론 이 사람들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긴 하다)
적어도 이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사실’과 많이 떨어져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audience만을 위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만 익숙해지다보니,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식한 아빠

민우는 전공이 ‘liberal arts’이다.
‘인문학’이라고 번역해야하나.
지금은 그중에서도 주로 문학과 연극쪽의 과목들을 많이 듣고 있는 것 같다.

쉐익스피어를 배운다는데… 음… 나 같은 사람은 그거 읽어도 해석도 안된다.
무슨 몇세기의 시(poem)도 배웠다고 하고,
여성학(?) 비슷한것도 배웠고, 내년에는 political science 쪽도 과목을 들어보려고 하는 것 같다.

무식한 엔지니어인 아빠 입장에서는,
허억 하는 내용들을 배우고 있다.

아빠는 진짜 무식하다.-.-;

민우는 그래도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잘 한다. 자기가 무슨 과목을 들었고, 뭐가 힘들도, 어떤 교수님이 좋고… 어쩌고…
학기중에 주말에 video chat을 하면, 민우가 먼저 끊자고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민우야 이제 들어가…라고 하면… 민우는 벌써? 하면서 늘 아쉬워한다. ㅎㅎ

그러나,
이제 20대 초반인 민우는,
아직도 wisdom(지혜)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물어본다.
어떤 것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어떤 것은 비행기 타려면 공항에 얼마나 일찍 가는게 좋으냐는 삶의 소소한 지식들도 있다.

비록 민우가 배우는 것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아빠이지만,
아직 삶의 지혜의 부분에서는 여전히 물어보는게 기특하다.

민우가 점점 커 가면서,
민우의 삶의 지혜가 어느순간에는 내 삶의 지혜보다 더 풍성해지는 날도 오겠지.
그러면 아빠가 무식할 뿐 아니라 지혜도 민우보다 못하게 되는 거겠지.

빨리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
민우에게서 보이는 삶의 지혜가 참 기특하고 깊구나… 하고 느끼는 때가 오면 좋겠다.
그때가 빨리 오도록, 민우에게 빨리 많은 지혜들을 잘 전달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잠언 9:10)

실력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실력이 없다면,
그 사람의 주장 자체가 옳기 않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옳고 그름은 때로 매우 애매한 경계를 가진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질 때에는 매우 자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심하게 왜곡된 기준을 가지기 쉽다.

그런데,
실력은 그것보다 훨씬 더 공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누가 실력이 있느냐 하는 것은 더 판단이 명확한 경우가 많다.

어제 회사에서,
자기가 옳은데 실력이 딸려서 억울하다는 사람의 푸념을 한참 들어주었다.
(나도 그 친구가 옳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집에와서 그 친구의 푸념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서,
많이 혼란스러웠다.

I’m available for you

회사일을 하는데 저녁에 conference call을 무지하게 많이 한다.
아시아쪽의 사람들과 일을 하는 일들이 많아서 그런데,
매일 conference call을 해야하는 주도 있고, 적어도 한주에 3번 정도는 저녁에 하는 conference call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급하게 무슨 일이 터지면,
그것 때문에 급하게 밤에 이메일 하고, 전화한다.

그 와중에 가끔 유럽쪽과 conference call을 해야하는 일이 겹치면,
그날은 완전 대박나는 거다.
요즘은,
아침 7시면 central europe이 오후 4시이므로, central europe에서 전화하기 좋은 시간이다.
그리고 오후 6시면 한국과 일본은 오전 10시, 중국과 대만이 오전 9시이므로 뭐 대충 그때쯤 하기 좋다.

내가 organize하는 conference call이 대부분이니까,
그러면 전후로 agenda 정리하고, 필요하면 action item 정리해서 나누고, meeting summary도 적어두고…
그럼 정말 하루가 아주 길~어진다.

그렇다고 내가 죽도록 힘들게 일하느냐 하면 그런건 아니다.
나름대로 내 일정을 꽤 flexible하게 조정할 수 있고,
내가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 일하고 있기 보다는, 내가 해야하는 일을 내가 정해서 하기 때문에 driven되기보다는 drive하는 입장이긴 하다.

내 주의의 사람들이, 심지어는 나와 가깝다고 하는 사람들도,
내가 너무 일에만 파묻혀서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많이 바쁘지 않고, 나름대로 work-life-balance도 좋은 편이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시간과 마음을 낼 여유가 있다는 것을 많이 광고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I’m available for you!

진취적 피동성 vs. 퇴행적 피동성

기독교는 한편 대단히 진취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피동성 속에서만 그 핵심을 맛볼수 있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project를 시작하셨고, 완성하실 것이고, 내가 그 큰 흐름에 포함된다는 것은 나를 대단히 진취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initiative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initiative에 의해 이루어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성이 참된 진리로 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면… 피동성을 추구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나를 던져서 가슴 뛰도록 헌신하는 진취성도 있어야 하지만,
나의 뜻을 꺾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게 들어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그것에 순종하는 피동성도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피동성을 ‘진취적 피동성’이라고 부른다.

반면,
어떤 사람은 무엇이든 하려고 하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으로’ 주저앉아버리는 결정을 해버린다.
대부분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내포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저 자신을 보고하고자 주저앉아서 피동적이 되어버린다.

이런 것은 ‘퇴행적 피동성’ 이다.

나는 매우 자주,
퇴행적 피동성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진취적 피동성으로 포장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독이 된다.
퇴행적 피동성을 가진 사람이 진취적 피동성을 갖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던지는 과감한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과정을 능동성을 거쳐야 비로서 진취적 피동성으로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