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3)

나는 Stanley Hauerwas가 했던 이 말을 잊지 못한다.
“죄는 당신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당신의 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당신의 죄는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야기해줄때에만 가능합니다.”

앞 글에서 나는 ‘공동체 됨’과 ‘죄와 싸움’이 대단히 연관이 깊다는 것을 얼핏 언급했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기독교) 공동체가 공동체답지 못하게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죄에 대한 문제를 가볍게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죄로부터 우리가 해방된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깊이 새기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정말 그렇게 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면,
그리고 그 죄와 싸우고 싶은 열망이 깊어지게되면,
다른 사람이 나의 죄를 지적해 주는 것을 감사할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한,
죄가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모두 그 죄의 문제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진지한 사랑의 마음으로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을 두렵지만 단호하게 할 수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다루어내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pseduo-community이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2)

어떤 공동체가 스스로를 identify하는 것에는 두 종류의 description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 공동체는 이러이러한 공동체이다’ 라는 positive description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 공동체는 이러이러한 공동체가 아니다’ 라는 negative description이다.

positive description은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하게 해놓지 않으면 많은 왜곡이 생길 수 있고, 무엇이 일차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가 하는 것을 define하게 된다.

반면
negative description은 모든 경우에 다 필요하거나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그 공동체의 지향을 더 명확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적절한 negative description이 없을 경우 그 공동체는 방향성을 잡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negative description을 너무 남발하면 그 공동체의 입지 자체를 너무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흔히 ‘대안 공동체’라고 이야기를 할때 ‘대안 (alternative)’라는 말은,
negative description을 함의한다.

status quo에 대한 대안,
시대정신에 대한 대안,
세속에 대한 대안 등등은… 각각 status quo, 시대정신, 세속의 어떤 측면을 반대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negative description은 공격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기 쉽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해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의 지향을 명확하게 한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1)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믿고 있는 것, 그 공동체가 따르고 있는 것등을 반복해서 공유해야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더더욱 그렇다.

공동체 리더가 흔히 빠지는 착각 가운데 하나는,
내가 이러이러한 것은 벌써 공동체에게 이야기했으니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라는 식의 생각이다.

공동체에서는 매우 자주,
아주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에대해 over-communication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라면,
십자가, 하나님 나라, 구원, 죄 등등에 대한 것을 아주 많이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리더(설교자, 목회자를 포함한)들이 몇번 설명한것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이 중요한 것들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그래서 그것이 충분히 반복되어서,
그 기본적인 스피릿과 연관된 공동체만의 스토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한다.
일단 그렇게 공동체만의 스토리가 기본적인 스피릿과 연관되어서 만들어지고 나면, 그건 많은 공동체가 다다르지 못하는 한단계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복, over-communication은 정말 중요하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0)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복음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전달되는데에, 인격적 만남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 ‘인격적 만남’은 강의, 글, 설교 등으로 이루어질 때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정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에서 이루어진다.

복음이 사람의 인격에 얹어졌을때 전파력이 좋은 이유는,
흔히 ‘교리’로 이해하는 복음의 내용이 사람의 인격에 얹어졌을때,
‘스토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스토리가 되면,
마치 운율에 얹혀진 시, 즉 노래가사가 외우기 쉽듯이…

교리가 아닌 스토리로 풀어진 복음은 훨씬 더 종합적이고, 이해하기도 쉽다.

나는 공동체에서 이 일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끊임없이 꿈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음이라는 노랫말이,
너와 나 라는 사람의 삶 속에서 운율 위에 얹어질때,
그것은 머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contents가 된다고나 할까.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9)

개인의 영적 성숙을 공동체에 떠넘기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매우 활동적인 개인 영적 성숙이 일어나고 있다고 가정할때,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공동체이다.

어떤 사람이 새로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복음 안에서 성숙해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보다 조금 더 영적 성숙의 여정에서 앞서 있는 사람과의 인격적인 대화는 대단히 powerful한 효과가 있다.

몇년동안 책을 읽고,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하면서 얻어져야 할 것이,
어떤 사람과의 진솔한 한번의 대화를 통해서 얻어질수도 있다.

만일 어떤 공동체에 다양한 분야의 성숙함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공동체에 속해서 그 많은 자양분을 받으며 자라는 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에 자신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는 어떻게든 많고도 깊은 대화를 통해 뽕을 뽑아야 한다. ^^
그 사람이 귀찮아 할꺼야, 그 사람이 바쁘니까… 그럴게 아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자신이 어떤 면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영적성숙을 도울 수 있는 면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라고 자신의 시간을 다른사람을 위해서 써야 한다.
그게 그 사람에게 그 자리에서 맡겨진 소명이다.

바람직하기로는,
한 공동체 안에 가능하면 다양한 분야의 성숙함이 공존하는 것이 더 좋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8)

서로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는 정말 대단히 powerful하다.
죄를 고백하기 때문에 가식적인 피상성이 자리하기 어려워진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죄에 대한 민감성이 커지는 것이 중요한 판단기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예전에는 죄로 여기지 않던 것들 까지도 신앙의 성숙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뼈아픈 죄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와 싸울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참된 공동체를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고백하자… 라고 했을때… 누가 그냥 정말 showcase로 죄를 고백하는 show를 한다고 해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흔히 서로 죄를 고백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한 리더가 쉽게 범하는 실수이다.
내가 이렇게 죄를 고백하면 뭔가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했다간… 그냥 썰~렁~한 독백으로 끝나고 만다.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일은 성령께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이 공동체를 움직이실때 이루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7)

나는 현대 교회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nice함’ 이라고 생각한다.
공감, 이해, 예의, 친절함 등등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서로에게 매우 nice 하다.
이건 소위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더 심하다.

그런데 서로 nice하게 대하기 때문에,
정말 꼭 해줘야하는 이야기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복해서 잘 못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거 아니라고 이야기해줘야 하는데… 그게 nice한 문화에서는 잘 안된다.

나는 이렇게 ‘nice함’이 교회 내에 넘쳐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죄’를 가볍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어떤 사람이 하나님보다 커리어를, 돈을, 성공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매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정말 심각하면서도 대단히 위험한 세계관과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자신을 계속 찌르면서 자해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얼굴을 주먹을 날리는 한이 있어도 그 습관을 그치도록 해야하지 않는가.

돈을, 섹스를, 권력을,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그런 마음이 없단 말인가.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6)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뽑으라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본 회퍼가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확한 quotation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누가 좀 찾아서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반복해서 복음을 들어야한다.

공동체가 해야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반복해서 복음을 들려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 그 기본적인 복음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싶은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한 실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그 복음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며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remind 해야하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흔히 공동체라고 하면,
어려운 일을 도와주고, 힘들때 말 동무가 되어주고, 바쁜 일이 있을때 서로의 빈 구석을 채워주고… 등등을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어려운 일을 도와주고, 자신의 속 얘기를 하고, 충고를 해주고, 경제적으로 서로 돕고… 등등이 참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귀에 복음을 들려주는 일의 subset이 되어야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복음이란 총체적인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좋은 일’들이 복음이라는 umbrella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을때 공동체는 pseudo-community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5)

나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물론 생각한다.
그런데 때로는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어떤 이들은,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공동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각 개인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들이 힘이 드니까 좋은 공동체를 만나서 자신의 burden을 공동체에 지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흔히 대학생 선교단체나 친밀한 교회 대학-청년부를 경험한 사람들중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듣는다.
“예전에는 신앙이 좋았는데, 그 공동체를 떠나고 나서는 기본적인 경건생활도 잘 못하고 있다”

나는 건강한 공동체를 통해서 좋은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 ‘좋은’ 공동체 안에 있으면 자신의 신앙이 건강하게 자랄 필요를 잃어버리게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정말 자신의 신앙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쉽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에서 다 하는대로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토론하고, 헌신하고, 고민하고… 했는데,
막상 그 모든 것은 ‘공동체’가 했던 것이지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한적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그렇게 자신이 스스로 서지 않아도 되는 또 다른 공동체를 찾아다닌다.

공동체를, 개인 신앙에 있어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그렇게 안주해서는 안될 일이다.

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4)

아마 Wheaton college의 교수 중 한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서 읽었는지, 들었는지 완전 기억 안남 -.-;)
부흥(Revival)에 대해서 연구했던 분의 분석이었다.

19세기 이후 일어났던 부흥들을 살펴보면 대학교 캠퍼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경우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보면 대학교 캠퍼스가 일반적으로 tight-knit community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친밀한 공동체와 부흥과의 관계가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매우 흥미롭게 생각했다.

몇가지 생각.

1. 친밀한 공동체가 부흥의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이라는 뜻은 물론 아닐 것이다.
2. 그러나 친밀한 공동체가 부흥을 만들어내는 매우 유리한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 이 사람이 진짜 복음을 접해서 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 확~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변화는 웬만하면 외부의 어떤 자극으로 쉽게 꺼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친밀한 공동체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그런 선한 변화가 옆으로 쉽게 전염(?)되고,
때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 증폭되어서 더 강력한 형태로 변화가 나타내게되는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