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우리에게 목표를 설정하게 해 주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define 해주는가?
몇년전,
코스타 간사 수양회에서 설교했을때, 이런 비유를 쓴 적이 있었다.
축구를 잘 하려면, 어느 방향으로 공을 차야하는지 하는 것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공을 잘 다루고, 그곳에 다다르기 위한 적절한 작전과 기술을 잘 체득하기도 해야한다.
때로,
어떤 보수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나치게 개인화해서, 공을 잘 다루는 것만 치중한 채, 엉뚱한 방향으로 공을 차곤 하고,
어떤 진보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나치게 탈개인화해서, 공을 차는 방향만을 이야기한채, 다룰줄 모르는 것 같다.
좀 더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
약자에대한 돌봄을 이야기해보자.
나는 성경이 약자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약한사람을 돌보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이 있으니, 그것을 위해서 돌격 앞으로!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약자를 돌보는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고, 성경공부 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직접 나가서 밥을 퍼주고, 돈을 아껴 사람들을 돕고, 국제 구호활동을 지원하고…
우리의 목적을 행해 돌격 앞으로!
이것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취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나는 복음이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것을 이루어나가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악을 이기시고 세상의 왕이 되신 방법이 무엇이었던가?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처형당하신 것이었다.
바울이 자랑하고자 했던 것은 그래서 십자가였다.
사람들에게 윽박지르고, 압력을 행사하고, 데모를 조직하고, 빨간띠를 두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의해 핍박을 당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나는,
적어도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와 진보적 복음주의자를 모두 포함해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것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이야기를 좀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동성애 반대 캠페인을 한다면, 그 전체가 모두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렇지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비꼼과 비웃음과 지식을 자랑하는 자세로 한다면, 그 전체가 모두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20여년전, 홍정길 목사님께서 설교중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으며 깊이 찔렸던 기억이 난다.)
기독교의 승리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핏대를 올려 승리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취한다.
기독교 승리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안은 사랑이다.
복음의 방법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이다.
사랑으로서 진리를 이야기해야한다.
사랑없이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리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는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사랑이 없다면 진리를 이야기하지 말아야한다.
결국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함께 파생되어 나오는 겸손, 섬김, 기쁨, 온유함, 희생 등등이다.
나는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missional함을 잃어버린 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