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가 치료제는 아니다?

진통제는 통증을 약화시키는 것이지 그 병의 근원을 고치는 약이 아니다.

진통제는 그렇지만 병을 고치는 과정을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때로는 별도의 약을 먹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이 회복을 하는 과정에서 진통제가 통증을 줄여 주기도 한다. 이럴 때는 진통제 이외에 다른 약을 먹지 않으므로 진통제가 유일하게 복용하는 약이 된다.

혹은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너무 강해서, 통증을 줄여주고자 진통제를 쓸 수도 있으려나…

그렇지만 여전히 진통제는 치료제가 아니다.

깨어진 피조세계에 사는 인간은 모두,

병든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그 영혼의 병이 더 심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깨어진 인간은 영혼의 병 혹은 flaw를 가지고 있다.

이런 영혼의 질병에는 여러종류가 있다.

유난히 자의식이 강하다거나, 성취욕구가 강하다거나, 자존감이 낮다거나, 교만하다거나, 참을성이 없다거나, compassion이 부족하다거나, 깊이 사색할줄 모른다거나…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그 영혼의 질병을 다루어내시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잘 견디어 내도록 우리에게 일종의 진통제를 허락해주시기도 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성숙의 고통’문제를 다룰때,

너무 자주 ‘진통제’에 머문다.

하나님과 대면하며 다루어야 하는 이슈는 때로,

매우 고통스럽고, 자신의 성향과 충돌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자신이 편한, 자신을 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다루어내는, 진통제에 만족하면서,

본질을 마주하기 꺼리기 쉽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을 편하게 만드는 것, 혹은 문제를 대하는 긴장을 풀어주는 것등은…

치료제라기 보다는 진통제인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이것들은 치료를 돕는 탁월한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인 치료는, 하나님과의 encounter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가끔은,

진통제를 복용해서 통증이 완화되면 그것이 치료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영혼의 질병을 다룸에도 비슷한 우를 범할 수 있는 것 같다.

좀 너무 편협한 생각일까…

실패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고? 성공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즉, 

한편 실패하면 그것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할 것과 같은 걱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재기 불능 뭐 그런 생각.

물론,

많은 경우 그런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다. 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많이 깨어져 있긴 하지만, second chance 자체가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세상은 아니다.

그런데…

성공은 어떠한가? 그것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는 아닐까?

가령…

어떤 사람이 대단히 뛰어난 연구 업적은 남겨서 노벨상을 받았다고 하자.

학자로서는 대단한 성공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로부터 평생 빠져나올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하나님께서는 ‘loser’의 상태에서만 경험하는 독특한 은혜를 ‘loser’들에게 제공해주시는 분이시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이런 약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지도 경험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성공을 하고 나면…

적어도 약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이제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성공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

혹은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독사과를 한입 베어무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참 무서운 일이다…

하나의 씨앗교회

지난 토요일,

하나의 씨앗교회가 교회설명회(?)를 갖었다.

아… 참… 이렇게 교회가 시작하는 수도 있구나… 싶도록 참 예쁜 모습이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잘 인도해 주시길...


전체 full presentation은, 

마치 신학강의를 듣는 것과 같은 깊이가 있었는데,

delivery는 아주 산뜻하고 friendly 했다.

정말 ‘공감’이 잘 되는 전달이었다.

http://hanaseed.org 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래는… 이 설명회에 초청하는 이메일

어쩌면, 초청 이메일도 이렇게 예쁘게 (마음도, 생각도, 문구도, 디자인도) 만들었는지…

실패한 실험

지난 고난주간 동안에는,

늘 해오던 방식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방식을 하지 않고,

복음의 어떤 ‘개념’들을 하루종일 깊이 묵상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내 실험은 ‘실패’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여러가지 분석과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지만,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내가 어떤 개념을,

외부로부터의 어떤 ‘입력’ 없기 혼자서 열심히 묵상 해서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던 것 같다.

EXTRA NOS

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무엇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내 안에서 반복되는 생각의 loop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은혜’가 내 안으로 invade해서 들어와야 하는 것을…

블로그를 잠정적으로 닫습니다.

최근,

다소 좀 무리가 되는 중에,

계속해서 수준이 떨어지는 글들을 써오느라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제게 개인적으로 유익이 있어 그래도 그냥 계속 이 글쓰기를 계속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그냥 제 개인적인 부족한 생각을 끄적거려왔습니다만…

우선,

글쓰기를 계속할 시간적 여유를 찾는 것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고요,

둘째,

제 부족한 생각을 이런식으로 나누는 것이 좀 부끄럽다는 생각을 최근 더 많이 하게 되었고,

세째,

제 생각을 자꾸 내뱉지 말고 좀 제 마음 속에 더 머물도록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글을 쓰기는 하겠습니다만,

글들을 비공개로 설정해 놓아, 그냥 저 개인의 일기 형식으로만 계속 써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서,

오늘을 시작으로 잠정적으로 이 블로그 문을 닫고자 합니다.

2008년 봄부터 거의 매일 글쓰기를 시작한 것을 그만두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알게된 분들, 또 이 블로그를 통해 제게 생각과 마음과 사랑을 나누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목수의 졸개 올립니다.

소망

나는

절대적 절망의 상태에서, 깊은 갈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것을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은혜와 사랑으로 그런 나를 일방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어주셨다.

절망도, 갈망도, 은혜도, 사랑도… 도무지 내가 머리로 다 이해해 낼 수 없을 만큼 깊은 것들이지만,

이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 역시…

논리로만 설명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무덤 문이 단단히 닫혀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그 안에 있다고 사람들이 여기던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어둠을 깨뜨리시고 궁극적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들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부활의 기븜을 마음에 담으면서,

나는 오늘과 내일 ‘소망’에 더 깊이 머물러 있고 싶다.

나로부터 나오는 싸구려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나로부터 소망이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참된 소망에 머무르고 싶다.

부활절을 넘어서도,

그 부활과 소망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예 그분과 하나가 되어서…

그렇게 살고 싶다.

소망…

사랑

그분을 십자가에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은 대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도살장의 양과 같이 그렇게 처절하게 처형당하신 성금요일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시는 그 순간,

주님께서 마음에 품으셨던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랑’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몸과 영혼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주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것을 버티어 내셨을 것이다.

조건이 없는 사랑 이라는 개념은,

세상 에서 찾아볼 수도, 경험해 볼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그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기란 대단히 어렵다.

오늘 하루,

나는 주님의 처절한 고통속에 담겨져 있던…

그 피묻은 사랑을 마음에 더 깊이 담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안에 더 머물러 있고자 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잠시 좀 제껴두고,

그저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하는 것에 overwhelm 되어보고 싶다.

은혜

은혜란,

정말 말로 안되는 개념이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러면 안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백지화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억지라도 여겨질수도 있다.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은혜가 아니라면, 

은혜가 아니라면…

도우지 해결할 방법이 없었는데…

도무지 도무지 해결될 방법이 없는 절망의 상태였었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은혜로 모든 것을 뒤집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우리 쪽에서의 반응 조차도 trivialize 시킨다.

은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엎드려 울며 그 은혜에 잠기는 것 뿐이다.

은혜에 걸맞게 살거나,

은혜를 갚거나,

심지어는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것 조차도… 불가능하다.

오늘 하루는,

정말 특히 그 은혜에 깊이 immerse되어 있고 싶다.

도무지 헤아릴수도 감당할수도 없는 그 은혜에,

내 온 존재를 던져놓아 머무르고 싶다.

갈망

비극적일만큼 절망적인 상태의 인간에게도,

그 존재의 깊은 곳에서 부터 나오는 ‘갈망’이 있기 마련이다.

복음을 알기 전에도,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 어떤 소망, 어떤 그 무엇을 향한 깊은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고,

복음을 알고 난 후에도,

그 신비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끊임 없는 갈망이 있다.

내가 복음을 알기 전,

내 내면 속 깊은 곳에서 외쳐나오던 그 ‘갈망’을 깊이 오늘 하루 마음에 담고자 한다.

내 갈망은 무엇이었던가,

그 갈망을 어떻게 채우려는 헛된 노력을 했던가,

지금… 내 갈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주님을, 주님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그 상태에 오래 머물러 보고 싶다.

절망

“하나님 없는 인간은, 절대 절망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는 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상태이다.


아직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이 절망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을 깨닫기 난 이후에는,

복음을 알기 전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이었는지 망각하기 십상이다.

오늘 하루는,

내 상태가 하나님 없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가 하는 것에 깊이 immerse 되어보고자 한다.

아직 복음을 알기 전에,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였던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끊임 없이 반복되는 죄를 돌이켜보며… 지금도 나는 하나님 없이 얼마나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상태인가…

복음의 신비는,

절망의 깊이를 제대로 perceive할때에야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