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코스타 이야기 (1)

내가 KOSTA 라는 것을 처음 들은 것은 91년.
당시 한국의 대덕 연구단지에서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대덕 연구단지의 특성상,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분들로 부터 KOSTA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송인규, 서재석, 방선기 같은 분들이 편집위원이었던 계간지 “그리스도인과 학업” 이라는 잡지도 참 흥미롭게 보았다.

92년엔가…
그 당시 ‘복음과 상황’이라는 잡지에 KOSTA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오죽해야 그 기사를 몇부 copy해서 몇사람들에는 나누어주기도 했고… 나 자신도 잘 간직했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그 KOSTA를 섬기게 될 줄이야…

(이번 한주 동안, 내가 경험한 KOSTA 이야기를 5번에 나누어 써보려고 한다.)

What Mothers Do

Tony Campolo의 부인이 전업주부로서 아이 둘을 기르고 있을때, 어떤 사람이 ‘당신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라고 물으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I am socializing two Homo sapiens into the dominant values of the
Judeo-Christian tradition in order that they might be instruments for
the transformation of the social order into the kind of
eschatological utopia that God willed
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

“나는 두명의 호모 사피엔스를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핵심 가치로 사회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이 사회를, 하나님께서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의지를 가지고 계셨던 종말론적 유토피아로 변화시는, 사회 질서 개혁의 도구가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곤, 그 Tony Campolo의 아내는 바로 이렇게 묻곤 했다.
“그런데, 당신은 뭐 하는 분이신가요?”

— 얼마나 멋진 대답인가!!!

허둥지둥 바쁘게 사는 것 vs. 부지런하게 사는 것

내가 쫓겨서 살고 있는것과 (being hurried)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것은 종이 한장 차이같이 느껴질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차이는 때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적용하는 기준은,

내 아내로부터의 전화를 반갑게 받느냐, 그 전화를 급한 마음에 받고 건성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쁠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전화를 반갑게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하게 바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전화 조차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 쫓겨서 허둥지둥 바쁘게 사는 것이 아닐까.

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2004년 7월에 다음의 글을 쓴것을 발견했다.
그러부터 4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의 상황도, 나 개인적인 깨달음과 성숙도 전혀 발전된 것이 없어 보인다.
가슴이 아프다…

=====

나는 미국에 20세기에 왔고, 지금은 21세기 이니… 두 세기에 걸친 미국 생활 동안 한국이 많이 변한것은 틀림없으렷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한 과장의 말인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이태백’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참 꿈을 꾸며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할 나이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사도행전에 나온 것 같이 ‘은과 금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선뜻 이것에 대한 대답을 섯불리 열거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예수 믿고 (현세적, 물질적) 복 받아라’

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실제 그러한 현세적 복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로 사탕발림을 하려 한다면 복음은 정말 천박한 원색의 룸살롱 광고 찌라시 정도 이상의 attention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열심히 살아서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말을 돌려서 해서 그렇지, 사실 이건 ‘성공해라’ 라는 말이다. 이들이 성공이 싫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일까. 성공을 억지로 피해서 이태백이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복음적인 말에 이들이 거짓 위로라도 받을 것을 기대해 볼수 있으련만.

3.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실 나라도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풀어주실 테니.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앞에 두고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

어설픈 좌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이태백들 가운데 다수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들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며…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들만 이야기 해왔지 않았는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야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고지를 점령하자고.

그런데 우리가 이들 이태백들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이 세상을 바라보는 frame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 뒤,
텅텅빈 한국의 어느 예배당에서 나와 내 아내가 예배를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태백들의 박탈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줄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싶다.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기

아주 특별한 예외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을 그 사람의 참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관점에서보면 이것은 그 사람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이기도 하다.

궁지에 몰려있는 사람의 그러한 약하고 부족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일이다.

어떤 이는,
일시적으로 그러한 궁지에 몰리는 일을 겪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일생을 통해 계속해서 그런 상황에 몰려서 살게되기도 한다.

사람을 바라보며,
사람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최근… 내가 어떤 사람을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고… 그 사람으로부터의 공격적 (정확하게는 방어적 defensive) 반응에 처음엔 기분이 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원인이 내게 있는 것 같아서…)

엄살은 이제 그만…

최근,
블로그에서 바쁘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보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했나?

만나는 사람마다 나보고 바쁜데 괜찮냐고 묻는다.

사실… 최근 한 두어주…  상당히 안바쁘다.
회사일도… sample이 없어서 실험이 꽤 한가한 편이고,
코스타일도… 생각보다 괜찮고…

오히려 나름대로 시간이 꽤 괜찮은데…

진짜 엄살을 너무 많이 떨고 살았나보다… ^^

People to Love, People to Work with

내 심각한 인격적(?) 결함 하나.

나는 사람과 사귀어 가면서…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을,
내가 사랑할 사람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나와 함께 일할 사람으로 인식하는 듯 하다.

그래서 오히려 약간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더 마음을 쓰고 care 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막상 가장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쉽게 neglect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이러한 결함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물론 내 가족이다. 특히 내 아내.

내가 좀 더 성숙해 가면서…
내게 가까운 사람을… 내가 사랑할 사람으로 더 깊이 인식하는 전환이 더 많이 일어나길

내 동생

나와는 1년 3개월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있다.

엄청

똑똑하고, 능력있고, 예쁘고… ^^ (키가 좀 작고, 잠을 좀 많이 자긴 하지만…)

어린(?) 나이에 서울의대 교수이고…

지난 1년동안 미국에 교환교수로 있다가 최근 한국으로 다시 귀국했는데
여기 있는 1년동안 마음을 많이 쓰지 못한 것이 참 마음에 걸린다.

나는 중학교 졸업이후 집을 떠나와서 내 동생과는 지난 25년동안 한집에서 살지 못한 셈인데…
지난 1년이 어쩌면 내가 더 내 동생에게 많이 마음을 쓸 수 있는 기회였을 텐데.

오늘은,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동생의 생일이다.

올해는 유난히 동생의 생일이 내게 기쁘다.
하나님께서 내 동생이 어렸을때 부터 그 작고 똘망똘망한 어린 여자아이를 보시면서 기뻐하셨을 그 기쁨이… 왠지 더 느껴진다.

지난 세월 내 동생을 붙들고 계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더 tangible 하게 느껴진다.

Balance

가끔…
삶과 신앙에 균형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지나치게 신앙과 삶의 어떤 면을 강조한다던지,
심지어는 자신의 강조점과 다른 면들을 정죄한다던지… 하는 사람들.

신앙 성숙의 여정에서 좌충우돌 하며 균형을 잃어버린 모습을 잠시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수 있겠으나,
균형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1-2년, 혹은 수십년, 혹은 평생을 지내는 모습은 곁에서 보기에 매우 안타깝다.

어떤 이들은 그런 불균형의 상태를 지적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자신을 잘 추스리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마음이 굳어져서 더 균형을 잃어가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곁에서 어떤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지켜보면서 격려하여 건강한 성숙에 이르게 하는 것이 좋은 것 같고,
후자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충고, 꾸짖음, 조언등을 통해 바로 잡아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불균형에 빠져 있을 때… 그 사람이 전자의 case에 해당하는지 후자의 case에 해당하는지 하는 것이 언제나 obvious하게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불균형의 모습을 가진채 살아가고 있을때,
그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살아있는 운동 조직과 죽어 있는 운동 조직

죽어있는 운동/조직에서는
“이거 해도 되나요?” 라고 묻는다.
살아있는 운동/조직에서는
“이거 합시다” 라고 이야기한다.

죽어있는 운동/조직에서는
“이거 해 주세요” 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운동/조직에서는
“이거 이렇게 제가 한번 해 볼까요?” 라고 이야기한다.

죽어있는 운동/조직에서는
“이거 하면 안됩니다” 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운동/조직에서는
“이거 하면 좋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한다.

죽어있는 운동/조직에서는
“이거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니 하지 맙시다” 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운동/조직에서는
“이거 우리가 해야할 일이므로 합시다” 라고 이야기한다.

최근,
코스타를 생각하며… 여러 생각들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