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크스

내가 어릴때, 한국은 스포츠 강국이 아니었다. ^^
70년대 후반에 되어서야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 금메달을 하나 딸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때까지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하나도 없었다. (일제시대에 손기정 선수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어릴때 흑백 TV를 보면서 축구나 한일전 같은걸 보면서 열심히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 컬러 TV를 들여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로 기억하는데, 한일전 야구 무슨 결승전 같은걸 했었다.
그때 김재박이 신기한 번트를 하고 한대화가 3점 홈런을 쳐서 극적으로 이겼던 경기였다.
나는 스포츠에 빠삭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한번씩 중요한 경기를 보면서 ‘우리팀’을 응원했었다.

그런데,
내가 어릴땐 이상한 징크스 같은게 있었다.
내가 보기만 하면 우리편이 지는거다.
그러다가 내가 안보면 우리편이 좀 더 잘하고.
(아마 그런 비슷한 경험 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ㅎㅎ 이게 통계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그냥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므로)
그래서 중요한 권투경기가 있다거나 할때 나는 일부러 그 중계방송을 보지 않을때도 있었다.

오늘 밤, 이곳 시간으로 4am 에 출구조사가 발표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일찌감치 잠을 청할 예정이다.
출구조사가 발표되기 전까지 나는 뉴스를 기웃거리거나 그런 짓을 하지 않으려 한다. ㅋㅋ

천재의 두가지 유형

학교 다닐때,
교수님들중 ‘천재’로 소문난 분들이 좀 계셨다.

그렇게 천재로 소문한 교수님들은 대개 두가지 부류 가운데 하나였다.

첫번째 부류는, 자신의 수준에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속 터져하는 교수님들이었다.
이런 교수님들에게 걸리면 죽음이다.
완전 주눅들고, 들들 볶임을 당하고, 자존감 땅에 떨어지고, 일은 죽어라고 하고…

두번째 부류는, 자신의 수준에 따라오지 못할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매사에 무지하게 너그러운 교수님들이었다.
이런 교수님들에게 걸리면, 대박이다.
뛰어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 천재로부터 배우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좀 덜 뛰어난 학생들도 그 너그러움 속에서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땐 정말 두번째 부류의 교수님이 정말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러나… 아주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떨어지는 사람도 아니라면…
첫번째 부류의 교수님으로부터 더 뭔가를 배울 수 있게 될 가능성도 높고, 그래서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는게 아닐까 싶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지만,
가끔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누군가를 이끌고 지도하고 키워야할 때 이 생각을 많이 한다. 직장에서건, 기타 다른 세팅에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 혹은 내가 뭘해도 안되겠다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마냥 너그럽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내 존재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다 싶은 사람들에게는 뭔가 더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노력한다.

물론 내가 이런 과정에서 판단을 잘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
난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거다… 그렇게 위안을 해본다.

정치에 소망을 덜 두기

내가 지지하는 정파가 늘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내 실망을 줄여보고자하는 마음에서… 정치에 소망을 덜 두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지지하는 정파라 반대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내 과도한 기대를 줄여보고자하는 마음에서… 정치에 소망을 덜 두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정치가 정의를 이루는데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정치는 또한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 무엇인지를 잊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독재자가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해 3S (Sex, Screen, Sports) 정책을 썼다면,
혹시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백성들의 관심을 궁극적 소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정치라를 tool을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존 하워드 요더나 스탠리 하우어워스 같은 사람들의 사상을 다시 곱씹어 보려고 노력한다.
잘 안되긴 하지만. ^^

잘하면… 이번에는 내가 찍은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2004년 Red Sox가 World Series를 우승하는 것을 구경하는 기분과 비슷하다.

눈물

나는 국민학교때 전학을 많이 다녔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전주에서 서울로 이사가는 바람에 전학을 했다.
4학년을 마치고 다니던 학교가 너무 커서 분교가 되는 바람에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5학년을 마치고 부모님이 국민학교 졸업 전에 조금 더 좋은 학교 한번 다녀보라고 ‘사립’ 국민학교로 전학을 하면서 또 한번 옮겼다.
그렇게 전학을 할때마다 나는 참 많이 울었었다.

국민학교때 담임 선생님이 나보고 ‘남자가 그렇게 눈물이 많으냐’고 뭐라고 하셨던 기억도 난다. -.-;

대개 내 나이쯤 되면 홀몬에 변화가 생겨서 눈물이 더 많아진다고 하는데,
나는 나이가 들면서 그 많던 눈물이 다 없어진 것 같다.

요즘 내가 눈물을 흘릴때는,
마음을 찢으며 기도할때 뿐이다.

대학때만 하더라도,
가요를 듣다가 울기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를 보고 울고, 좋은 글을 읽다가 울고… 한번은 비오는날 기숙사에서 짝퉁 워크맨에 꽃혀있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울었던 기억도 난다.

때론 눈물이 그립다.
지난 주말에, 우연히 youtube에서 다음의 노래를 들었다.
살짝 눈물이 났다. 반가웠다.

한번도 내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 적이 없다!

내가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수 있었던 것은 92년이었다.
내가 찍은 사람이 안됐다.

그 다음 대통령 선거는 97년 이었다.
내가 지지했던 사람이 되긴 했으나, 나는 미국에서 투표하지 못했다.

2002년, 역시 나는 투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지지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2007년, 미국에서 투표하는게 가능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내가 투표했더라도 그때 대통령 된 사람을 지지했을리는 만무하다.

2012년, 미국에서 자랑스럽게 투표했다.
그러나 내가 찍은 사람은 떨어졌다.

2017년, 지난 주말 투표했다.
살짝 망설였다.
지금까지 내가 찍은 사람이 된 적이 없었는데….
2번을 찍어야 하는 걸까…

토론

지난 토요일,
우리 동네 아는 형 한분이, 이 동네에 있는 한 사람(A 라고 하자)을 좀 만나보라고 소개를 해 주셔서 만나게 되었다.

A는 미국에서 ‘좋은 대학’ 졸업하고 현재 이 동네에서 ‘잘나가는 직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어릴때 교회에 다녔으나 대학때 이후로 교회에 좀 뜸 했고… 지금은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의 중간쯤 되는 입장에 서 있다.
당연히 아주 똑똑한 사람이고,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나름대로 여러가지 고민과 생각과 독서와 research도 해 보았던 것 같아 보였다.
어쨌든 기독교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가지론적 / 무신론적 관점과 좀 제대로 대비시켜보고 싶어했다.

아침 10시반에 만나서 오후 4시 반이 거의 다 될때까지 정말 닥치는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나도 어떤 대화를 기대해야할지 잘 몰랐고, A가 궁금해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무슨 준비를 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 (신약) 성경의 역사성, 역사의 방법론, 과학적 방법론, 보편적 진리 논쟁, 믿음과 논리의 관계 등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변증적(apologetic) 논리와 수사를 열심히 동원해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A는 내가 최근 이렇게 함께 논쟁하고 대화를 나누어본 상대 가운데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좋은 토론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20대이지만 나름대로 참 열심히 이 문제들을 파고 들었던 흔적이 대화 도중에 보였다.
그래서 말도안되는 논리를 접하면서 그 argument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애써 설명해야하는 수고가 거의 필요 없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해서, 이렇게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별로 많이 보지 못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A 만큼만이라도 좀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엉망은 아닐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나는 그냥 어슬렁 어슬렁 나갔다가 A의 진지함에 화들짝 놀란 case라고 할 수 있겠다. ^^
A가 워낙 성실하게 대화에 임하니까, 오히려 내가 후다닥 긴장하면서 내 자세를 바로잡아야 했었다.

6시간 가까운 논쟁과 토론을 거치고 나서도 A는 카톡으로 다시 또 만나서 이야기를 이어가자고 이야기했다.
나도 기꺼이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답했다.

이런 좋은 스파아링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참 좋은 경험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이 대화가
내게도 소중한 성찰과 자람의 기회가 되고,
A에게는 진리에 한발 더 다가가는 기회가 되면 정말 좋겠다.

(한가지 깨달은 것은, 시간이 길어지니까… 내 집중력도 떨어지고 아무래도 힘이 좀 달렸다. 그건 20대와 깊은 대화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맞닥드리는 내 한계이겠지.)

4차 산업혁명, 진짜로? (9)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 직장을 찾는 엔지니어들은, 얼마나 cool한 기술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직장을 선택하기 보다는…
얼마나 그 리더가 뛰어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고 합리적이다.

2. 앞으로 10년 동안… 만일 아주 뛰어난 천재가 어떤 쪽으로 가야 제일 그 뛰어난 재능을 펼치기에 좋겠느냐… 라고 한다면 기술쪽 보다는 경영쪽이 아닐까 싶다. (다만 경영을 하되 기술을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할 듯)

3. 그러나 앞으로 10년 동안… 어느쪽 job이 유망하냐 라고 묻는다면, execution에 강한 엔지니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4. 원청과 하청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불합리한 상황은, 점차로 원청업체의 pool이 넓어져야 해결이 되는 것일텐데…
그런 의미에서 뛰어난 원청업체들을 잘 만들어내는 경영자의 능력이 justice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다.

5. 그러나… 지난 두주 내가 여기 쓴 이 모든 이야기는… 그냥 내가 혼자서 생각해 본 것이므로, 완전 틀릴 가능성 완전 높다. ㅋㅋ

본질, 의미, 변질

본질과 의미가 일치할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가령,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본질이 있다고 하자.
그 본질은 그러나 때에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home base의 의미를 줄수도 있다.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해주는 building block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헌신적 사랑의 예로 활용되어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guiding light의 역할의 의미가 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의미를 잘 모아서 본질을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의미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만들어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사랑의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 사회를 구성하는 building block, 사랑의 헌신, 등등의 내용을 다 설명하고 그것을 모은다고 해도, 원래 본질이 부모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때로, 의미가 변질되는 것은 본질 없이 의미를 추구하다가 그렇게 된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본질이 자녀를 위해 최선의 교육을 제공함 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자.
어느순간 부모의 사랑이라는 본질이 없어진채 자녀를 위해 최선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만 남게되면, 그 자녀를 위한 최선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 자체도 변질되어서 자녀를 들들 볶으며 과외를 시키고 자신의 성공의 대리품으로 자녀를 생각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게 된다.
본질이 없이 의미만 남게되어 그 의미가 변질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신앙에 있어서도 이런 것이 꽤 많다고 생각한다.
부활에 대한 것도 역시 그렇다.
너무 쉽게 부활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 부활이 가지는 적용점… 등등에 뛰어들게되면, 부활이 원래 가지는 본질에 대한 생각이 옅어지게 되고…
현대 사화에서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미 자체도 변질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이런 절기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신앙의 가장 깊은 본질로 돌아가서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다시 세워내는 일을 반복해서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부활절을 지내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 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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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 기독교의 shallow함이 미치도록 역겹다.
그 shallow함 속의 일부가 되어있는 내 자신이 말로 다할 수 없이 부끄럽다.

그게… 그냥 그런거지

참 외롭다.

나는 사실 외로움을 그리 잘 타는 사람이 아니다. 혼자서도 잘 지내고, 오히려 혼자서 여러 생각을 하는 것을 참 많이 즐긴다.
그렇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며 살기위해 무진장 몸부림치고 고민하고 싸우고 생각하고… 그러고 있는데,

이 고민의 package를 이해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이것을 이야기할 사람도 거의 없고,
내 싸움을 이해하고 격려하거나 조언하거나 바로 잡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느낄때가 많다.

함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쟤는 별나다’라는 눈짓을 받을땐 정말 더 많이 외롭다. (사실은 서럽기까지 하다. ㅎㅎ)

몇 달전에 한국에 출장을 갔을때,
토요일 저녁에 한 ‘선배님’을 찾아간적이 있었다. 그분은 목사님이시지만 목사님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선배님으로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설교 바로 전날 저녁인데도 나를 맞아주셨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 이런 외로움이 대해서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분께 여쭈어 보았다. 목사님은 외롭지 않으시냐고.

그분은 무슨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늘 그냥 크게 도움 안되는 대답을 주시곤 하는데,
그날은 꽤 단호하면서도 확실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그냥 그런거지”

그 후 계속해서 나는 그 짧은 문장을 계속 곱씹어 보고 있다.
그냥 그런거다…

한편 신앙이 깊어질수록 당연히 외로움이 커지게 되겠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만의 신앙의 틀이 고정되어 가면서 다른 신앙의 틀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것을 외로움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냥 그런거다… 라는 그 선배님의 말씀에는, 그 두가지가 다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