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avorite Preacher

어제는 교회에서 정우형제가 또 설교를 했다.
One of my favorite preachers. 🙂

초반에는 주로 N T Wright의 신학을 가지고 골로새서 1장의 본문 일부를 풀어주었고,
후반에는 주로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점을 자신을 열어 보여주면서 이야기해 주었다.

우선,
힘들게 직장생활하면서, (그것도 부부가 다 많이 바쁜)
그 와중에 아이 둘을 키우면서,
교회에서 여러가지로 섬기면서….
이런 신학적 지식과 통찰을 가질수 있도록 따로 공부했다는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웬만한 목회자들이나 신학생과 대화를 나누어도,
이 정도로 N T Wright의 신학을 정말 잘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본업이 아닌데 그 신학을 이해한 후에, 그것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해 낼 정도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떤 사람의 신학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도구로 하여 본문을 다르게 ‘fresh’하게 보면 참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많이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신학을 그저 달달 외는 수준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신학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본문해석에 적용할 줄 안다는 의미이다.
마치 수학 공식을 외는것만으로는 그 공식을 적용해서 방정식을 풀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N T Wright만 그런건 당연히 아니지만, 특히 내게는 N T Wright의 신학이 많이 그랬다.

그리고 또한….
정우형제의 신학적 고민에는 자신이 맞닥들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의 고단함이 녹아 있었다.
superficial하거나 그저 지적 유희의 신학적 argument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고민으로부터 그 내용이 나왔다.

그러기에 깊은 절박함과 목마름이 느껴졌고,
부드러운 어투와 음성 뒤에는 처절함이나 비장함도 느껴졌다.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하는 설교가 아니라,
들은 후에 마음을 더 묵직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설교였다.

나는 이렇게 가끔 우리교회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하는 설교가 참 좋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동지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정우형제랑 마주보고 앉아서 신앙 이야기를 나누어본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네. 한 교회에 다니면서도…

커피

나는 커피를 참 좋아한다.

커피를 처음 마시기 시작한건 중학교때였다. 보통 시험기간에 잠을 깨우는 약으로 커피를 마셨다.
인스탄트 커피에 프리마를 넣고 설탕을 넣은 다방커피였다. ^^

고등학교때는 시험기간이 아닐때도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잠을 적게자고 공부하는게 장땡이라고 생각해서 평소에도 4시간 남짓 잘까말까 하면서 살았다.
가끔은 잠깨는 약으로 커피믹스를 들고다니며 먹기도 했었다.

대학교때는 자판기 커피를 정기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루틴이 되진 않았었다.

아침 커피가 루틴이 된건 생각해보면 미국에 와서였다.
아침에 학교 식당에서 간단하게 사먹으면서, 혹은 집에서 토스트를 간단하게 먹으면서 커피를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대학원 다닐땐 완전 커피 중독이 되었었다.
Large coffee를 하루에 3-4잔씩 마셨다.
그러다가 위염에 걸려 고생하기 시작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그래서 가끔 위염 때문에 커피를 끊는 기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40대 중반이 넘어서면서는 몸이 카페인에 많이 민감해졌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 그날 밤에는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다른 여러 증상들 (바로 크고작은(?) 변을 보게 된다거나 하는 ㅋㅋ)도 나타났다.
그래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커피를 즐기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를 가지고 맛을 내는 여러가지 기호식품들도 좋아한다. (커피 음료, 커피 아이스크림, 커피 사탕 등등)

요즘은 가능하면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어쩌다 아침에 커피를 질러버리는 날에는… 그 커피향이 참 반갑고 좋다.

그것을 마음껏 즐길 수 없게 되어서야 비로소 커피를 더 깊이 음미할수 있게 된 듯 하다.

울고, 울고, 또 울고…

웬만하면 이 블로그에서 내 정치적 의견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어제 저녁을 먹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518 기념식을 봤다.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희생자의 가족들의 얼굴이 비추어질때 울었고,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울었고,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울었고,
대통령이 벌겋게 된 눈으로 유가족을 포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었고,
무엇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광주 사람들의 얼굴이 비추어질때 울었다.

그러나 한편,
나는 이 기념식이 ‘적폐세력’에게 크게 한방 먹이는 것이 되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이 기념식이 ‘이념적’이라고 느껴기지 보다는 ‘감성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으냐 하는 논쟁을 하기 보다 눈물과 감동이 있었다는 것이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이 노무현보다 더 똑똑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 집권 세력이 이제는 더 현명해져서 작전을 더 잘 짜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여러가지로 진짜 잘한다.
적폐자유당이 거의 멘붕 올 수준으로 잘한다.
더 이렇게 해야할 일이 많은데… 더 계속 잘 하길…

스승과 코치

대개는 한 주제로 긴 글을 쓸때는 처음부터 아예 시리즈로 쓰곤 하는데,
이번엔 이렇게 쓰게 되었다.
아마도 요즘 깊이있는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하고 살고 있어 생각이 잘 정리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여기에서 쓰고 있는 ‘스승’이라는 terminology를 설명하기 위해서 ‘코치’와 대비시켜서 생각해보자.
코치는 대개 어떤 가치나 인격 등 복합적인 것을 훈련자에게 전달해주고자 하기 보다는 제한된 기술을 습득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물론 코치가 어떤 사람에게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코치의 역할은 아니다.

코치는 많은 경우 훈련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코치가 정해놓은 수준에 도달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제자 자신이 그 한계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나는 코치가 스승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role이 다를뿐.

그러나, 코치가 스스로 스승인체 하거나,
스승이 자신이 코치라고 착각하면 그건 문제다.

교회나 선교단체나 성경공부 모임 등에서…
하고 있는 일은 딱 코치인데, 그것이 스승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리더들, 목회자들을 많이 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스승에 대해서 (어제 글에 이어서)

아니, 세상에 스승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느냐.
그렇게 많은 스승들 가운데서 네 스승을 찾지 못하는건 네 문제이다.
네가 교만한거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듯 하다. ^^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스승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진정한 스승의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스승의 몇가지 중요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그냥 순전히 내 생각이다. ^^

1.진정한 스승은 자기를 바라보도록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따르는 사람을 만들기 보다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유명한 교회의 교인이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것, 유명한 기독교 단체나 모임의 멤버가 그 리더나 창립자를 추종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장로님이, 저 목사님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추종자들이 다 같이 개종하겠다… 싶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

2.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도록 돕는다.
정말 자신의 신념에 헌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제자에 의해서 그 신념이 더 발전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제자가 자신보다 더 뛰어나게 되는 것을 대단히 기뻐한다.
그러므로 스승의 역할은 자신만큼 제자들이 따라오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제자들이 자신을 뛰어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스승이 제자를 tightly control하면 안된다. 그러면 제자가 스승을 넘을 수 없다. 부족하더라도 제자가 실수하도록, 심지어는 망하도록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방식으로 제자들을 키워내면… 제자들 그룹이 조직화 되기 어렵고, 따라서 큰 그룹으로 자라나기 어렵다.
반면, 조직화되고 큰 그룹으로 자라난 모임이나 조직에서는 진정한 스승-제자 관계가 만들어지기 대단히 어렵다.
대형교회, 대형선교단체 등등에서 그 창립자를 뛰어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언뜻 떠오르는 case가 내게는 없다.)

3. 진정한 스승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 제자를 키우는 것 자체가 그 스승에게 보상이다.
그에 따른 어떤 보상 (금전적 보상, 사회적 인정, 사람들의 존경 등등)이 부차적으로 올 수 있으나 그 부차적인 것들을 우선 추구하는 사람들은 스승이 되기 어렵다.

스승의 날에

나는 정말 존경하고 따를만한 스승이 늘 없다고 여겼다.
세상에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은 정말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내 스승이 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학문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사람들도 만났었고,
신앙으로도 참 존경할만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 사람들을 직접 ‘내 스승’이라고 부를만한 관계를 갖은 적이 없었다.

물론,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박사과정을 하면서 그 사람의 name value가 좀 도움이되었을 뿐, 사실상 대부분의 공부와 연구는 혼자서 해야했었다.
아주 뛰어난 책을 쓴 다른 학교의 교수님이라던가, 훌륭한 논문을 쓴 유명한 사람들로부터 좋은 insight를 얻긴 했지만 그분들이 스승은 아니었다.

신앙적으로도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나를 이끌어주신 분들도 있었지만…
저 분이라면 내가 계속 내가 따라야할 모범이라고 여기고 갈 수 있겠다… 싶은 분이 없었다.
어떤 한 분과 관계를 맺고 그분으로부터 좀 배우고 나면… 아… 이분으로부터는 여기까지 배울 수 있겠구나 싶어 관계가 좀 달라지게되는 경험만 많이 했었다.

20대에 그래서 정말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배울 스승, 선배를 간절히 찾았다.
정말 간절히 찾았다.
주위에서 그렇게 찾을 수 없어 나는 책을 통해서 현재와 과거의 스승들을 찾아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러부터 많이 도움을 얻었다.
그렇지만… 정말 스승은 아니었다. 인격적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나이 들어서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도움이되는 스승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꼭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저 내 삶과 생각 자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는…
평생을 살면서 최소한 나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사람으로 나를 딛고 가는 사람 5사람만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소망을 가졌었다.

이제 40대 후반이 되어서,
나는 이제 그 소망을 사실상 버렸다.

나로부터 누군가가 그렇게 배울만한 사람일까 하는 것이 자신이 없기도 하거니와,
설사 조금 나로부터 배울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관심을 갖는 사람도 별로 없다. ^^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삶과 생각의 궤적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수만 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다.
비록 나는 그런 스승이 될만한 자격이 되지 못하지만,
세상 어디에선가는 정말 건강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내가 그 모습을 실제로 보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만이라도 좀 들어볼 수 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한때 스승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한때 스승이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했던 사람으로서,
정말 어디엔가 있을 참된 스승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응원한다.

가치와 관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정말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가치일까 관계일까.
사람을 헌신하게하는 것이 가치일까 관계일까.

가치를 충분히 자기것으로 하지 못한 사람은,
어설픈 관계로 가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또한,
관계를 무시한채 가치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관계가 자주 가치를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여 실패한다.

노무현이라는 상고 출신의 정치인은,
지금까지 그를 따르는 많은 추총자를 낳았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계승하겠다는 유력한 정치후계자들을 만들었다.

문재인이나 안희정을 움직였던 것은 가치였을까, 관계였을까.

헌신

며칠전 유시민이 한 인터넷 방송에 나와서 한 이야기가 마음에 참 와 닿았다.

개요는 이렇다.

노무현 정부 초기의 위기는 진보진영의 공격으로 인해서 왔었다.
동시에 여러 진보진영의 언론과 단체들이 노무현 정부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래서 집권 6개월 안에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노무현 정권때 참 많이 아쉬웠던 것은 ‘내편’이 되어주는 지식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권이 바뀌면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 그렇게 새 정권을 돕고 싶다.

이 내용은 김어준이 유시민에게 ‘총리’ 생각이 있느냐 이런 류의 질문을 하는 context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유시민의 이 이야기가 참 감동적이었다.
유시민과 정치적 견해를 함께 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유시민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출세/영달 보다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바로 세워지는 것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총리가 되거나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꼭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

…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헌신’했다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명분하에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다.

자기의 밥그릇을 챙기고 싶은데, 이왕이면 더 뽀대나게 하나님나라 라는 명분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일을 이루지 못해도 좋으니,
내가 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도 좋으니,
내가 그 속에서 심지어는 망가져도 좋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자유주의 (liberalism)의 가치에 헌신한 유시민의 헌신이 부럽다.

솔직히 말하면… 나 울었다.

여기 시간으로 9일 새벽 2시 반쯤에 일어나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인터넷을 뒤져가며 들었다.
여러 글들과 주장들을 인터넷에서 읽었다.
4시에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나는 울었다.
문재인의 광화문 연설을 들으면서 또 울었다.

솔직히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 부패와 독재와 수구의 세력이 정권을 잡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후퇴시키고 marginalized되어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정권을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절망, 그리고 나중에는 냉소에 빠져 있었다.

문재인이 광화문에서 대통령 당선이 거의 확정되고서 만난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이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울었다.
그 세월호 아이들이 살아있었다면 이번에 첫번째로 투표할 수 있는 선거였을 게다.

불과 몇달전만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모습의 대통령과 청와대의 모습을 뉴스로 보면서 참 많이 설레었다.
하루만에 나라가 바뀐 느낌.

하지만,
새로운 정권에 과도한 기대와 희망을 걸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중이다.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에는 여전히 한계가 많이 있다는 것을 자꾸만 되새기려고 노력중이다.

하지만,
하루쯤은 그렇게 울어도 되지 않겠나.

이해가 되지 않는….

두주 전,
잘 아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사람은 홍준표를 지지한다고 했다.
나는 그러냐고 부드럽게 대화를 넘겼지만, 정말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좀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정책과 사람을 지지하는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준표가 20%가 훨씬 넘는 득표율로 2위를 하는 것을 보고,
게다가 대구경북, 경남 지역에서 심지어 1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게다가 경북은 과반! -.-;)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싶었다.

지난 봄에 한국에 출장을 갔을때,
구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났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이가 좀 든 임원은 여전히 새누리당-박근혜가 상대쪽보다 더 좋다는 입장이었고 그 아래 있는 젊은 부하직원은 아무리 그래도 박근혜나 새누리당을 이 마당에 지지할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에서 그 좁은 지역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게 어떻게 가능할까…
광주와 같이 어떤 정치적 피해자가 되었던 기억이 있는 지역도 아니고…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미국도 트럼프를 당선시킨 나라가 아니던가.
영국도 Brexit을 통과시킨 나라가 아니던가.
다행히 프랑스는 좀 이성적인 선택을 했지만…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커다란 논리적 비약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논리적 비약은 흔히 분노나 두려움과 같은 것으로 부터 비롯된다.

나는 새로운 대통령이,
적폐세력을 강력하게 청산하고, 언론개혁, 검찰개혁, 정부조직 개혁, 재벌개혁, 개헌 등을 통해서 정상적이고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쪽으로 노력하길 바라지만,
반면 그런 비상식적 행동을 할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무엇이 두려운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어떻게든 정상적인 사회적 대화가 좀 열리는 시대가 되면 참 좋겠다.

어쨌든 내가 지지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