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된 백성

지난번 덴버 모임 이후,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개념을 참 많이 생각하고 있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는 백성.

Resident Alien

사실, 나 자신이 이민법상으로 resident alien (영주권자)이기도 하거니와,

지난 거의 20년가까이 내 온 생각을 빼았았던 다양한 종류의 기독교적 세계관(Christian worldviews)들을 지금의 context 속에서 통합 적용하는데 이 개념이 매우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세속화/혼합주의가 문제냐, 이원론이 문제냐… 하는 논쟁이 사실 꽤 많이 이루어졌었는데 

(뭐 적어도 내 머리 속에서는 그랬다. ㅎㅎ)

나 나름대로는, 이원론 극복의 문제, 하나님 나라 신학에 근거한 세상의 변혁의 가치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이 Lordship과 함께 이야기되지 않으면 세속화나 혼합주의의 함정에 빠져버리기 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다니는데마다 Lordship 얘기를 무진장~ 하고 다녔었다. )

그러나,

여전히 내게 혼합주의 극복 이라는 과제와 이원론 극복이라는 과제를 한번에 꿰뚫어낼 수 있는 ‘아이템’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Resident Alien 이라는 개념이 그것을 통합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개념은, 소위 ‘디아스포라’가 되어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팍팍~ 와 닿는 개념이 아니던가….

두가지 종류의 겸손함

크리스찬이 가지는, 

진리에 대한 겸손함은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나는 진리를 알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무한히 감사하지만,

그것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므로 내가 결코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건강한 신학적 입장을 가진 복음주의자들이 이야기해왔던 겸손함이다.

나도 구원받은 죄인이므로, 다른 죄인을 향해 손가락질 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지만…

그러나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도 대단히 유치한 수준이고,

좀 더 진리를 알게됨에 따라 지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도 유치하거나 심지어는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게 될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 신념에 지나치게 확신을 갖지 말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열어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다소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나 다원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이야기해온 겸손함이다.

(아, 물론… 대단히 교만하고 교조적이고 무대뽀인 자유주의자들도 많다. ^^)

……

나는,

첫번째 겸손이, 크리스찬 겸손의 모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나이가 먹고, 날로 조금씩 진리를 더 알아갈 수록…

두번째 겸손이 빠진 겸손은, 너무 shallow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진리를 다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대해 늘 열려있는 마음을 갖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언제 이 블로그에서 좀 더 풀어서 써보겠지만…

사실 이 두번째 겸손을 받아들이면…

(지금 많은 이들이 복음주의라고 이야기하는 사실상) 근본주의가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

더 겸손해지면 좋겠다.

빌립보서 2장을 다시 읽어본다.

겸손한 신앙

나는 참 겸손하지 못하다.

뭐 내가 부족한게 그거 하나는 아니겠지만서두,

특히 겸손에 관한 한, 나는 참 겸손할 수 밖에 없다. ^^

도대체 왜 이렇게 나는 겸손이 어려운걸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왔던 지난 25년간의 주된 숙제였다.

지난 주말,

교회의 visioning 모임(?)을 했다.

교회가 무슨 생각과 소망을 가져야 하겠느냐 하는 것에 대한 대화의 모임이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눈 중,

특히 나는 함께 모인 사람들이 ‘겸손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3주전, 목사님의 영어 설교(!)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가만히 생각해보면,

‘복음주의’라는 단어가주는 여러가지 ‘이미지’ 가운데,

‘겸손함’은 포함되지 못하는 것 같다.

미디어에서 그냥 떠들어대는 ‘복음주의’가 아니라,

나름대로 학문적으로 잘 define된, 정말 제대로된 ‘복음주의’를 떠올려도 역시 그렇다.

겸손한 복음주의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기존에 복음주의가 가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겸손하지 못한 내게는,

여려모로 머리와 가슴 모두를 무겁게 만드는 생각들이다.

Not Being Excellent (5)

지난주 였던가,

아마 그 전 주 였던 것 같다.

한참 열심히 일하면서, 스트레스 팍팍 받고,

마치 내가 우리 팀 전체를 구원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문득 자각하게 되었다.

뭐,

일이 워낙 많으니…

바쁘게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와중에 하나님께 결과를 의탁하고,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이 참 중요할텐데,

도무지 내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정말 쫓겨서 살고 있었다.


내가 내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하나님을 잘 신뢰하지 못하나봐”


내 아내는,

조용히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40대 중반에,

‘성장통’이라는 표현을 하는게 영 이상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나는 존재라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생각할 때,

지금 내가 이렇게 겪고 있는 것도 일종의 ‘성장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가면서,

좀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면 좋으련만…

Grounded

요 몇주 무리를 많이 한데다,

지난 주말 결정적으로 엄청 무리를 하고 나니.

허걱.

감기몸살에 걸렸다.

오랜만에, 나이퀼 먹고 잤더니만,

허걱,

눈을 뜨고 나서도 해롱해롱하다.

잠을 많이 자고, 쉬고나면 그래도 어느정도 functional 할 줄 알았는데,

허걱,

여전히 몸이 무겁다.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다. ^^

사람에 담겨져 있는 history

지난 주말에,

KOSTA 전현직 총무간사들이 모두 덴버의 황간사님 댁에 모였다.

그리고, KOSTA visioning 작업에 관여하고 있는 김중안 목사님, 오진이도 함께 했다.

indy KOSTA에 헌신해서 오래 자리를 지켜오신 안상현 목사님도 오셨다.

황간사님 댁에서,

아주 분에 넘치는 대접을 해 주셨다.

90년대 중반부터 지난 20년 가까운 시간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20대, 30대부터 섬기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40대, 50대가 되어버린 분들을 보면서,

아, 이들의 삶의 여정에는 ‘역사(history)’가 담겨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감사했다.

세월을 지내면서, 변질되지 않은 순수함과 겸손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계속 볼 수 있다는 것이.

KOSTA 관련된 모임이 늘 그랬듯이,

밤을 꼴닥 새우고, 나는 새벽 비행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복귀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웃고,

섬기는 세상과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고,

함께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도전과 격려를 받는 것이,

이 땅에서 나그네된 (diaspora) 백성의 삶의 패턴인 듯 하다.

다른 이들은 모를거다…

토요일 밤에서 주일로 넘어오는 밤을 꼬박 지새웠다.

잠깐 비행기 안에서 두어시간 눈을 붙이고, SFO에 도착했다.

목사님과 함께 아침에 커피와 함께 pastry로 아침을 먹었다.

정말 무진장 피곤했다. ㅎㅎ

이제는 이렇게 하는거 정말 무리구나 싶었다.

그 와중에,

목사님과… 우리가 사랑하는 그래서 많이 걱정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부터 1시간 후,

절대 수면부족의 목사님과,

절대 수면부족의 나는,

함께 예배의 자리에 앉았다.

피곤해서, 몸이 막 쑤셨다.

이대로 설교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설교를 듣는동안, 그러나, 나는 전혀 졸 수 없었다.

설교가 얼마나 탁월했는지 하는 ‘평가’는 할 수 없었다.

설교가 결코 ‘객관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설교 안에, 우리가 위해서 많이 걱정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설교를 마칠 무렵,

나는 내가 울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무리 기도를 하는 설교자의 음성이 떨렸다.

다른 이들은 모를거다.

내가 왜 그렇게 눈물을 그칠 수 없었는지.

다른 이들은 모를거다.

목사님의 음성이 왜 살짝 흔들렸는지.

공동체적 설교에서만,

공동체적 예배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Not being excellent…

1.
뭐 자랑은 절.대. 아니다.
이제는 나이가 충분히 들어서… 이런거 자랑하는게 얼마나 유치한지 안다.

2.
나는 꽤 공부를 잘했다.
늘 전교일등을 했던건 아니지만, 중학교때는 시험때마다 전교일등이 내 목표였고, 꽤 자주 그 목표를 이루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모인 고등학교에서도, ‘천재 그룹’에 속하진 못했어도, 대충 “위쪽 등수”는 유지했다.
대학교때엔 A0를 받으면 몹시 실망했다. 내 GPA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과 수석으로 대학원 입학했다.
그 후 꽤 좋은 학교에서 박사했고, 꽤 알려진 직장들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도 꽤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지내왔다. Resume 상으로 보면 꽤 괜찮다.

3.
어제 글에서 썼지만…
지금 직장에서, 참 일이 많다. 점심을 먹는 시간을 확보하는게 참 어려울만큼 일이 많고 바쁘다.
(그나마 어쩌다 점심 먹을 시간이 나면… 나는 먹는것보다 뛰는 쪽(운동)을 선택한다. ㅋㅋ 그리고 점심은 정말 아무거나 집어먹고.)
최근 며칠은 아침 7시 conference call로 일을 시작해서, 저녁 6-7시까지 conference call들이 있었다.
그리고 집에와서도 일을 떠나기가 어렵다.
회사에선 늘 뛰어다닌다. 걸어다닐 여유가 전혀 없다. 5분 잡담은 대단히 큰 시간낭비다.

4.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까지 바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안달복달하면서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하는 이유는, Excellent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지 않으면 많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5.
40대 중반이 되도록,
늘 Excellent 해야한다는 부담감에 살았고,
그럭저럭 그 excellency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내 몸에 밴… excellency를 추구하는 자세가, 나를 얽어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내가 한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할때, 야… 참 잘했다… Great… Excellent…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그걸 잘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 같다.
그래서 over-achieve 하기 위해 늘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6.
성실함은 참 좋은 것이지만,
over-achieve 하기위한 이런 자세는 탐욕이 아닐까
혹시… 약간 덜 achieve 하더라도, 내 자세의 적절한 balance를 찾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그래야… 내가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Excellent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끔은 under-achieve 해도 괜찮다고,
일을 잘하는 것 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내 자신에게 자꾸 이야기해주어야 하는 것 같다.

조금… 수위 조절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최근 좀 ‘심한’ 이야기들을 약간~ 했었다. -.-;

내 생각의 흐름들과 고민들을 때로는 다소 blunt 하게 이야기한 것들이 있었는데,

사실 약간… 수위조절을 하면서 이야기했어야 했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역시 더불어서,

이곳 블로그에서도,

생각의 내용을 너무 ‘솔직하게’ 쓰기 보다는,

약간 좀 수위조절을 하면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좀 하고 있다.

자칫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흐름의 일부를 ‘틱’ 하고 던지면,

그것을 파편적으로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많이 있고,

그러다보면 불필요한 걱정,우려, 불편함 등등을 야기시기키고 하는 것 같다.

약간, 수위 조절…

배려.

그리고 겸손함… 등등이 필요한 듯 하다.

마음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 후, 기도하는 시간에… 정말 조용히~ 다들 조용히~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한다.

다들 소리도 잘 안내고 그렇게 기도 하는데… 그래서 목소리가 큰 나는,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 기도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늘 조심하면서 기도를 하곤 한다. ㅎㅎ

그런데,

어제 설교후 기도시간에는 내가 그런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기도 하면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냥 

한편 마음으로 다가오는 따뜻함, 

한편 막막하고 안타깝고 답답함,

그리고 그런 설교를 준비한 설교자의 마음…

(게다가 자신의 아픈 부분까지도 내보이면서까지…)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느껴져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게,

설교 내용을 그냥 액면 그대로 놓고 들으면,

설교 내용이 좋긴 했지만, 

내가 그걸 듣고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릴만한 내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설교자의 마음이,

그리고 그 설교자를 사용해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촉촉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