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 후, 기도하는 시간에… 정말 조용히~ 다들 조용히~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한다.

다들 소리도 잘 안내고 그렇게 기도 하는데… 그래서 목소리가 큰 나는,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 기도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늘 조심하면서 기도를 하곤 한다. ㅎㅎ

그런데,

어제 설교후 기도시간에는 내가 그런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기도 하면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냥 

한편 마음으로 다가오는 따뜻함, 

한편 막막하고 안타깝고 답답함,

그리고 그런 설교를 준비한 설교자의 마음…

(게다가 자신의 아픈 부분까지도 내보이면서까지…)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느껴져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게,

설교 내용을 그냥 액면 그대로 놓고 들으면,

설교 내용이 좋긴 했지만, 

내가 그걸 듣고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릴만한 내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설교자의 마음이,

그리고 그 설교자를 사용해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촉촉함이었다.

쫓기지 않는 삶 ? – Update

그저께와 어제 오전에 일을 좀 설렁설렁… 했더니만…

완전히 어제는 일이 팡팡 터져 주었다. -.-;

잘못하면 아마 이번 주말에는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해야될지도 모르겠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스트레스 받게 되고…

완전 민폐…

음…

그냥 내 나름대로 ‘자체 휴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여유를 찾는건,

내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바쁜 일정으로 살되,

쫒기며 살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필요할 듯.


그런 자세를 갖는 key는,

outcome을 주님께서 맡아주신다는 신뢰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는,

이 문제를 최근 많이 생각하면서..

내가 하나님 안에서 풀어내어야 할 중요한 key 하나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건이 허락하는대로, 이 블로그에서, 내 생각의 흐름, 마음 가짐, trial-and-error를 좀 써보아야 겠다.

(결국 이건… 내 ‘공개 일기’인 셈이므로… ㅎㅎ)

Break…

요즘 정말 회사에서 일이 많다.

점심 먹을 시간 찾는 것이 어렵고, 그야말로 5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쓴다.

지난 며칠은 아침 7시 conference call로 시작해서 저녁 8시 나 되어야 퇴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집에 와서도 이메일을 떠나지 못하고…

그런데 어제는,

아주 의도적으로, 8시쯤 퇴근해서는….

회사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농담을 하고…

ipad로 youtube 동영상들을 보고,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초콜렛을 먹고… ㅋㅋ

Forbes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성공적인 사람들은 stress와 게으름의 적절한 balance를 유지한다고…

나는, 소위 ‘성공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trend를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삶의 balance를 맞춘다는 차원에서 주목해서 보았다.

나는 늘 ‘strong anxiety’의 range에서 내 삶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다보니 ‘늘 바쁜일로 쫒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효율도 떨어지고… 그러다보니 더 시간이 없고…

가끔, 일을 ‘끄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 상황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한듯 하다.

나 같은 교인둔 목사님은 얼마나 힘드실까?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잘 못했는데,

요즘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나 같은 교인을 둔 목사님은 얼마나 힘드실까.

자꾸 이런 저런 이야기 해대지,

다른 생각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지,

나름대로 열정이 넘쳐 가끔 주체하지 못하지,

따지기 좋아하지,

때로 공격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지..

성경공부 하시면서, 설교하시면서 얼마나 마음에 거스르실까…. 

목사님께 잘하자… 

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ㅋㅋ

공감 되시는 분은,

여기 우리 목사님의 블로그에 가셔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많이들 남겨주시길….  

사랑할 여유가 없다면…

내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지론(?)은,

사랑할 여유가 없을 만큼 바쁘게 사는 것은 죄이다… 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바쁘게 살더라도 사랑할 여유가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별로 바쁘게 살지 않더라도 사랑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으니,

사람마다 바쁘게 사는 정도를 자신에 맞게 조정해야 할 터인데…

지난 두어주 정도,

사람을 사랑하고 돕고 하는 이메일, 카톡, 텍스트 등등이 쏟아졌다.

대충 4~5사람을 동시에 ‘도와주는’ mode에 있었던 것 같다.

어제 오후 카톡 하나가 띵~ 하고 들어왔을때…

어휴… 뭐가 또….

그 생각이 든 순간,

금방 내게는 red flag이 올라왔다.

….

나와 내 아내는, 

결혼기념일보다 2월 16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97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걸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지났는데….

(게다가 내가 박사과정을 그만두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기에 나는 정말 무언가를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 자칫 그냥 내가 내 아내에게 부담만 주게될 것 같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2월 15일, 

내 아내 (그 당시는 ‘수영이’ㅋㅋ)가 대학원 원서를 막판에 준비해서 넣는걸 도와준다고 만나서…

저녁먹고…

머뭇거리다가 (정말 많이 머뭇거리다가..) 자정이 조금 넘어서 사랑을 고백했었다. 

그 이후 17년 동안,

나도 내 아내도 참 바쁘게 살아왔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내 아내를 사랑할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아내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회사의 project를 잘 해내는 일이나, 성경공부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일텐데 말이다.

Dallas Willard가 John Ortberg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는 충고를 따라, 내 삶을 좀 정리해야할 듯 하다.

“You have to ruthlessly eliminate hurries in your life.”

(but… I don’t yet know how… -.-;)

소그룹 성경공부 때문이다!?

최근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이처럼 공격적인 선언으로 가득차 있는 이런 복음서를 읽으면서,

어떻게 도대체 멜랑콜리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정만화 같은… 그런 기독교를 진짜라고 믿을 수가 있는 걸까?

그건…

활활타는 용광로 앞에서 작은 주전자를 들고 차 한잔 마실 물을 끓여보겠다고 하는 것,

나이아가라폭포가 쏟아지고 있는데, 작은 생수병 하나 들고, ‘생수’ 받아가겠다고 나서는 것,

3000년 묵은 키가 100미터가 되는 큰 나무를 보고, 그걸 분재해서 집에 키우고 싶다고 하는 것 보다도 더 터무니 없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뭐 대단히 긴 세월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늘 내가 ‘순정만화’식의 기독교 메시지만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그래도 거칠고 투박하고, 심지어는 신학적으로 약간 편향이 있었을 망정,

‘선포’, 혹은 ‘선언’ 이라고 번역하는 ‘케리그마’가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무엇이 현대 기독교를 이처럼 천박하게 만들었을까?

최근 내가 고민하면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소그룹 성경공부’이다.

뭐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는 소그룹 성경공부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난 20여년을 보내왔다.

늘 소그룹 성경공부를 하며, 인도하며 살았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는,

‘선포’의 장대한 서사시와 같은 복음을,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와 같은 scale로 전락시켜 버렸고,

복음의 사유화 (privatization)을 가속화 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신학적으로 많이 부족한 인도자가,

그저 좋은 성경공부 분위기를 만들려면…

우리끼리 서로 힘이 되는, 따뜻한 이야기,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이야기…

이런 것에 치중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결국 위에서 기술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 아닐까.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나누고,

‘말씀’을 배우면서…

삶과 사랑을 나눈다고 이야기하는 소그룹 성경공부가… 사실은…

말씀을 말씀답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shallow한 자기 생각을 나누고,

말씀을 배우기 보다는 말씀을 사유화하는 것을 배우고,

그래서 궁극적인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딱딱 거리는 어떤 사람을 대하면서

새 회사에 온 후,

아주 다른 일들을 참 많이 한다.

(나는 정말 일 복이 터졌다. 얼마나 일복이 터졌나 하는건 언제 이 블로그에서 시리즈로 한번 다루어볼까 한다. ㅋㅋ)

그중 하나는,

내 office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가서 실험을 좀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곳의 lab manager가 아주 딱딱 거리고 나를 힘들게 했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네가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가 S***ford 다닐때 실험실에서 다 해본거다…

음…

이거 참…. 일하기 막막하네…

그러다 최근, 이 사람이 나랑 linked in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렇게 연결된 다음날, 이 사람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주 나긋나긋 싹싹…

몇가지 가능성,

1. 내가 너무 어려보여서 만만하게 봤는데, linkedin을 보니, 나이가 좀 있어서… 그렇게 막대하지 않기로 했다.

2. 내가 뭐 그냥 별볼일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linkedin을 보니, 나름대로 학벌과 경력이 괜찮아 막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음…

뭐 두가지 다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결국 내용은 이거다.

나는 실제로 대하면 별볼일 없는데…

resume 상으로는 profile이 훨씬 더 좋다.

음….

resume profile로 밀어붙여 돈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resume profile에도 불구하고 일 열심히 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이렇게 일복이 터져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지만…

아직도 나는 professionally 많이 부족한걸까.

하나님 나라가 선포됨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느끼는건,

정말 이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라는 개념의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에 대한 언급이 참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지난주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함께 하는 사람들과 좀 나눈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차원’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이해하면 도움이 참 많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3차원에서 살고 있고, 그런 ‘공간’은 ‘시간’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곤 하는데…

사실 물리학적 개념으로는 그렇지 않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시공’ 혹은 Space-time 이라는 개념으로 서로 엮여 있다. 그 ‘시공’이라는 것이 중력 부근에서는 휘기도 한다는게 일반 상대성 이론의 내용이다.

뭐… 갑자기 엉뚱하게 물리학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서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위치가 바뀐다.

보통 우리 사람은, 그 사람의 위치가 시간에 따라 바뀐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지만…

‘시간’이라는 축을 아예 하나의 축으로 놓고 전체 frame을 이해하자면, 시간에 따라서 어떤 위치를 지나온 그 사람의 모든 궤적 자체가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t=t0에 x0 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t=t1에 x1 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t=t2에 x2 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 모두를 다 포함해야 시간축을 따라서 존재하는 그 사람을 다 기술해 내는 것이다.

시간축에 대해서 ‘초월’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time-slice 밖에 볼 수 없지만, 시간축에 대해서 ‘초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모든 time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time-sliced description이 아니라, 전 시간적 description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고, 

(가령,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와 같은…)

어떤 경우에는, 아직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실행/현실화 가능한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신다.

(가령, 아무것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는 것과 같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라 라는 말씀을 제대로 지키면서 이 현실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이게… 사실상 불가능한건데, 시간축을 초월해서 성경을 읽어내면 이게 가능해지는 거라고나 할까.

마태복음을 읽었던 마태복음의 일차적 독자들은, 

산상수훈과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이제는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의 시대가 열렸으니,

이제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거구나…

하면서, ‘지금’ ‘여기서’ 지켜야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코드로 이것을 받아들였을 것 같다.

3.

구약에서 나타난 율법 역시, time-sliced description/prescription 이라기 보다는, 초시간적 기술이자 명령인 것 같다. 

이것 역시, 현실적으로 지킬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홍해바다를 가르고 우리를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으니, 이제는 그렇게 살아야하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4. 

따라서, 그런 ‘구약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유대인 독자들은,

산상수훈을 읽으며 / 들으며…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이 훨씬 적지 않았을까.

이미 그런 생각의 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5.

가령,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을 우리가 읽으면서는…

그래서,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우리가 용서 받는거야? 그러면 이거 이신칭의랑은 어떻게 되는거야?

이런 고민을 하지만,

이걸 시간초월적 명령으로 받으면… 언젠가는 죄의 용서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새 시대가 완성되는 날이 오는데… 지금 바로 여기서 그 시대가 열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야해! 

이렇게 이해가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을 포함해서…) 복음서… 더 나아가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코드는,

지금 바로 지키면서 살도록 요청하는 명령이지,

그걸 통해서… 이신칭의를 깨닫게 하도록 도움을 주는 그련 메타포가 아니다.

6.

예수님께서는,

시간 이라는 차원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턱~ 하고 우리에게 던져 주시면서,

자 이제 이런 시대가 열렸고, 열리고 있고, 열릴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나라의 파라독스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시간 초월적 선언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쉬워지는 게 아닌가 싶다.

…..

뭐 이런 식의 이야기를 성경공부 시간에 했더니만,

목사님께서…

비공돌이들에게는 그런 비유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셨다. ㅋㅋ

나는 이렇게 생각하니까, 머리에 팍팍 들어오는데 말이야… ㅎㅎ

상처 많은(?) 개

우리가 개(하이디)를 키우기 시작한지 벌써 4-5개월 정도가 지났다.

이 개를 입양한 쉘터의 안내에 따르면, 하이디를 길에서 발견했을 때, 도대체 무슨 종류의 개 인지, 무슨 색깔의 개인지 하는 것 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고 한다.

무슨 험한 세월을 살았는지, 이 아이는 앞니가 거의 다 없다.

그래서 보통 개들이 좋아하는 “뼈다귀” 같은 것을 하이디는 즐기지 못한다.

이가 좋지 않아서, 먹이가 조금만 크면 잘 못먹는다.

처음 왔을 때에는, 정말 잔뜩 긴장이 되어 있었고, 도무지 친한척을 잘 하지 않았다.

먹을것을 줘도 극도로 조심하고, 잘 다가오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는 하이디는 그냥 많이 얌전하고 부끄러움 많은 개 인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하이디는 우리가 많이 편해졌는지, 우리들에게 다가와서 놀아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먹을 것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장 와서… ‘놀자’고 꼬리를 흔들며 아침 인사를 한다. 약간 기분이 좋으면 집 안에서도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흥분을 표현한다.

민우가 소파에 누우면, 바로 민우 품에 쏙 들어가서 눕는다.

험한 삶을 살면서,

몸과 마음에 상처가 많았던 하이디가,

이제 민우 옆에 누워서 민우에게 떼도 쓰게된걸 보며…

참 많이 감사했다.

그러면서도,

아… 사람도 이렇게 몇달만 사랑을 주면, 예전의 상처를 씻고 다시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신선한 예배

어제는,

산호세 CRC (미국교회)와 함께 ‘공동예배'(?)를 드렸다.

하나의 씨앗교회는 CRC (Christian Reformed Church) 라는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 동네의 CRC 미국 교회가 우리를 host해서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 목사님과 우리 목사님이 한편의 설교를 반반씩 나누어서 했고,

그 교회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 찬송가도 한절은 한국말로 불렀다. ^^

예배도 좋았고, 설교도 좋았고…

CRC는 화란의 개혁교회 사람들이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만든 교단이란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개혁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라는 범주에 넣는 것을 불편해 한다고.

복음주의냐 아니냐라는 구분 자체가 자신의 신학적 identity와는 다소 맞지 않는 다고 이야기한단다.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가의 선곡이나, liturgy의 흐름이나, 그 교회의 30대 젊은 목사의 설교, 또 그분과의 짧은 대화 등등을 통해 받은 느낌은…

음… 이거 신선한데? 뭐 그런 느낌이랄까.

그 젊은 목사님은 Fuller 출신이라고 하니, 

뭐 복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긴 하겠으나…

복음주의가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지는 요즘,

내가 불편하지 않는 non-evalgelical의 신앙의 단면은 본것은 아닐까 싶어,

잠시 반가웠다.

(뭐 자세한건 더 공부해봐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