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함

얼마전에,
내가 이 블로그에 내가 나의 무지함을 토로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글을 읽더니 내 아내가 내게 말했다.

“솔직히 당신이 그렇게 무식하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1. 정말 나는 내가 그렇게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가식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그렇게 쓴 것일까.
2. 정말 나는 내가 무지하다고 인정하며 생각을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비추어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내게 늘 배어있는 교만함 때문에… 내가 솔직히 내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다는 뜻에서)

Grace!

지낸 주말을 지내면서,
몇편의 설교를 듣고…
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면서 나름대로 묵상/생각할 기회도 있었다.

그 생각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내가 최근 몇년간 은혜(grace)에 대한 생각과 묵상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자격이 없는데 값없이 주어지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 삶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 내가 무엇인가를 주도해서 하려는 성향이 과해지거나…
– 다른 이들을 향한, 그리고 심지어는 나 자신을 향한 compassion이 심각하게 약화되거나…
–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분이 오래 가게 되고…
– 다른이들에 대해,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도 최소한 지켜야할 도덕률이나 책임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는 것등이다.

은혜, 은혜, 은혜…
Phillip Yancey가 이야한 대로…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여러 용어중, 세상이 차용하여 뜻을 오염시키지 않은… “the last good word”.

그것을 말로 풀어내자면 그 풀어내는 작업 자체가 단어의 뜻을 손상시키는… 바로 그 은혜…

I really need to get back to that more often, daily…

기도에 대한 몇가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문제가 보이지만,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보인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내 열정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낼 수 없다.

기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은,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양말이 잔뜩 들어있는 정리되지 않은 바구니에서 같은 색깔 양말 두짝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가끔 일이 되기도 하지만,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기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들 가운데 하나이다.

—–

기도가… 고프다.

촉촉하지 못한 기행문

민우가 지난 4년동안, spring break을 한번도 아빠와 보낸적이 없었다.
그래서 작년 spring break때 민우와 약속을 했었다.
내년 spring break에는 무슨수가 있어도 꼭 아빠가 민우와 함께 놀겠다고.

그래서,
작정을 하고… 민우와 이번주에 많이 놀기로 했다.
비록 full week을 다 놀지는 못하지만.

안모 간사님의 강력한 협박에 가까운 강압에 못이겨…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Yosemite에 다녀왔다.

여러가지가 참 기가막힌 여행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몇시간전까지 Yosemite에 눈이 내렸다.
우리는 오후 3시경에 도착했는데…
그야말로 Yosemite 전체가 절.경. 그 자체였다.

아직 구름이 흩어져 있는 하늘에 밝게 빛나는 태양,
그 아래 반짝이는 눈 덮인 Yosemite는 정말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각 폭포마다 물이 쏟아져 내리고, 이미 봄꽃이 피어 있는 위에 내린 눈은 기가막힌 모습을 만들어 냈다.

야생 동물들도 볼 수 있었는데,
Cayote 한마리는 우리가 탄 차로부터 불과 몇미터 앞까지 다가오기도 하였다.

오죽해야 내 아내는…
내가 경치를 보면서 이렇게 감탄하는 것을 처음 본다고 하였다.

비록 trail에 눈이 덮여있어, 안모 간사님이 강력하게 추천하신 trail을 제대로 가보지는 못했지만…
정말 감탄에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그렇게 ‘촉촉함’을 누리는 와중에도…
내 머리속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데도….
내게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네.
세상에 거슬러 살아가는 당당한 그런 사람들 모습.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행여나 망가지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나는 사람이 망가지는 것이 훨씬 더 가슴이 아프네.
아름다운 창조질서를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

허..참…
뭔가 좀 경치나 잘 감상할 것이지…
그 경치를 감상하는 와중에…
그 운치를 깨뜨리는 생각들은 또 뭐람.

지금쯤 와선,
거의 촉촉해짐을 포기하는 지경이 이르고 있다. -.-;

슬픈 부활절

어제는 부활절이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2000년전에도 good news 였듯, 지금도 그것이 good news라는 선포와 함께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명절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130년이 조금 더 된, 미국 장로교회이다.

보스턴에 있을 때에도 경험했던 것이지만,
비교적 오래된, 혹은 동네에서 좀 유명한 미국 교회를 다니다보면…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유난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겪게 된다.

일년 내내 교회 안나오다가, 부활절이라고 해서, 자기 애들까지 예쁘게 차려입히고 와서는 예배를 드리고 떠나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본다.
때문에 부활절에는 늘 예배드릴 자리가 부족하여 교회에서는 한차례 비상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영적인 센스가 있는 교회라면, 이런 부활절과 같은 명절을, 철저하게 복음의 핵심 내용을 전달하는 기회로 활용한다.
오래전에 교회를 떠난… 그러나 그저 문화적으로 그 흔적만 남아서 명절때 한번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향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제 우리 가족은 약간 예배 시간에 늦었다.
때문에 예배를 드리던 본 예배당에 자리가 없어서, 임시로 마련된, video로 예배를 드리는 방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방에는,
정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그러나,
그 방은 죽어 있었다.
일년에 한번 혹은 두번 나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함께 찬양을 하는 시간에도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도, 박수치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헌금 바구니가 돌아가자 대부분의 사람이 그냥 ‘패스’를 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가진 지폐 한장을 덜렁 넣는 정도였다.
내 옆에 앉아있던 아내는, ‘사람들이 박수를 안치네’ 하며 일부러 큰 소리로 박수를 치기도 했다.

그런이들을 향해 이야기하는 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간절하기 까지 했다.
예전에 ‘종교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옛날 것’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매우 전략적으로 target한 설교였다.
그런 이들에게… 문턱을 넘으라고, 그 역사적 사건이었던 부활의 주인인 예수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 설교였다. (정말 훌륭한 message 였다!)

적어도,
내가 있었던 그 방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썰렁했다.
하다못해 설교중의 농담에도 반응이 별로 없었다.
그야말로 죽어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정말 마음이 무거웠다.

왜…
이들에게 복음이 이렇게 죽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을까.

이런 모습이 비단 ‘미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만한 한국 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될텐데…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럴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복음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이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

그저 “우리가 하던” 대로…
예배당이나 잘 짓고, 예수 믿고 복받으라고 이야기나 하고, 헌금 거두어서 다시 예배당 짓고…
교인들이 뭔가 맥이 빠졌다 싶으면 특새나 돌려서 기강잡고…

민중의 아편이 되어버린 기독교가…
양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
그 부활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조차…
그 부활의 영광을 소리높여 찬송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현실이,
숨이막히도록 슬펐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그런 현상을 바라보며 울지 않는 나 자신과…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부활절 묵상

지난 1-2년간,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 대속하시는 사랑등을 많이 묵상하고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예수의 숭리와 부활, 악을 심판하시는 부활 등을 많이 묵상하고 기억하는 쪽으로 내가 많이 움직여 왔다.

섬기는 KOSTA의 주제와 관련해서 그렇게 된 부분도 있고,
내가 접했던 책들과, 주변의 내가 존경하는 동역자들의 comment에 영향을 받은것도 크다.

“Christ is Risen!”
이라는 것이, 초대교회 인사였듯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이 내 유일한 소망의 근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터인데.

CHRIST IS RISEN!!!

고린도전서 15:13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15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1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21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 묵상 – 토요일

고난주간 묵상을 하다보면…
혹시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금식이라도 하다보면…
토요일은 참 ‘힘이 빠지는’ 날이다.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이 금요일에 이미 절정에 다다랐으나,
아직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는데 이르지는 못한…

기도도 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예수의 죽음과 고난을 묵상하여으나…
뭔가 이제는 힘도 빠졌고…

예수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한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제는… 그 Jesus movement가 끝났구나 하는 허탈감과 허망함, 그리고 그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에 둘러싸여있지 않았을까.
새벽까지 예수를 따라다니거나… (혹은 도망다니거나, 숨어 다니거나)…
그랬던 긴장이 좀 풀리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울다가… 떨다가… 그러다가 잠도 들고…

그러나,
내가 지금 느끼는 그 ‘힘빠짐’은 그 당시 제자들이 느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알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께서 이미 승리하셔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고난주간 묵상 – 금요일

가상칠언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2.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복음 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 27:46)

5.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

6.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복음 23:46)

고난주간 묵상 – 목요일

목요일에 관련된 묵상은 너무 많고 풍성해서… 하루의 짧은 블로그 포스팅에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다.
그중…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락방 강화는 특히 내 마음에 더 와 닿는다.

예수의 평화가 이미 임했다는 선언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부조리하다.
이제 가장 폭력적이고 잔인한 처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제 그 평화가 왔다고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망가져버린 세상을 회복하고 구원하시는 예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버린 사람들을 품으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예수,
그 평화의 실체에 대하여 알지조차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참된 평화를 주시고자 그 폭력적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예수.

내게 주어진 평화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내가 그것을 얻고자 다시 노력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다. (비록, 너무나도 자주, 내가 그 평화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긴 하지만.)

내게 주어진 평화는,
값없이 주어진 것이긴 하지만, 값싼것은 아니다. priceless한, precious한 그 평화를, 내가 그 실체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그 평화를… 내가 누리게 된 것이다.

태초로부터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셨던 그 평화가,
십자가라는 형틀에서 폭력적이고 잔인한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역설…

그 역설로만 solution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바로 나의 죄가 자리하고 있다.

이제 목요일 저녁에는 땀이 피가되도록 기도하신 후에,
인류 역사상 가장 부조리한 밤을 지나게 된다.

창조주가 피조물에의해 매질을 당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시저 이외에 왕이 없다고 선언하는…
all-powerful한 하나님이 폭력 앞에 묵묵히 무너져 내리시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죄인들을 위해서 마련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