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표정

실의에 빠져 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끔 내게 조언을 구하는 이상한 족속의 인간들이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다니… 그래봐야 좋은 말 못 들을 텐데…

그럴때 나는 다음의 질문을 잘 던진다.

“그래서, 지금 너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표정은 어떠니?”

이렇게 질문했을때 다음의 두 부류의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첫번째는 얼버무리거나 이상한 답을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아예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이다.
기도도 하고, (그것도 열심히)… 기도 부탁도 맨날 하는데, 막상 자신은 그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렇게 질문을 했을때 우는 사람들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을 할 때 까지 막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하지 않다가, 그 질문을 받는 순간 하나님을 얼핏 바라보게 되고, 그 하나님 앞에서 그저 서럽고 죄송해서 우는 사람들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질문을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이 질문은 바로, 내가 어려움을 빠져 있을때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아주 핵심적인 질문이다.
나도 역시 그 질문에 어버어버 제대로 답을 못하거나, 그저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눈물을 주르륵 흘릴때가 많다.

믿음의 위험성

제목이 좀 이상하긴 한데…
나 역시도 신앙인으로서, ‘믿음’이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자주 내가 믿음의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를 믿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나는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이 계시다는 것과, 성경이 그분이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믿는 성경에 기술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공평과 정의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정말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에 큰 영향을 끼칠만한 일이 생겼다고 하자.
가령 세월호 사건과 같은 대형 참사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거나,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거나 하는…

그러면 그런 일에 대해서 하는 반응은 대개는 이렇다.
“믿자. 그 하나님을 믿자.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옵소서. 그 믿음으로 나아가자. 믿음으로 붙들자.”

음…
그래. 사실 그렇다. 그럴때 믿음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위에서 하고 있는 모습은,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떠하더라도 별로 상관이 없다.
그냥 그 믿음의 대상이 돈이나 권력이나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신이라 하더라도… ‘그저 믿자’고 다짐하고 결심하는 기독교인들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믿음의 위기가 왔을때,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을 믿지 말고, 그 믿음의 대상을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시련과 어려움을 지나면서 믿음에 심한 손상을 입는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시련과 어려움을 지나면서 믿음에 큰 진보를 이룬다.

많은 경우,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믿음에 손상을 입는 사람들은 믿음을 믿으려 하는 부류이고,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믿음에 진보를 얻는 사람들은 믿음의 대상에 집중하는 부류인 것 같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

1.
나를 대충대충 아는 사람들은 내가 매우 활동적이고 외향적(extrovert)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대단히 내향적(introvert)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내게는 대단히 많은 에너지를 쓰는 일이다.

2.
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을 회사에서 하고 있다.
세계의 여러 회사들의 많은 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conference call을 한다.
그래서 회사 다니면서 일하는게 더 힘들고 지친다고 느낄때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현재 연락을 하면서 여러가지 project를 진행하고 있는 회사가 대충 20개쯤 되고, 그 회사들을 미국, 영국, 한국, 일본, 독일, 스위스에 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들과 자꾸만 만나는 일들을 계속 해야한다.
그 일들은 내가 따로 record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그 일의 진행상황들을 머리 속에 늘 그리고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과는 수시로 연락하여 만나야 한다.
계속해서 진행상황을 점검해가며 접촉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수가 전 세계에 대략 30~40명 수준은 되는 것 같다. 일이 막 몰릴땐 그 수가 100명 이상 늘어나기도 한다. 물론 우리 회사 내부의 사람들 20명 정도는 매주 이야기를 해야하고.

3.
여러 경로로 job inquiry를 묻는 사람들도 늘 많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고, 간접적으로 소개를 받는 경우도 있고, 아예 모르는 사람이 linkedin등을 통해서 연락을 해와서 Verily에 job 있느냐는 식으로 묻는 이메일등을 많이 받는다.
많을때는 한주에 10개 정도는 그런 inquiry를 받는다.
사실 안그래도 바쁜데 그 이메일들에 다 답을 해주고,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 일들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가능하면 최대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정말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많이 마음이 쓰여서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주게 된다. 오지랖 넓게…

4.
어떻게든 알던 전 직장의 사람들이나, 예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서 일종의 ‘friendship’을 만든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가끔 점심이나 한번 먹자고 연락을 해온다.
사람 만나는 것이 내겐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어서, 그런 사람들 만나는 것도 때로는 너무 많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적어도 한달에 한두번은 그런 연락들이 꼭 오곤 한다.

5.
예전에 교회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라던가, 성경공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 특히 내가 마음을 써서 ‘키웠던’ 사람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깊은 대화를 하기도 하고, 어떤땐 많이 변해있는 모습에 실망을 하기도 한다.
몇년만에 연락을 해 와서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 한시간만이라도 차한번 마시자고 애기해오면… 그런 만남을 거절하기는 참 쉽지 않다.

6.
그리고는, 내가 어떻게든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들이 당장 처해있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싶은 경우이다.
함께 성경공부를 하기도하고, 말씀 묵상한 것을 나누기도 하고, 그냥 잡담을 하기도 하고, 그냥 힘들어하는 얘기를 한참 듣기만 할때도 있다.

7.
그 외에도 여러가지 경로로 연락을 해서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만나자고 요청을 하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긴 debate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
이 블로그를 통해서 그렇게 만나는 분들도 꽤 있다.
이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서 그 분들과의 대화를 잘 해보고자 노력하곤 한다.

8.
사람 만나는 일이 힘이 많이 드는 사람으로서,
내 lifestyle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때가 때때로 있다.
막상 내 얘기를 좀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고,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물론 참 감사하다. 내가 꼭 해야할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9.
나 같은 사람은,
정말 마음 잘 맞는 사람 소수와,
깊이 있는 대화를 한주에 한번 정도 나누면서… 나머지 시간엔 생각도 하고, 책도 읽고, 연구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러는게 좋은 스타일인 것 같다.
그렇지만 뭐 어떻게 세상을 내가 살고 싶은 대로만 살겠는가.
게다가 나는 내가 얻게된 여러가지 특권들을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야한다는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것에 늘 눌려있기도 하다. ^^

10.
Long weekend를 지내고 새로운 한주를 또 시작한다.
또 다시 무지하게 사람들을 만나는 한주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지켜주시는가

참 자주 갖는 질문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지켜주시는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주기도문의 기도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그 백성의 아픈 울부짖음,
회개의 탄식,
구원을 바라는 외침은 하나님께 어떻게 상달되는 걸까.

지난 KOSTA 주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대한 강조를 많이 생각했었다.
이 땅을 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이 사는 나그네된 백성의 삶에 대해 많이 고민했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데,
그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해야하는 것에 대하 많이 생각해보려 노력했었다.
그 속에서 내가 나름대로 찾았던 일종의 keyword 가운데 하나는 피동성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지켜주시는가.

(오늘 글이 너무 뜬금없이 두서없이 쓰여졌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듯 한데… 아마 며칠이 지나면 좀 더 자세히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만하지는 않은 business trip

지금은 31일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어제 11시에 SFO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서 일도 좀 하고 잠도 잤지만, 영화를 볼 시간은 없었다.
잠을 쌈빡하게 좀 잘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한 4시간쯤 잔것 같다.

그런데, 착륙하자마자 전화에서 불이 났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얼른 office에 갔다.
점심도 못먹고 (사실 내리기 전에 뭘 먹어서 딱 배고프지는 않았다.) 사람들 모아서 일좀 하다가…
좀 일찍 마치고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4시가 좀 넘었다.

내가 웬만하면 시차 잘 견디는 편인데…
잠이 쏟아졌다.
잠깐만 눈을 붙여야지…
5시쯤 누웠는데, 눈을 떠보니 지금이다. (잘 잔 셈이다!)

이번 business trip에서는 주말에 부모님과 시간을 좀 보낼 수도 있었고,
일본에서 내가 가보고 싶었던 라면집에도 가 볼 수 있었다.

일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일만하지 않고 시간 잘 보냈다. ^^

다만 너무 먹어서, 지난 두주 동안 살이 후다닥 쪘다! -.-;

9월중에는 아직 잡혀있는 출장 일정은 없다.
9월 말경에 동부의 어느 청년부 모밍 수양회 가는 것 말고는.

이틀 블로그 쉽니다.

7월 첫째주에 시카고에 다녀왔고,
그 후에 거의 바로 한국에 며칠 다녀왔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이틀동안은 미네소타에 가야하고,
8월중에 열흘정도는 또 일본에 가야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뉴저지에도 한번 가야하고,
최근에 develop되는 일이 하나 있어서, 독일에도 한번 가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글타래에서 또 한번 다루겠지만 커네티켓에도 한번 가야할수도 있고요.

이거 갈때마다 블로그를 쉬면,
거의 글쓰기가 안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쉬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일 모레 이틀은 어쩔수 없이 에너지가 딸려 쉬겠습니다. ^^

한번 얼굴보자, 만나자…
이렇게 이야기해놓고 만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충 대여섯명은 되는데,
이 출장 폭풍들이 좀 지나면 꼭 한번씩 보면 좋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틀 쉽니다. ^^

비겁함은 비난받을 태도일까?

비겁한 사람들을 찾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다.
내게는 특히 그렇다. 왜냐하면 내가 상당히 비겁하기 때문이다. ^^

비겁함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비겁함은 결국 겁이 많은 성격으로부터 나오게 되고, 그래서 비굴하게되는 태도가 아닐까.

나는 겁이 많은 것은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이 엄청한 겁보로서, 나는 겁 많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싶다.

그러면 비굴하다는 것은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possibly.

그렇지만 겁이 많은 사람이 겁나게 하는 상황을 만났을때 취할 수 있는 option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그 상황을 피하는 것이다. – 그것 자체가 비굴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상황을 피하고나면 그 상황 속에서 비굴함을 유지하지는 않아도 된다.

두번째는 그래도 이를 악 물고 그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조금 더 힘을 내!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게….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진짜 겁보들은 조금 더 힘을 내어서 그게 잘 안된다. 완전히 죽을만큼 힘을 내어도 그걸 마주할 수 있을까 말까 한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 상황 속에 그래도 머물러 있으면서… 그 움츠려드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비겁한 자세가 나온다.

그런데… 만일 회피가 대단히 어려운 선택인 상황이고, 그렇다고 더 용기를 내는 것도 너무 벅찬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냥 비굴해 지는 것이다.

능력이 부족한 가장이 윗 상사들의 폭력적인 강압에 장단을 맞추면서 돈을 벌어오는 것. 비굴하다.
노점상을 하는 사람이 동네 깡패들이 와서 돈을 뜯어가면 그 사람들에게 웃어가며 돈은 주는 것. 비굴하다.

많은 경우 정말 비겁함에대한 다른 대안이 없다. 오히려 비겁함이 그 삶에 대한 애착을 갖는 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는 방식일 수 있다.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좋지만,
그리고 용기를 더 내도록 바뀌어 가면 좋겠지만…
어떤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없다면,
겁이 많아서 비겁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비난할 수 없다.
모든 비겁함이 다 비난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어떤 비겁함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겁함이 비난받을만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비겁한 사람들은 자신의 비겁함으로 인해서 많이 아파해야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용기를 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상, 비겁한 사람의 자기변명.

The Temptation of Ministry

지난 주말 Podcast에서 완전 찔리게 들은 설교가 youtube에도 올라와 있었다.

Tim Keller는 Martyn Lloyd Jones의 광팬(?)임이 분명하다.
Tim Keller 설교들중에서 매우 핵심적인 key는, 자주 Martyn Lloyd Jone에게서 가져오는 것 같다.

위의 설교에서도 역시 그렇다.

왜 현대 보수 기독교에서는 Martyn Lloyd Jones와 같이 설교하는 사람이 없는 걸까…

내 기도

대학교 4학년 때였던가…
몇명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 당시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이자 큰 선배님으로 여겨졌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같은 학교에 계신 ㅈ모 교수님이나 ㅇ모 교수님 같은 분들도 있었고,
다른 학교에 계시지만 영향을 많이 끼치셨던 ㅅ교수님, ㅇ교수님, ㄱ교수님 등등…
그리고 같은 교회에서 만났던 ㅊ박사님 같은 분이나 나와 같은 직장에 계셨던 ㄱ박사님 같은 분들…

그 당시 그분들은 대부분 40대였다. (30대도 있었다.)
40대에 이미 후배들에게 따라야할 이정표같은 것으로 계셨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불과 20년 후에 어쩌면 우리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20년 뒤에는 저분들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을까?
이분들이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우리가 금방 이분들의 빈자리를 채워야하는 세대인데, 과연 우리가 그럴 수 있겠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화들짝 놀랐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정말 얼마 있지 않아서 우리가 한국 교회를 책임질 사람들이 될 수 있겠다.
정말 잘 준비하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의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때 그 교수님들은 여전히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들이고,
그때 20대 대학생들인 우리는 후배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 해 주지 못하는 실패한 세대가 되어버리고 있다.

내가 코스타에 가서 하는 가장 간절한 기도는 이것이다.
하나님, 또 다시 10년, 20년을 실패한 세대만이 길러지는 시간을 보낼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할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들을 정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정말 좀 세워주십시오.

내일이면 참 오랜만에 코스타 집회로 떠난다.
한 주 동안, 많이 울면서 기도할 생각이다.

(다음 한 주 블로그도 쉽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꾸벅~)

힘든 것을 해결해버리는 종교

교회등의 기독교 모임에서 소위 ‘기도제목’이라는 것을 나눈다.
나는 ‘기도제목’을 나눈다고 하는 표현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기도 요청을 한다, 서로 어려운 것을 나눈다, 내가 기도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는 식의 표현을 써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그렇게 기도제목을 나눌때 들어보면,
압도적 대다수가 자기 힘든거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힘든게 없으면 기도할게 없다고 한다.

기독교인 다수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기독교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볼 수 있다.
(혹은, 내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어떤 영적 상태에 놓여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힘든일을 해결하고자하는 것에 모두 함몰되어있다는 것은,
현대 기독교가 힘든일을 해결하는 기독교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든일은 물론 해결해야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힘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기회이다.
그리고 그 힘든 일을 통해서 내가 단련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힘든 일들은 정말 힘들다. 아프다.
그렇지만 그 힘든 일을 해결하려고만 노력하는 종교는,
기복종교의 모습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