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되는 설교 억지로 듣기

내가 가끔 하는 practice 가운데 하나는,
인터넷에서 랜덤으로(?) 설교를 듣는 일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교회의 전혀 알지도 못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 모두)
아, 그리고 전혀 동의하지 않는 설교자의 설교도 가끔 듣는다. 조엘 오스틴이나, 조용기, 김홍도 같은 분들 ㅎㅎ

이건…
대단히 힘든 일이다. -.-;

새파랗게 어린 설교자가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반말을 찍찍 하는 정도는 오히려 봐줄만 하다.
자기 자랑, 논리의 비약, 말도 안되는 신학, 앞뒤가 맞지 않는 스토리 전개, 조선일보식 quotation…
뭐 문장을 지나치게 길게 써서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주어와 목적어가 맞지 않아 헷갈리게 하는 건 그저 애고정도라고 봐줘야 할까.

그나마 다행인건, 요즘 설교가 그리 길지 않다. ^^
30분 정도 고통스럽게 버티면 대충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글쎄… 고깝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설교를 들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동료 그리스도인의 아픔에 동참하고 싶어서이다.
혹은 그런 설교를 들어야만 하는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고 싶어서이다.

정말… 교회가 많이 아픈게 맞는 것 같다.

예수 믿는게 체질이 아닌 장점

나는 예수 믿는게 참 체질이 아니다.
정말 예수 믿는게 잘 안된다.
예수 잘 믿는게 안된다 고 써도 되겠군.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거짓된 겸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난 정말 그렇다.
진짜 예수 잘 믿는게 내겐 참 힘든 일이다.
아주 체질에 안 맞는다.

예전에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자신은 신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신앙이 자신에게는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치열하게 그것을 연구하고 나서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완전 위로가 되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신앙이 아주 몸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소화가 되는 반면,
나 같은 사람은 늘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은 어색함을 조금씩 극복해가게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체질인 사람은 쉽게 연마하지 못하는 근육들이 연마되어,
오히려 신앙이 체질이었다면 갖지 못할 장점들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내겐 예수 믿는게 영 체질이 아닌데… 그것이 오히려 신앙의 강점으로 작용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찬양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신앙이 자라가는데 있어…

신앙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설명,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자세한 논증,
살아갈 길에 대한 가르침 등등이 매우 참 중요하다.

그렇지만,
신앙의 어떤 영역은,
하나님을 깊이 찬양하는 것이 없이는 도달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저 다른 것 없이,
그분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높여드리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갈망하고,
그분을 깊이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약할때 도움을 주신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분의 위대하심, 그분의 크심, 그분의 자비로우심, 그분의 영광을 그저 깊이 찬양하는 것이다.

나는 ‘예배의 회복’을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치 예배의 회복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인양 이야기하는 예배 지상주의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높여드리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현대 예배와 신앙과 심지어는 신학에서도 점점 배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

형제

내가 대학때 대전에서 다녔던 작은 개척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집사’, ‘장로’ 이런 직책이 없었다..

운영위원회라는 것이 있었고, 그 운영위원회에서 행정적인 일을 담당하긴 했지만…
그분들은 그야말로 그 역할을 담당하는 분들이었고, 그나마 그 운영위원들도 돌아가면서(?) 했다.

오히려, 소그룹을 담당해서 그 소그룹을 섬기는 리더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교회의 영적 리더십을 담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같은 대학생이, 나보다 10살, 20살 많은 분들을 호칭할때, ‘아무개 형제님’, ‘아무개 자매님’ 식으로 불렀다.
처음엔 좀 이상했지만… 그분들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도 그게 나중에는 뭐 그냥 자연스러워졌다.

….

우리 교회에서는,
내가 목사님 부부를 제외하고는 제일 나이가 많다. ^^
그중에는 학생들도 있고, 나와 20살 이상 차이나는 사람도 (당연히) 있다.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나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하는 것을 참 난감해 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나를 ‘선생님’ 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나를 ‘간사님’ 이라고 부른다.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형’ 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지난 주일에 교회 모임에서는,
내 호칭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몰라 다들 어려워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형이라 부를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젊은’ 교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에 어려워 하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 내가 나보다 20살 많은 분들을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때 그분들보다 교회에서 너무 무게를 많이 잡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나를 부르는 호칭에 힘들어 하는걸까?
그냥 ‘오승 형제’라고 부르기엔 너무 무게를 많이 잡고 있는 걸까?

뭐 그런 생각을 좀 해 보았다.

허걱 이런…

어제 운전을 하면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아마 지난주쯤 했던 설교 인것 같았는데…

내가 ‘사랑’시리즈에서 하고자 천천히 풀어보고자 했던 몇가지 이야기를 후다닥~ 다 해버리셨다. ㅎㅎ
이런 멘붕…?

그렇지만,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이 이런 식으로 confirm이 될때 느끼는 묘한 안도감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로움이랄까 서러움이랄까 이런게 확~ 거두어지는 느낌은 받곤 한다.

감사한 일이다.

작은 배려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중에,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 탓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의 영역에 문제가 생기면 높은 사람들을 잔뜩 cc 해서 이메일을 돌린다. 그러면서 ‘얘 때문에 일이 안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broadcasting을 한다.

최근에는 내가 그 희생양이 되었다. ^^
이 사람 때문에 열받아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뭐 그러려니… 하면서 차분하게 반응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manager가 갑자기 나를 조용히 conference room으로 부르더니만…
얘가 이런 이메일을 보낸 것 때문에 혹시 마음이 상했으면 내게 얘기해 달라. 내가 얘에게 주의를 주겠다. 얘도 잘해보려고 하다보니 자주 의욕이 넘쳐서 그러는 것 같다….
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순간,
그나마 내 마음에 남아있던 부글부글~이 사악~ 내려가는 것을 경험했다.
이미 머리로 다 알고 있었던 일이었고, 나름대로 그래서 이성적으로 잘 처리를 하고 있었지만… 뭐 그래도 기분 나쁜건 사실이었는데,
이 manager가 30초 정도 내게 해준 말 때문에 기분이 훨씬 더 나아졌다!

때로는,
아주 보잘것 없는 작은 친절이나 배려가 어떤 사람에게는 큰 impact가 있는 것 같다.

열심히 살지 말기?

예전에 내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때에는 교련시간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럴때 선생님이 좀 수가 틀리면 단체기합을 줬다.
혹은, 좀 고약한 선생님을 만나면, 교련이 아니더라도… 한반에 70명이 넘는 남자애들을 수업 시간 중간에 갑자기 운동장에 집합시켜 단체기합을 주고, 선착순을 시켰다.

나는 그렇게 선착순을 할때에도 늘 온 힘을 다해서 뛰었었다. 기합을 받을 때에도 정말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받았다.
주변의 친구들이, 너처럼 벌을 열심히 받는 애가 다 있느냐고 놀릴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몹시 불편했었다.

한동안 허리가 좀 좋지 않았고, 그 후에는 감기에 걸려서 골골했고, 그 후에는 천식 때문에 또 고생하고…
이래저래 운동을 좀 쉬었었다.
그러니까 체중도 늘고, 몸도 무겁고 영… 힘들었었다.

이번주 들어서 오랜만에 다시 운동을 했다. 뭐 당연히 열심히… -.-;
그런데, “열심히” 운동을 하니, 몸에 무리가 온다.
여기 저기 근육통도 있고, 다시 허리에도 좀 무리가 가는 듯 하고…

예전에 몸이 팔팔하던 시절에는,
무조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서 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심한 자책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늘어감에 따라,
죽어라고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때로 지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면서 비로소 “은혜”가 조금씩 더 깨달아지기도 한다…

이주의 명언

“성숙의 모습은 한가지이지만, 미숙의 모습은 다양하다”
– Shiker

지난주일, 몸이 골골해서 교회 예배를 빠졌다. 아파서 교회에 못간건 10년쯤 전에 한번쯤 있었던 것 같을 정도로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우리 목사님은 하필 내가 없는 주에 더 좋은 설교를 하셔서 내 마음을 뒤집어 놓으신다. ㅋㅋ

공동체와 은혜

우리가 개인의 결심으로 영웅적인 삶을 살면요, 그 사람이 영웅이 되고, 그 사람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이 의지력 싸움이 되어버립니다. 누가 더 쎄게 결심해서 하나님 뜻 대로 사느냐 하는 거죠.
그래서 교회 내에 자기 자랑이 난무하게되고 공로의식이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지면, 그렇게 해서 어떤 일이 되면, 그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갑니다.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의지력 싸움이 아니라, 은혜의 문제로 바뀌어 버립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한 것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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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아니 내가 생각해도 참 기특한 생각이 내게서 떠오른다… 싶을때가 있다.
위에 쓴 내용이 그렇다.

요즘 내가 공동체와 은혜에 대해 위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해보고 있다.